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말을 맞아, 2010년대 영화 베스트 리스트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2013년 작 <보이후드>는 그 리스트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다. 메이슨이라는 소년이 성인이 되는 12년의 시간을 리얼타임으로 담아 배우들이 나이 들어가고 있는 과정으로 리얼리티를 살린 <보이후드>는 <멍하고 혼돈스러운>(1992), <스쿨 오브 락>(2003) 등 음악에 깊은 조예를 보여줬던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선곡 감각이 빛난다.


Yellow

Coldplay

<보이후드>는 주인공 소년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저 위를 응시하는 메이슨의 얼굴에선 이렇다 할 감정을 엿볼 수 없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조각. 아마도 메이슨은 가만히 늘 그렇게 잔디에 누운 채 엄마를 기다리면서 어제와 비슷한 듯 다른 하늘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문을 여는 노래는 영국의 국민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Yellow', 밴드에게 처음으로 명성을 안겨다준 노래다. 까만 화면 위로 크리스 마틴(Chris Martin)의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뿌려지면 머지않아 구름이 무심하게 흩어져 있는 적당히 푸르스름한 하늘이 등장한다. 이윽고 터지는 록킹한 사운드가 대번에 힘찬 기운을 전하긴 하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나 아침을 여는 햇빛이 떠오르는 '노랑' 대신 속시원하게 파랗지도 않은 하늘은 어쩐지 낯선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Hate to Say I Told You So

The Hives

엄마에게 돌멩이를 깎아서 화살촉을 만들 거라고 말하던 메이슨이 자전거를 타고 집 밖을 나서면 스웨덴 출신의 개러지 밴드 하이브스(The Hives)의 출세작 'Hate to Say I Told You So'가 터져 나온다. 시작부터 성난 것처럼 쟁글대는 기타 소리가 자전거를 탄 메이슨이 동네를 빠른 속도로 내달리거나 다이나믹한 일탈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예상하게 만드는데, 다음 장면은 그저 친구와 함께 파란 스프레이로 벽에 낙서하고 있는 게 전부다. 그리고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딸이다)가 "집에 와서 밥 먹으라"고 전한다. 역시 특별할 것도 없는 6살의 익숙한 순간. 링클레이터가 <보이후드>에 음악을 쓰는 방식은 이처럼 해당 장면의 의미를 정확하게 통과해야 한다는 '결단' 같은 건 일절 느껴지지 않는 유연한 태도가 엿보인다.


Soak Up the Sun

Sheryl Crow

메이슨은 애인과 싸운 엄마(파트리샤 아퀘트)의 뜻에 따라 갑작스럽게 텍사스를 떠나 휴스턴으로 이사 가게 된다. 메이슨과 사만다는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 반대하다가도 순순히 따라나선다. 작은 밴에 세 가족의 짐을 한가득 실으면서 셰릴 크로우(Sheryl Crow)의 'Soak Up the Sun'이 흐른다. 원하던 이사는 아니었지만 경쾌한 리듬과 연주의 노래 덕분에 이번 이사가 그리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전 시퀀스에서 같이 자전거를 타고 벽에 낙서하던 친구가 열심히 뒤따라와 메이슨에게 손을 흔든다. 그냥 지나가는 대목 같아 보였던 시퀀스가 메이슨의 삶에선 꽤 중요한 기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음악은 계속 이어지고, 메이슨과 사만다는 티격태격 대면 엄마가 그걸 말리는 사이 텍사스는 점점 멀어진다. 앞서 나온 콜드플레이와 하이브스의 트랙이 모두 2000년에 발표돼 영화 속 배경인 2002년과는 정확히는 맞지 않는 설정이었지만, 셰릴 크로우의 노래는 2002년에 나왔다.


