존 람보가 온다. 1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질끈 동여맨 머리띠도 풀고, 오랜 객지 생활을 끝낸 채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느지막이 찾아온 여유를 즐긴다. 악몽과도 같던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말년에 드디어 평화로운 안식을 맞이하는가 싶지만, 혼탁한 세상은 역시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딸처럼 여겼던 소녀가 멕시코 카르텔에 납치되며, 그는 자신의 살상 본능을 깨워 다시 한번 마지막 전쟁을 치른다. 리암 니슨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아버지 액션 류의 익숙한 플롯을 떠올리게 하지만, 결정적으로 스탤론은 니슨이 아니다. 그는 이미 37년 전부터 무구한 전쟁터에서 활동했던 원조 람보다. 영화는 그에 걸맞은 뼈와 살이 분리되는 핏빛 복수를 무자비하게 펼쳐낸다.
미국의 소설가 데이빗 모렐이 1972년 발표한 소설 <퍼스트 블러드>는 베트남전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참전용사들의 PTSD 사회 문제를 다룬 액션 스릴러로, 일찌감치 영화화 판권이 팔렸지만, 원래 주연으로 염두에 두었던 스티브 맥퀸이 베트남전에 나오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탓에 오랜 기간 표류하던 프로젝트였다. 잠정적으로 보류된 이 기획이 급물살을 타게 된 건 <록키>로 스타덤에 오른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각본이 넘어가면서부터. 결국 스탤론은 록키에 이어 두 번째 인생 캐릭터를 얻게 된 셈인데, 7번이나 각본을 고쳐 쓴 끝에 모두 사망하는 암울한 원작과 달리 한줄기 구원의 빛을 내리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 때문에 트로트먼 대령 캐스팅에 우여곡절을 겪지만 현재 우리가 아는 프랜차이즈로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1편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걸은 람보 시리즈
<람보> 1편의 흥행 성공으로 자연스럽게 속편이 재빠르게 만들어지는데(그것도 속편의 제왕 제임스 카메론의 각본으로), 그 결과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던 반영웅은 아이러니하게 하드 바디를 외치던 레이건 시대를 대표하는 전쟁 아이콘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람보는 마초이즘을 상징하는 클리셰가 되어버린다. 1988년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3편이 그 정점으로 영화가 끝나며 뜨는 “용감한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바친다”는 자막을 보면 얼마나 이 영화가 태생적인 아이러니를 갖게 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시대적 변화에 적응 못하고 오랫동안 박제되다가 2006년 만들어진 <록키 발보아>로 건재를 과시한 스탤론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람보도 2008년 20년 만에 부활시켜 무사히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거기에서 끝을 맺었으면 완벽한 해피엔딩이었거늘,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두 편의 록키 스핀오프 <크리드> 시리즈로 재미를 본 스탤론은 다시 람보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첫 번째 영화에서부터 무려 37년 후 미국으로 돌아온 존 람보의 마지막 전쟁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구성도 의도적으로 1편과 유사하게 배치했고, 이번 작품이 람보 프랜차이즈의 <로건> 같은 영화가 되길 스탤론은 희망했다. 판단은 관객들의 몫이지만, 원작자인 데이빗 모렐은 전쟁 상흔에 시달리는 람보의 고뇌가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며 혹평을 쏟아냈다. 감독으로 발탁된 건 오랜 기간 세컨드 유닛 감독으로 활동했고, <완전범죄 프로젝트>를 찍었던 ‘애드리언’ 그런버그. 록키의 아내 이름과 일치한다는 게 재밌는 우연이다.
람보 음악의 아버지 제리 골드스미스
먼저 개봉한 해외에선 람보 시리즈 중 최하의 성적을 기록 중인데, 실망스러운 반응 속에서도 그나마 위안거리를 찾아본다면 바로 음악이다. <록키>에게 그 유명한 빌 콘티의 테마 “Gonna Fly Now”가 있다면, <람보>에게는 제리 골드스미스의 “It's a long road”가 있다. 캐나다 출신의 가수 댄 힐이 걸쭉하고도 피로한 목소리로 부르는 이 노래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 놓인 유랑객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은유적인 가사와 애수 어린 멜로디로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골드스미스는 시리즈 내내 이 주제가를 다양하게 변주해가며 반전(反戰) 영화의 고독하고 처절한 안티 히어로 배경음악을 영웅서사의 액션 블록버스터 스코어로 180도 반전(反轉) 시켜냈다. 존 윌리엄스와 함께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대표하는 전설 중의 전설만이 할 수 있는 솜씨다.
