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소셜포비아>, <한여름의 판타지아>, <거인> 등 부산국제영화제는 매년 묵묵하게 제자리에서 빛을 내는 한국 독립영화들을 발굴해왔다. 올해의 작품들 또한 그 매력이 가지각색! 그간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소재는 물론 상업영화에서 조연으로 활약하던 배우들의 원톱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니, 다소 새로운 영화를 접하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주목하시길. 2017년을 빛낼 한국 독립영화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몇 작품을 소개한다.


꿈의 제인

감독 조현훈|출연 이민지, 구교환, 이주영|상영시간 100분|한국영화의 오늘_비전

<꿈의 제인>은 소현(이민지)이 겪는 두 개의 이야기가 엮이며 전개된다. 두 이야기 중 어떤 것이 꿈이고, 현실인지는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두 이야기의 성격이 환상과 잔혹, 두 갈래로 선명히 대비될 뿐이다. 가출한 소녀 소현(이민지)은 자신을 받아줄 가출팸(가출을 한 아이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을 찾아 떠돌다, 두 개의 가출팸에 합류하게 된다.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출팸의 운영자는 트랜스젠더 제인(구교환),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출팸의 운영자는 '아빠'라고 불리는 소년이다.  

<꿈의 제인>은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장면의 위치가 중요한 영화다. 사건들은 뒤죽박죽 섞여있는 것 같지만, 잘 따라가다 보면 이들이 유기적으로 엮여있음을 알 수 있다. 소현의 꿈속을 걷는 듯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지내는지, 방법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내내 울먹인다. '같이 지내는 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터득한 아이들이 형성한 가출팸이라는 잔혹한 정글은 그 안에서 형성되는 폭력적인 위계질서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준다. 마치 소현처럼, 외부적 요인과 편견으로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내면 속 용기를 북돋는 역할은 제인이 맡는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사람은 사랑받고 싶어서 누군가를 사랑하거든" 등의 시니컬하지만 따스한 가르침을 전하는 엄마, 제인은 다소 몽롱한 영화 속에서 관객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잣대가 되는 대사들을 읊으며 내내 반짝이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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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을 완벽히 소화해낸 배우들
트랜스젠더 제인을 연기한 구교환은 독립영화계에서는 이미 유명한 감독 겸 배우다. 거식증을 앓고 있어 깡마른 몸을 자랑하는 제인을 곧은 인물로 잘 소화해냈다. 영화의 문을 열고 닫는 소현은 <응답하라 1988>로 대중에게 확실히 얼굴을 알린 이민지가 연기한다. 그녀의 발랄한 모습만을 기억하고 이 영화를 접한다면, 그녀의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체감할 수 있다. <춘몽>, <누에치던 방>에서도 얼굴을 비춘 이주영(지수 역)의 연기도 눈에 띈다.


환절기

감독 이동은|출연 배종옥, 이원근, 지윤호|상영시간 115분|뉴커런츠

미경(배종옥)은 말이 별로 없는 무뚝뚝한 아들 수현(지윤호)과 함께 지낸다. 남편은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느라 집안엔 늘 둘뿐이다. 어느 날 수현은 집에 단짝 친구 용준(이원근)을 데려온다. 엄마를 잃은 용준의 사연을 아는 미경은 용준도 아들로 여기며 지낸다. 제대를 맞이한 수현이 용준과 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지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고 현장에 남은 두 사람의 카메라를 살펴본 미경이 그들이 친구보다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환절기>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의 느낌을 품은 영화다. 영화는 미경과 용준, 수현의 환절기를 그려낸다. 용준과 수현이 연인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미경은 아들 수현보다 싹싹하게 아들 노릇을 했던 용준을 가까이 둘 수 없다. <환절기>는 이동은 감독 자신이 그래픽 노블로 만들었던 작품을 영화로 재탄생시킨 영화다. 이야기 속 인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감독의 노고가 그대로 드러나는 <환절기>의 매력은 섬세함이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엄마 미경의 내면을 살린 배종옥의 연기에는 섬세한 결이 살아있다. 약간 어눌하지만 그래서 더 용준스러운, 유약미 넘치는 이원근의 모습 또한 주목할 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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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훅 들어오는 묵직한 대사들
<환절기>는 미경과 용준 사이의 온도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자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내용이지만 감독은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는 방법을 택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가운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가끔씩 훅 들어와 마음을 묵직하게 만드는 대사들이다. 무심하게 내뱉는 한마디엔 그들이 농축시킨 관계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는 온기가 묻어난다. 이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 쓰다듬는 힘을 지녔다.


