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리 이삭 정 감독(2시 방향)과 배우들

한국계 미국인 감독 리 이삭 정이 연출하고 윤여정, 스티븐 연, 한예리 등이 주연을 맡은 가족영화 <미나리>가 2020년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미국영화 드라마 부문)을 수상했다. <미나리>는 세계 영화 팬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자랑하는 제작사 'A24', 봉준호의 <옥자>(2016)를 제작한 바 있는 브래드 피트의 프로덕션 '플랜 B'가 합작한 작품이라 선댄스 수상 이후의 행보가 더 기대에 실리고 있다. <미나리> 외에 선댄스 드라마 부문 그랑프리 수상작들이 어떤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자.


1985년

블러드 심플

Blood Simple

첫 번째 선댄스 영화제의 심사위원대상은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 코엔 형제의 데뷔작 <블러드 심플>이 차지했다.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편집에 참여한 그들은, 레이미의 조언을 받아 2분 짜리 예고편을 만들어 제작비 확보에 성공해 영화를 완성했다. 바텐더 레이는 클럽 사장 마티의 아내 애비와 바람을 피고, 마티는 사립탐정 비저를 고용해 그들의 관계를 확인해 청부살인을 의뢰하지만 비저는 마티만 죽이고 돈을 챙긴다. 제목 'blood simple'은 소설가 다실 해밋이 <붉은 수확>에서 폭력적인 상황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를 빗대어 쓴 말에서 따왔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집 안에서 애비와 비저가 대치하는 클라이맥스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코엔 형제의 남다른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음악감독 카터 버웰, 촬영감독 배리 소넨펠드, 그리고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하다.


1991년

포이즌

Poison

<포이즌>은 전세계 영화 팬들을 사로잡은 퀴어 로맨스 <캐롤>(2015)을 연출한 토드 헤인즈의 젊은 시절 도전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장 주네의 소설들에서 영향 받은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됐다. 7살 소년이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치는 'Hero', 실험을 거듭하다 괴물이 되어버린 과학자의 이야기 'Horror', 고립된 감옥에서 두 남자 죄수가 사랑에 빠지는 'Homo'를 각각 다른 형식으로 연출했다. 파편화된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스타일로 그려져 한데 모인다는 점에서 밥 딜런의 삶을 그린 기묘한 전기영화 <아임 낫 데어>(2007)가 떠오른다. 소제목이 모두 'H'로 시작하는 건 레이건이 집권하던 보수적인 사회에서 퍼져 있던 HIV에 대한 공포를 은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토드 헤인즈는 프로듀서 크리스틴 배콘과 처음 작업을 시작해 최근작 <다크 워터스>(2019)까지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1996년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Welcome to the Dollhouse

언뜻 발랄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잔인한 성장영화. 못생겼다고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14살 소녀 던은 모범생 오빠와 예쁜 짓만 하는 여동생에 밀려 가정에서도 이렇다 할 관심을 받지 못한다. 오빠의 친구를 짝사랑하게 된 와중, 던의 답안지를 베끼려다가 그걸 이르자 너를 범하겠다고 통보하는 불한당 같은 브랜든은 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동생이 실종되자 죄책감에 떨던 던은 동생을 찾고자 뉴욕으로 향한다. 1989년 발표한 첫 영화 <공포, 분노 그리고 우울>의 실패로 영화를 완전히 포기하려고 했던 토드 솔론즈는 변호사인 친구의 제작비 지원 덕분에 5년 만에 작업에 착수해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를 완성했다. 곳곳에 웃음 포인트들이 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던의 처지를 생각하면 텁텁한 뒷맛이 남는다. 솔론즈는 <팰린드롬>(2004)과 <위너 독>(2016)에도 던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2000년

유 캔 카운트 온 미

You Can Count On Me

2000년 선댄스 영화제 극영화 부문 그랑프리는 케네스 로너건의 <유 캔 카운트 온 미>와 캐린 쿠사마의 <걸파이트>가 공동 수상했다.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로너건이 15년(그 사이 그는 2011년 <마가렛> 한 작품만을 발표할 정도로 과작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후에 발표할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와 닮았다. 가족영화라는 틀 안에, 안타깝게 이 세상에 없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단출하고 건조하게 비춘다는 점에서 그렇다. 뉴욕에서 차로 몇 시간은 떨어진 마을 스코츠빌, 은행에서 일하며 8살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새미에게 오랜만에 동생 테리가 찾아온다. 계획 없는 떠돌이처럼 사는 테리는 여자친구 문제로 돈을 빌리는데 돌아가던 차에 계획이 틀어져 계속 누나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연극 무대에서 먼저 경력을 쌓았던 로너건은, 단정하고 착실한 새미와 한량같은 테리 사이에서 피어나는 갈등과 온정을 러닝타임 내내 차분히 그리는 스타일이 배제된 스타일을 구사하면서 성공적인 영화 신고식을 치렀다. 오랜 무명시절을 거친 마크 러팔로는 <유 캔 카운트 온 미>를 통해 뚜렷한 성장세를 보여줬다.


