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곤 <이층의 악당> / <해치지않아>

귀여운 제목처럼 해맑은 코미디 <해치지않아>는 <달콤, 살벌한 연인>(2006), <이층의 악당>(2010)으로 남다른 코미디 연출을 뽐낸 손재곤 감독이 9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돈이 없어 동물을 죄다 팔아버린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 구성원들이 인형을 쓰게 되면서 생기는 좌충우돌 이야기를 그린다. 한편, 오는 2월 개봉하는 <사냥의 시간>(2020)은 <파수꾼>(2010)으로 좋은 만듦새로 한국 독립영화계에 선례를 남긴 윤성현 감독이 근 10년 만에 전작의 주역인 배우 이제훈과 박정민은 물론 최우식, 안재홍, 박해수까지 캐스팅 해 만든 신작이다. 손재곤과 윤성현 외에 오랜 시간의 공백기를 거쳐 신작을 발표한 감독들을 소개한다. (공백 기간은 두 영화 사이의 개봉일자를 기준으로 삼았다.)

윤성현 <파수꾼> / <사냥의 시간>


추창민

<광해, 왕이 된 남자> ~ <7년의 밤>, 5년 6개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로 1230만 관객을 만난 추창민 감독의 차기작은 소설가 정유정의 베스트셀러 <7년의 밤>을 영화화 하는 것이었다. 2015년 11월 크랭크인 해 6개월 만에 촬영을 마쳤으나, 개봉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크랭크업 한 지 근 2년이 지난 2018년 3월 28일에 개봉해 52만 명을 동원하는 데에 그쳤다.


정지우

<해피 엔드> ~ <사랑니>, 5년 10개월

세기말을 목전에 앞두고 개봉한 정지우 감독의 데뷔작 <해피 엔드>(1999)는 스릴러와 치정극을 조합한 솜씨에 관한 찬사가 주를 이뤘다. 전도연에게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한 것도 <해피 엔드>부터였다. 정지우의 신작 <사랑니>(2005)는 <해피 엔드> 이후 거의 6년이 흐른 후에야 발표됐다. 격정 그 자체였던 전작과 달리, 조인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여자를 가로지르는 사랑 이야기는 벚꽃 같은 감성으로 충만했다. 평단의 고른 찬사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철저히 외면 받았다.


장훈

<고지전> ~ <택시운전사>, 6년

장훈 감독은 송강호와 강동원의 케미가 돋보였던 <의형제>(2010)의 큰 성공에 힘입어, 130억 원 이상을 들여 전쟁영화 <고지전>(2011)를 연출했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박상연 작가가 쓴 시나리오에 김우형 촬영감독이 담아낸 이미지까지 출중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결국 손익분기점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그는 다시 한번 송강호를 기용해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그린 <택시운전사>(2017)로 1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만났다.


임순례

<와이키키 브라더스>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6년 2개월

임순례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2001년 최고의 한국영화로 두루 손꼽힐 만큼 관객들의 두터운 사랑을 받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6년 만에 발표한 신작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실화를 영화로 옮겨 관객수 400만 명을 돌파했다.


정지영

<남영동1985> ~ <블랙머니>, 7년

화려한 90년대 초중반을 지난 정지영 감독은 60명 출연진의 올누드를 화제를 모았던 <까>(1998) 이후 13년 만에 연출한 <부러진 화살>(2011)가 예기지 못한 성공을 거뒀다. <부러진 화살>이 개봉한 지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사건을 영화화 한 <남영동1985>(2012)가 개봉됐고 전작의 10%에 해당하는 성적에 그쳤다. 작년 11월에 개봉한 <블랙 머니>는 정지영이 73세의 나이에 근 7년 만에 발표한 신작으로 론스타 게이트 사건을 모티브로 해 한국 사회에 관한 관심이 여전함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249만 관객을 동원해 노장의 저력을 증명했다.


박광수

<이재수의 난> ~ <눈부신 날에>, 7년 10개월

박광수 감독은 <베를린 리포트>(1991),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등을 만들어 정지영과 함께 90년대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으로 손꼽혔다. 1999년 6월 공개된 <이재수의 난>은 프랑스 영화사와 공동제작으로 당시로선 한국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에 해당하는 32억을 투입하고, 톱스타 이정재와 심은하를 캐스팅 해 1901년 제주도 신축민란의 처절한 현장을 재현했지만 결국 막대한 손실을 남겼다. 이후 여러 영화를 준비하던 박광수는 기존 작품들에 비해 힘을 한껏 덜어낸 가족드라마 <눈부실 날에>(2007)를 발표해 시장과 평단에서 모두 외면 받았다.


