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억을 더듬지 않고도 그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한국을 찾은 것은 몇 달 새 벌써 세 번째다. 10월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로, 11월은 강릉국제영화제의 게스트 자격으로의 방문이었다. 이번 방한은 오직 자신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12월 5일 개봉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그가 일본 밖에서 촬영한 첫 번째 영화다. 세계적인 배우 까뜨린느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 등과 함께한 것만으로도 많은 화제와 궁금증을 쏟아냈다. 그동안 가족 속으로 파고들어 내밀한 균열의 흔적들을 기록해왔던 그가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으로 혈연이 아닌 서로의 필요로 구성된 가족을 다뤄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질감을 선보였다면, 이번에 들고 온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배우라는 선택된 삶에 집중하면서도 그를 둘러싼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진실과 허구의 공존을 관조한다. 오랜 벗인 봉준호 감독에 대한 따뜻한 응원도 잊지 않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의 만남을 소개한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어떤 영화인가.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내가 처음으로 일본 밖에서 일본어가 아닌 언어로 만든 작품이다. 파리에 살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배우인 어머니와 미국에 사는 딸 가족이 오랜만에 친정집을 찾으며 벌어지는 모녀간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영화다.

<아무도 모른다>를 찍고 나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초기 시나리오를 썼다고 들었다. 어떤 계기로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됐나.

<아무도 모른다>(2004) 촬영을 끝내고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연기 경험이 없는 아이들과 작업 하다 보니 오히려 연기를 한다는 게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을 좀 더 깊게 파고들고 싶어서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까뜨린느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까지. 세계적인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이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나.

줄리엣 비노쉬가 출발이었다. 2012년 그를 만났을 때 언젠가 나와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고, 그 이후부터 기획 아이디어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조금씩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이번에 작품을 개봉하며 그 기획이 실현된 거다. 2015년에 거의 지금과 유사한 상태의 플롯이 완성되어 줄리엣 비노쉬에게 건네졌고, 당시 각본에는 이미 어머니 역에 까뜨린느 드뇌브, 남편 역에 에단 호크가 명시되어 있었다. 어찌 되었건 당시 생각한 대로 작품이 실현된 셈이니 정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줄리엣 비노쉬의 열의와 정열이 가장 큰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의 까뜨린느 드뇌브(좌), 프랑소와 돌레악.

까뜨린느 드뇌브의 삶이 영화에 녹아있는 것 같다. 파비안느라는 이름도 그녀의 풀네임 까뜨린느 파비안느 돌레악을 연상시킨다. 또한 영화 속에서 친구이자 라이벌 배우로 언급되는 사라는 요절한 언니 프랑소와 돌레악을 떠올린다.

2003년 초기 각본 안에는 이미 노배우와 그의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친구의 부재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 설정 자체는 까뜨린느 드뇌브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삶과 겹치는 묘사들이 영화에 다수 등장한다. 이 각본을 처음 제안했을 때 주변 분들이 많은 걱정을 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하고. 실존 인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까뜨린느 드뇌브는 대본을 보고 난 후에도 이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파비안느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녔고, 나는 딸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라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주인공의 이름을 자신의 미들 네임인 파비안느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은 까뜨린느 드뇌브였다. “내 성격과 전혀 다르다. 이 인물은 나와 완전 별개다.”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미들 네임은 영화 주인공 이름으로 제안한 것은 미스터리 하다. 왜 그렇게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언어가 다르면 대사에 담긴 정서가 달리 표현될 수도 있다. 원하는 감정을 담아내기 위한 배우들과의 소통에 장애는 없었나.

그 부분을 가장 걱정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정말 뛰어난 통역사를 만나게 됐고, 그분이 현장에서 6개월 동안 함께 하기로 했기에 커뮤니케이션에 한해서는 내게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연기를 마친 뒤에 이게 오케이 컷인지 판단해야 할 때, 대사가 정확하게 표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시차는 생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현장에서의 소통은 아주 만족했다.

10년 전쯤 배두나 배우와 <공기인형>(2009)이란 영화를 함께 했다. 언어는 공유할 수는 없었지만, 촬영하면서 서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언어를 통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이 생겨났다.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확인되고 공유되었을 때가 굉장히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으로 남았다. 이번 현장에서도 그때와 동일한 느낌과 과정이 일어났던 것 같다.

배두나 배우와는 <공기인형>으로 함께 작업했다. 당신의 열성 팬인 류준열 배우도 있다. <부산행>(2016)을 본 후 나중에 함께 하고 싶은 배우로 마동석을 꼽기도 했다. 이들 이외에 함께하고 싶은 한국 배우가 있나.

하정우 배우다. 하정우 배우를 말하면 한국 스태프들이 다 기쁜 표정을 짓더라. (웃음) 나쁜 남자, 나쁜 사람을 연기할 때 섹시한 것은 좋은 배우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아역 배우들에게 대본을 주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는 마법을 보여준다. 샤를로트를 연기한 클레망틴 그르니에는 어땠나.

마법을 쓰지도 쓸 줄도 모른다. (웃음) 이번에도 촬영 전 대본을 주지 않고 할머니 집에 놀러 온 이야기라고만 했다. 현장에서는 통역을 통해 내가 하는 말을 클레망틴 그르니에에게 귓속말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찍었다. 클레망틴 그르니에는 연기 감각이 좋고, 성격이 당돌하고, 터프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 면을 지켜보며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자국 밖에서 작업했는데 어떤 점이 달랐나.