용순

감독 신준출연 이수경, 김동영, 장햇살|상영시간 104분|한국영화의 오늘_비전

용순(이수경)은 온몸에 까칠함이 배어있는 소녀다. 학교 체육 선생님과 연인 사이인 용순은 어느 날 친구의 제보로 자신의 애인이 학교의 누군가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용순의 단짝 문희(장햇살)와 빡큐(김동영)가 용순을 도와 증거들을 모으기 시작하지만,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모두 그들을 어린애 취급할 뿐이다. 안 그래도 열이 뻗쳐 죽겠는데 설상가상 용순의 아버지는 몽골 여자를 새엄마로 들여온다. 뭐든지 밀어내고만 싶은 용순은 체육을 되찾기 위한 저만의 계획도 저돌적으로 밀어붙인다. 결국 영화의 후반부, 선생과 제자, 그리고 제삼자들은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용순>은 제40회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된 단편 <용순, 열여덟 번째 여름>의 장편 버전으로, 신준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매달리고 돌진하고 재지 않는 소녀 용순을 보고 있자면 우리들의 지난 사춘기 시절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까칠함과 불만으로만 가득 찬 용순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가 아직 성장하고 있는 소녀이기 때문이다. 용순의 내면 깊은 곳 불안한 심리는 무언가를 계속 찢는다거나, 옷깃을 꾹 쥐는 소소한 행동들로 시각화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지점이 하나 더 있다면, 이미 관객들에게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펼치는 감초 연기다. 박철민, 김응수, 최여진은 능청스러운 연기로 영화의 사이드를 탄탄히 메운다. 작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이수경 외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빡큐 역을 맡은 김동영이다. 시를 쓰며 눈물로 자신의 글을 적시는 감성남 빡큐. 영화 속 역대급 장면의 반 이상은 그가 탄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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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성이 짙은 청춘영화
거칠 것 없는 당돌한 소녀 용순은 육상부다. 영화 속에서 용순은 뛴다. 주로 무언가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뛰고, 어떤 상황을 피하기 위해 뛴다. 해가 쨍한 한여름,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용순을 보고 있자면 관객까지 숨이 턱턱 차는 느낌인데, 이 답답함이 어느 지점부터는 벅참과 설렘으로 변주되기 시작한다. <용순>에는 십 대 시절에 느낄 만한 대부분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한 단계 성숙해지는 용순은 파릇파릇한 청춘 그 자체다.


아기와 나

감독 손태겸|출연 이이경, 정연주|상영시간 112분|한국영화의 오늘_비전

제대를 앞둔 도일(이이경)은 집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막내아들이지만,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순영(정연주)과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병원에서 도일은 속도위반으로 낳은 아들이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혼란스러움도 잠시, 순영이 말없이 사라져버리고 제대 후에 기약됐던 일자리가 파토나며 어머니는 암이 재발하여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도일. 그는 아기와 함께 한꺼번에 닥친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성장은 사춘기 시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십대 초반의 아버지가 아기와 함께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아기와 나>는 꽤 독특하고 신선한 설정으로 눈길을 끈다. 관객들에게마저 외면당할 만큼 한심했던 도일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불쑥불쑥 성장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 과정이 꽤 자연스럽다. <아기와 나>는 단편 <야간비행>으로 2011년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3등 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고, <여름방학>으로 국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한 감독 손태겸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에서도 미리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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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경과 정연주의 얼굴들
<아기와 나>에는 클로즈업 장면이 유난히 많다. 스크린을 꽉 채우는 이이경의 얼굴은 장면마다 다른 불안의 색을 띈다. 쫀쫀하게 메워진 그의 막막함은 스크린 너머 관객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이경보다 비중은 적지만, 뇌리에 선명하게 남을 표정을 보이는 정연주의 연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소 느슨한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로 긴장을 불러내는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다음 작품까지 기대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분장

감독 남연우|출연 남연우, 안성민, 홍정호|상영시간 104한국영화의 오늘_비전

송준(남연우)은 택시비 만 원이 없어 동생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가난한 무명 배우다. 그는 성 소수자의 삶을 다룬 연극 '다크 라이프'의 1차 오디션에 합격하게 되고, 2차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무용수인 동생과 친구 우재, 그리고 트랜스젠더 이나의 도움을 받아 주인공 '주디'의 내면을 샅샅이 파고든다. 결국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다크 라이프'의 주연을 쟁취한 그. 자신의 인생을 뒤바꾼 자리에 올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역할이 벅차기만 하다. 우연히 동생의 비밀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분장> 속에서 송준은 자신의 진짜 모습, '진정성'을 최우선하는 배우다. 동성애자 '주디' 역을 맡은 그는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친구와 인권을 논하며 싸우기도 하고 성소수자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자신의 역할 '주디'와 괴리감을 느끼는 송준. 그의 날선 내면 변화가 눈에 띄게 격해지기 시작하면서 영화엔 극적인 활력이 더해진다. <가시꽃> 등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남연우는 <분장>의 연출과 연기를 모두 맡았다.

주목, 이 포인트!|
제대로 이입되는 영화를 찾고 싶다면
<분장>에서 연극은 가장 효과적인 소스로 활용된다. 연극 무대 위에서 내면의 혼란을 제어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송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 손을 꾹 쥐게 만드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흡입력 있는 남연우의 날선 연기가 돋보인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코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