이경미

<미쓰 홍당무> ~ <비밀은 없다>, 7년 8개월

이경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박찬욱 감독이다. 미장센 단편 영화제에서 수상한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2004)로 일찌감치 연출력을 인정 받은 이경미는 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2005)에 스크립터로 참여했고, 3년 후 박찬욱의 제작사 '모호 필름'에서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를 발표했다. 공효진이 연기한 양미숙이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와 함께 한국영화에서 전혀 처음 보는 블랙코미디로 똘똘 뭉친 작품. 다음 영화 <비밀은 없다>(2016)는 7년을 훌쩍 넘긴 후에야 도착했다. 전도유망한 국회의원 후보의 딸이 주검으로 발견되고 엄마가 그 비밀을 파헤치는 영화는 전작보다 훨씬 접근하기 쉬워보였는데, 이경미의 취향과 비전은 누그러지기는커녕 한층 더 지독해졌다.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모두 상업적으론 상당히 아쉬운 결과를 맞았지만, 두 영화를 통해 보여준 여성 캐릭터를 구현하는 특출한 재능은 이후 이영애와 아이유라는 빅네임과 함께 단편을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이창동

<시> ~ <버닝>, 8년

<밀양>(2007)으로 여우주연상, <시>(2010)로 각본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넓혀가던 이창동 감독의 연출 활동은 8년간 멈춰 있었다. 원빈, 설경구, 장쯔이가 출연하는 연쇄살인범 이야기를 만들 거라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영화로 옮기고 유아인, 스티븐 연, 그리고 신예 전종서가 이끄는 <버닝>은 2018년 5월에 개봉했다. 2016년 여름 강동원과 유아인이 참여할 거라는 뉴스가 퍼지고 약 2년 만의 일이다. 거장의 복귀작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반응을 일으켜, 수많은 해외 매체의 2018년 베스트 리스트에 <버닝>을 포함시켰다.


이정향

<집으로> ~ <오늘>, 9년 7개월

감독의 오랜 공백은 전작의 흥행 실패로 인한 경우가 많다. 이정향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오늘>(2011)은 의외의 케이스다. <미술관 옆 동물원>(1998)과 <집으로>(2002)가 시장/평단에서 모두 좋은 결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나오기까지 근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감독 데뷔 전부터 구성해놓은 시나리오였지만, 사법과 종교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국은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한 것 아니냐는 날선 의문을 던지는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김성수

<영어완전정복> ~ <감기>, 9년 9개월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8)로 액션과 청춘의 쾌감을 담아내는 데에 일가견을 보여준 김성수 감독. 2001년 당시 순제작비 80억 원을 들인 초대형 프로젝트 <무사>엔 실패작이라는 오명이 따랐고, 힘을 확 빼고 시도한 코미디 <영어 완전 정복>(2003)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으면서 감독으로서 긴 휴지기를 가졌다.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가 퍼진 한국을 그린 재난영화 <감기>는 300만 관객까지 돌파했으나 제작비 100억 원의 손익분기점은 넘지 못했다.


장준환

<지구를 지켜라> ~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10년 6개월

장준환 감독의 입봉작 <지구를 지켜라>(2003)는 한국영화 사상 전례가 없는 상상력으로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B급 코미디로 포장한 프로모션이 영화를 망친 사례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한국영화 최전성기인 2003년에 영화를 내놓은 감독들이 대부분 머잖아 신작을 발표했지만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와 함께)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든 장준환은 예외였다. 간간이 단편 <털>(2004)과 중편 <러브 포 세일>(2010)을 연출한 그는 2013년 가을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발표하며 침묵을 깼다. 김윤석과 여진구를 비롯 조진웅, 김성균, 장현성, 박해준 등 출중한 배우들의 앙상블이 만든 이 잔혹한 성장영화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해 2017년 작 <1987>이 제작되는 발판이 됐다.


변혁

<주홍글씨> ~ <상류사회>, 13년 10개월

배우 이은주가 <주홍글씨>(2004)의 고통스러운 촬영 방식으로 인해 우울증을 앓고 이듬해 세상을 등지면서 변혁 감독에 대한 비난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옴니버스 <오감도>(2009)에 참여한 걸 제외하면 오랫동안 두문불출 했던 그는 근 14년 만에 <상류사회>(2018)를 발표했다.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상류층의 이면을 파헤치겠다는 뜻이 다분한 영화는 온갖 자극적인 설정들로 점철된 무리수로 인해 2018년 최악의 한국영화로 손꼽혔다.


오승욱

<킬리만자로> ~ <무뢰한>, 15년

오승욱 감독은 데뷔 이전, 이창동과 허진호의 입봉작 <초록물고기>(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충무로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첫 연출작 주문진을 배경으로 한 누아르 <킬리만자로>(2000)였다. 요즘은 한국 최고의 누아르라고 추켜세우는 이들이 많은데 개봉 당시 극장가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후 오승욱은 각본, 각색, 특별출연, 기고, 출강 등 여러 자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두 번째 영화 <무뢰한>(2015)이 공개된 건 15년이 지난 후였다. 박찬욱과 (그의 음악 파트너) 조영욱이 기획하고 '사나이픽처스'가 제작한 <무뢰한>은 전작 속 누아르의 농도를 낮추되 진창처럼 질척이는 로맨스를 더해 전도연과 김남길의 재능을 번쩍번쩍 빛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