람보 시리즈는 제리 골드스미스의 액션 스코어 중 가장 정점에 있는 작품들로, 호쾌하고 박력 넘치는 오케스트레이션과 차갑고 비정한 신디 사운드 그리고 고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리움의 정서를 지닌 기타 선율을 결합시켜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트럼펫 솔로는 고독한 남자를 상징하는 동시에 군대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피력하는 효과적인 장치며,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 악기가 들려주는 따뜻한 귀향의 분위기는 종종 오보에의 불길한 기운으로 치환되며 이방인을 바라보는 시골 깡촌의 싸늘한 민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편에선 베트남이 무대가 되기에 80년대 특유의 신디사이저로 극동의 사운드를 모사했고, 3편에선 중동 소리들을 가져와 아프가니스탄 배경에 어울리는 이국적인 색채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리즈 내 하이라이트에서 폭발하듯 휘몰아치는 베이스 드럼과 심벌즈, 부서질 듯 쉴 새 없이 약동하는 피아노와 포효하는 브라스가 만들어내는 그만의 인장과도 같은 서스펜스 액션 스코어들이 가히 백미다.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효과 만점의 위협적이고도 자극적인 소리들의 총합은 시각적 쾌감을 넘어서며 살인 병기로서의 일당백 위용을 극대화해주고 있다. 그것이 1편에선 전쟁 트라우마로 빚어진 공포의 절규였다면 시리즈를 거쳐 세계관이 확장되며 외부 적대 세력 척결을 다짐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발로처럼 들리기도 한다. 작곡가는 180도로 바뀐 영화와 마주하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이런 변화에도 끄떡없던 골드스미스였지만, 2004년 암으로 타계해 20년 만에 복귀한 4번째 람보엔 참여할 수 없었다.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은 2대 람보 작곡가 브라이언 타일러
그 대신 스탤론이 선택한 인물은 당시 데뷔 10년 차를 맞이한 따끈따끈한 신예 영화음악가 브라이언 타일러였다. 데뷔 5년째였던 2003년까진 메이저에 입성하지 못했고, 그 후에도 본격적인 액션물이라곤 2006년 <분노의 질주: 도쿄 드리프트>와 2007년 이연걸과 제이슨 스타뎀이 나온 <워>가 전부였던, 주로 스릴러와 호러에 두각을 보인 그를 전격적으로 발탁한 스탤론의 결단은 과감했다. 사실 브라이언 타일러는 메이저로 입성한 첫해 제리 골드스미스를 대체해 <타임라인>의 음악을 마무리 지은 인연이 있다. 둘의 사운드트랙은 모두 발매돼 남성적이며 선 굵은 스타일이 비교되며 화제를 모았다. 그런 연유에서 <람보>의 음악을 타일러에게 맡긴 건 어찌 보면 손쉬운 혜안이었는지 모른다.
이후 브라이언 타일러는 네 편의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익스펜더블> 삼부작, 그리고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 같은 MCU 영화들을 거쳐 크고 다양한 시즌용 블록버스터들을 경험하며 할리우드 활극 스코어 장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런 밑바탕엔 데뷔 초 골드스미스의 기조를 이어받고자 했던 그의 부단한 노력과 끊임없는 시도들이 숨겨져 있다. <람보 4: 라스트 블러드>가 제리 골드스미스의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복원하는 데 의의를 뒀다면 11년 만에 만들어진 이번의 <람보: 라스트 워>에서는 원 재료들을 가지고 더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해체하고 재조합해 자신만의 람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시리즈 내 음악에서 가장 벗어났지만 그럼으로 인해 가장 테마가 두
드러지는 역발상을 낳았다.
고독한 늑대이자 퇴역 군인인 람보를 상징하는 트럼펫 솔로와 직선적이며 파워풀한 접근법은 그대로지만, 80년대식 신디 사운드는 모던한 편곡 속에 묻혀 사라졌고, 오리지널 테마는 철옹성처럼 단단한 현악 오스티나토와 스피디하고 파워풀한 퍼쿠션 비트, 그리고 영웅적인 코러스에 둘러싸여 흔적만 남았다. 주제가(혹은 삽입곡) 얘길 안 할 수 없는데, 2편에서 나온 프랭크 스탤론이 부른 “Peace In Our Life”나 3편에서 빌 메들리가 부른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대신 이번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쓰이는 건 후반부 터널 안에서 크게 틀어놓는 도어즈의 “Five to One”이다. 멕시코에 장벽을 쌓자고 주장하는 트럼프 시대에 전쟁 영웅 람보가 베트남전 시대에 활약한 반전 그룹 도어즈의 노래를 도륙하는데 쓰는 것만큼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의미들을 다 떠나 고전이 주는 감동은 역시 매우 크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