Could We

Cat Power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꽤 많은 노래를 사용하던 영화는 메이슨의 가족이 휴스턴에 간 이후 꽤 오랫동안 음악을 쓰지 않는다. 그 사이 주말에 한량 같은 아빠(에단 호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엄마에게 교수 애인이 생겨 결국 그의 자식이 되는 등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셰릴 크로우의 'Soak Up the Sun'이 나오고 24분이 지난 후에야 다음 노래 캣 파워(Cat Power)의 'Could We'가 등장한다. 아빠와의 두 번째 외출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바로 전 신에서 술을 달고 사는 의붓아버지가 왜 집에 먼지를 치우지 않느냐고 강압적으로 다그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등장하는 음악과 함께 아빠와 놀러가는 장면은 은연 중에 조이고 있었던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아빠와 보내는 짧은 시간이 앞으로 메이슨과 사만다에게 큰 힘이 되리라는 걸 직감한다. 하지만 한동안 우리는 메이슨 가족이 꼰대 가부장인 의붓아버지가 저지르는 폭력이 점점 커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One (Blake's Got a New Face)

Vampire Weekend

엄마는 드디어 메이슨과 사만다를 데리고 의붓아버지에게서 도망친다. 또 한번 시간을 껑충 뛰어넘으면 2008년이다. 흑인 대통령 후보 버락 오바마가 미국 사회를 정의롭게 이끌어낼 것이라는 희망이 부풀던 해다. 메이슨의 가족 역시 오바마 지지자다. 통통 튀는 록 사운드로 가득한 뱀파이어 위크엔드(Vampire Weekend)의 'One(Blake's Got a New Face)'가 장면의 시작과 함께 울려, 메이슨과 사만다의 오바마를 지지하기 위해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는 모습이 즐겁기만 해 보인다. 오바마 지지 팻말 꽂아도 되냐고 묻자 곧장 "여긴 내 개인 사유지야, 총 맞기 전에 꺼져!"라고 내뱉는 이웃이 나타나도 그저 들떠 보일 따름이다. 부시의 야만적인 통치를 견뎌낸 이들이 오바마에게서 희망을 꿈꾸는 시대의 분위기는, 폭압적인 가부장에게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지를 다지는 메이슨 가족의 상황과 맞물린다.


Hate It Here

Wilco

메이슨과 캠핑 하러 가는 길 아빠는 차 안에서 윌코(Wilco)가 2007년 발표한 컨트리 넘버 'Hate It Here'가 나오자 크게 따라부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여자한테 차이고 부르는 "직설적인 가사의 컨트리 송"이다. 노래를 열심히 따라부를 뿐만 아니라, 프로듀싱이 비틀즈(The Beatles)의 앨범 <Abbey Road>와 비슷하다는 음악적인 지식까지 일러준다. 이 훈훈한 풍경은 메이슨에게 아버지는 '음악' 같은 존재고, 그와의 시간을 보내면서 한뼘한뼘 성장해 굳건한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는 예상을 다시 한번 단단하게 한다. 윌코의 노래는 집 청소도 하고 침대 시트도 갈고 세탁기 쓰는 법까지 배웠다고 말하는 청승 맞은 노래인데,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외딴 마을을 걷는 메이슨 부자의 여정에도 퍽 잘 어울린다.


Band On the Run

Wings & Paul McCartney

엄마는 또 시원치 않은 남자를 만나고, 이제 15살이 된 메이슨은 못 마땅해 하는 눈치다. 그런 와중 생일을 맞은 메이슨은 사만다와 함께 아이의 현재 와이프 애니의 친정집을 방문한다. 아빠가 16살이 되면 준다고 했던 차를 팔았다는 걸 알게 되자 메이슨은 심통이 나지만, 생일 선물이라며 비틀즈 멤버의 솔로곡들을 수없이 편집해 공들여 만든 'The BLACK Album'을 건네고 거기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는 걸 들으면 어느새 좀 누그러진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던 메이슨이기에 그 변화가 더 쉽게 보인다. 부쩍 어른 같아진 외모보다 이제는 때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걸 보면서 새삼 <보이후드>가 그의 성장기를 담은 영화라는 걸 깨닫는다. 폴 매카트니와 그의 밴드 윙스의 노래 'Band on the Run'은 아버지 메이슨이 2번째 디스크(비틀즈의 <The White Album>을 따라 2CD다)의 첫 곡으로 배치한 노래다. "폴을 따라 파티에 가서 , 조지와 신에 대해 대화를 하면, 존이 사랑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하고, 링고가 '그냥 현재를 즐기면 안돼?'" 말하는 구성이라고. 'Band on the Run'을 들으면서 네 사람은 어느새 시골집에 도착한다.