(웃음) 지금 마침 이야기했던 노동 시간에 관해서 대답해야 하는 건가. (인터뷰 장소였던 영화 수입사의 입주 건물은 점심시간 직원들의 완전한 휴식을 위해 건물 전체를 소등했다.) 프랑스는 하루에 8시간만 영화 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 또 주 5일만 일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생각도 못 하던 일이었다. 프랑스의 영화 스태프들에게는 아주 좋은 근무 여건이 주어져 있었다. 나도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생각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벌써 끝난 거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하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덜 끝낸 것 같고, 성취감이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으로 작업을 마치게 되어 이것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야구로 예를 들면 끝까지 완투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라운드에 나갔는데 5회 만에 교체되어 버린 투수의 심정과 같다고 할까. (웃음)

박찬욱 감독도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2018)을 한창 찍고 있는데 조감독이 와서 계획된 시간이 이미 지났으니 오늘 촬영은 여기서 종료하라 해서 적응하는데 힘들었다 했고, 봉준호 감독도 <기생충>(2019)을 찍으며 표준근로시간을 준수했다. (우리나라는 2014년부터 표준근로계약을 작성한 작품들이 개봉되기 시작했다.)

중요한 이야기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촬영파트의 책임자가 여자분이셨는데 그분이 싱글맘이었다, 혼자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어머니다, 일본 같았으면 현장에서 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딱 8시간이면 촬영이 끝나니까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귀가해 함께 저녁을 먹는 일이 가능한 거다. 여성들이 결혼하고 출산을 한 뒤에도 영화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 제도가 이제 일본에도 정착될 필요가 있다.

<어느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람들이 맺어진 유사 가족을 다뤘고,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가족의 이야기에 배우라는 예술가의 삶을 더했다. 어느 인터뷰에 보면 <태풍이 지나가고> 이후 조금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가족영화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졌나.

<태풍이 지나가고>(2016)는 정말 말 그대로 가족드라마였다. 모든 일이 그 집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주 좁은 공간, 반경 10m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좁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성스레 주워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면 보다 큰 것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큰 것을 의식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반면 그 후에 만들었던 <어느 가족>(2018)이나 이번에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같은 영화는 또 다른 삶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보시는 분들은 똑같은 가족드라마 아니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느 가족>은 집과 사회, 가족과 사회의 어떤 접점들과 거기서 벌어지는 마찰을 다루고 있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시야가 확장되는 이야기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원래 가족드라마로 구상하거나 기획했던 것이 아니라 연기라는 것을 삶의 중심에 놓은 세 명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사람(사라)이 있고, 또 여배우(파비안느)가 있고, 여배우가 되려고 했지만 되지 못한 사람(뤼미르)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미묘하지만 각기 색깔이 다른 영화다.

감독님 영화에는 함께 음식을 만들거나 식사하는 장면이 유독 많다. <걸어도 걸어도>(2008)에서는 옥수수튀김,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카레우동,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서는 소바와 매실주를 만들어 먹는 장면이 떠오른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파스타를 만들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있고.

내가 먹는 장면을 좋아한다. (웃음) 먹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음식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또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이것들을 영화에서 구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맛이라는 것은 영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인데, 음식을 만들거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담는 색감, 소리 등이 영화에 실리면 영화를 즐기는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는 느낌을 받는다.

식구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는 식구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한집에 살며 식사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함께 식사한다는 행위가 유대감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

그런 측면도 있다. 누구와 먹는가도 중요하다. 음식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기억과 결부되기도 하고 기억을 환기하기도 한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예를 들어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매실은 할머니, 잔멸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식탁을 둘러앉는 모습에서도 가족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누가 부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앉는지, 중심이 되는 인물은 어디에 앉는지 등에서 말이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묘사할 수 있기 때문에 식사하는 장면을 찍는 일이 흥미롭다.

여배우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문득 키키 키린을 떠올렸다. 키키 키린은 당신에게 어떤 배우였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델로 했다고도 할 수 있는 작품 <걸어도 걸어도>를 통해 키키 키린 배우와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파트너가 되어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정말 존경하는 배우고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아주 엄격한 분이기도 했지만, 또한 재미있는 분이기도 했다. 나는 키키 키린 배우에게 제대로 된 감독이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더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런 배우가 있다는 것은 감독 입장에서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독님의 <어느 가족>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연달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생충>이 북미에서 선전하며 아카데미상 수상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데 봉준호 감독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나 응원의 메시지가 있다면.

봉준호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은 현재를 살아가는 감독 중에서도 손꼽힐만한 뛰어난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작가성과 흥행성을 양립할 수 있는 아주 드문 감독이라고도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도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에 대한 아주 정당한 평가였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상 수상 여부는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을 받게 된다면 정말 멋지고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축하의 메일을 보내겠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계속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나갈 감독이라 확신하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의 행보에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국민감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국제영화제에서는 유독 받은 상이 별로 없었다. 나는 <살인의 추억>(2003)이나 <마더>(2009)도 황금종려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 늦게 세계적인 평가들이 좇아오지 않나 싶다.

유럽 영화계가 아시아 영화에 기대하는 예술적인 측면으로만 평가 받은 게 아니라 가장 봉준호다운 색채가 묻어나는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봉준호 감독이 해외에서도 영화를 찍었지만,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더 밀도 짙은 한국만의 뉘앙스를 듬뿍 담은 <기생충>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게 남의 일이지만 내 일처럼 기쁘고 자랑스럽다.

“이제야 봉준호를 알아봤니?”라고 말하고 싶다. (웃음)

한국 관객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품을 만들 때마다 응원을 보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내가 신작이 나올 때마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홍보를 할 수 있는 것은 극장을 찾아주시는 관객분들 그리고 꾸준히 응원해주시는 배급사 스태프분들, 그리고 씨네플레이와 같은 영화계 관계자분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좋은 영화 만들어 가겠다. 꼭 극장에 와서 영화 많이 봐주시기 바란다.


씨네플레이 심규한 편집장

사진 씨네21 최성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