I’ll Be Around

Yo La Tengo

메이슨은 어느 파티에서 시나를 처음 만난다. 사만다 커플과 컨트리 뮤직 클럽에서 공연을 즐기다가 빠져나온 그들은 앞으로 미래와 대학생이 된다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 하며 새벽을 지샌다. 아직도 어둠의 기운이 역력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건물 옥상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아침을 맞으며 키스를 나눈다. 바로 이 순간을 채우는 건 미국 인디밴드의 베테랑 요 라 텡고(Yo La Tengo)의 'I'll Be Around'다. 천천히 귀를 간지럽히는 어쿠스틱 기타와 그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는 앰비언트로 이뤄진 인트로는, 저 멀리 동트는 하늘을 보며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젊은 연인을 포근하게 감싼다. 가을의 새벽 공기는 서늘하기는커녕 더없이 따뜻해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의 메이슨은 실연에 아파하고 있다.


Hero

Family of the Year

사만다에 이어 메이슨도 대학이 되어 집을 떠날 때, 엄마는 이제 자기 삶에 남은 건 장례식뿐이고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며 절규한다. 그 처연한 모습을 뒤로 한 채 메이슨은 텍사스로 먼 길을 떠난다. 패밀리 오브 더 이어(Family of the Year)의 노래 'Hero'는 마치 메이슨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날 보내주세요. 당신만의 영웅이 되긴 싫어요. 당신만을 위해 살 순 없어요. 세상과 맞서 싸워보고 싶어요." 컨트리 풍의 노래(링클레이터는 <보이후드>에서 非 컨트리 밴드가 만든 컨트리 풍의 노래를 영화 전반에 사용하고 있다)와 함께 저 멀리 사람 하나 없이 드넓게 펼쳐진 길을 로고가 다 떨어진 차로 달리는 여정, 일찍이 사진에 재능을 보였던 메이슨은 종종 멈춰 서 풍경들을 담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는 길을 한발짝 더 내딛은 메이슨은 어쩐지 한결 가벼워 보인다.


Deep Blue

Arcade Fire

기숙사에 도착한 메이슨은 룸메이트와 그의 친구들과 같이 바로 빅 벤드 랜치 주립 공원으로 하이킹에 나선다. 메이슨과 니콜은 어느 새 나란히 걷고 있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풍경. 니콜은 말한다. "흔히들 말하지, 이 순간을 붙들라고. 난 그 말을 거꾸로 해야 할 것 같아. 이 순간이 우릴 붙잡는 거지." 메이슨의 대답.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시간은 영원한 거지. 순간이라는 건 언제나 바로 지금을 말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고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두 사람은 시선이 엇갈리다가 이윽고 눈을 맞춘다. 그들 주변엔 노랗게 석양이 차오르고 있다. 2시간45분 동안 메이슨의 12년을 담아낸 <보이후드>는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Deep Blue'로 대장정을 마무리 한다. 이 선곡이 흥미로운 건,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오프닝에 'Yellow'가 쓰인 것과 반대로, 노을이 퍼지고 있는 엔딩을 'Deep Blue'가 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케이드 파이어에게 그래미어워드 올해의 앨범의 영광을 안긴 세 번째 앨범 <The Suburbs>에 수록된 노래는 그 앨범 제목처럼 교외의 눈부신 풍경이 안기는 감동을 실컷 만끽할 수 있게 돕는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