2009년

프레셔스

Precious

할리 베리에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첫 흑인 배우의 영광을 안긴 <몬스터 볼>(2001)의 제작자였던 리 대니얼스는 두 번째 연출작 <푸쉬: 사파이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함>을 통해 감독으로서 선댄스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이름과 달리 전혀 고귀하지 않은 삶을 견디고 있는 소녀 프레셔스. 전혀 원치 않았던 아이를 낳고 두 번째 아이를 품고 있는 프레셔스는 학교에선 제대로 읽지도 쓸 줄도 모른다며 놀림 받고, 집에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엄마에게 매일같이 학대 받는다. (그 폭력의 정도가 글로 옮길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뜻밖에 대안학교에 가게 된 프레셔스는 그 곳에서 블루 레인 선생님을 만나 조금씩 희망을 꿈꾼다. 선댄스의 수상 이후 오프라 윈프리와 타일러 페리 같은 저명한 흑인 셀러브리티들이 이 영화를 적극 지지했고, 같은 해 발표된 액션영화 <푸쉬>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프레셔스'로 제목을 바꾸어 개봉돼 제작비의 6배가 넘는 수익을 기록하고 평단의 고른 찬사를 받았다. 주인공 프레셔스를 연기한 개버레이 시디베이는 생애 첫 연기로 아카데미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상의 여우주연 후보에 올랐다.


2010년

윈터스 본

Winter's Bone

<윈터스 본>은 산골 마을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을 돌보며 사는 열일곱살의 리의 수난극이다. 리는 마약 제조 혐의로 입건되었다 풀려난 아버지가 여전히 마약을 만들고 있고, 그가 제때 출두하지 않으면 집과 땅이 모두 경매에 넘어간다는 걸 듣고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죽었고, 리는 아버지의 행방이 아닌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해야 하기 위해 목숨을 건 추적을 이어나가야 한다. 제니퍼 로렌스는 선댄스 영화제가 수면 위로 끌어올린 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처음 영화계에 등장한 로렌스는 네 번째 영화이자 2010년 선댄스 그랑프리를 수상한 <윈터스 본>에서 보여준 연기로 단숨에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로 도약했다. 지나치게 예쁘다는 이유로 리 역에 고사됐지만 오디션 현장에 일주일째 안 감은 머리와 콧물을 줄줄 흘리는 행색으로 나타나 결국 역할을 따냈고, 혼신을 다한 연기로 20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성과를 이뤘다. 그리고 2년 후,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2013)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2년

비스트

Beasts of the Southern Wild

제니퍼 로렌스가 처음 오스카를 거머쥐었던 해, 11살의 배우 쿠벤자네 월리스는 태어나서 처음 해본 연기로 같은 부문 후보에 올랐다. 월리스의 첫 영화 <비스트> 역시 선댄스 그랑프리 수상작이었다. 지구 남쪽 끝에 위치한 욕조섬에서 아버지와 둘이 사는 소녀 허쉬파피는 마을 사람들과 벗삼아 문명을 거부한 채 자연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희귀병에 걸린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허쉬파피를 위해 매일 혹독한 훈련을 반복하고, 부녀가 싸우자 우주의 균형은 무너져 욕조섬은 침수될 위기에 처한다. 그야말로 순수하면서도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이야기. 촬영 당시 7살이었던 월리스가 보여주는 아이의 자연스러운 호흡과 몸짓은 고스란히 <비스트>의 마법 같은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원동력이었다. <비스트>를 연출한 벤 제틀린은 8년 만의 신작 <웬디>를 올해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했다.


2013년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Fruitvale Station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2009년 새해 첫 날 새벽, 도심에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오클랜드의 프루트베일 역(이 영화의 원제다)에 도착한 흑인 청년 오스카 그랜트가 백인 경찰관에게 강제 진압당한 뒤 총에 맞고 숨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첫 장편을 연출하는 라이언 쿠글러는 오스카 그랜트가 어처구니 없이 살해 당하게 되는 전날부터 사고의 그 순간까지의 시간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면서 오스카 그랜트 더 나아가 인종차별로 인한 억겁의 피해자들을 향한 추모를 바쳤다. 그랜트의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이 억울한 죽음이 지극히 보편적인 것임을 경각시키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 라이언 쿠글러는 배우 마이클 B. 조던, 음악가 루드비히 고랜슨과 함께 <록키> 시리즈의 리부트 <크리드>(2015),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초의 흑인 히어로 솔로 무비 <블랙팬서>(2018)를 작업하면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2014년

위플래쉬

Whiplash

데뷔작 <공원 벤치의 가이와 매들린>(2009)부터 재즈에 대한 진득한 사랑을 보여줬던 데이미언 셔젤 감독과 음악감독 저스틴 허위츠 콤비는 다시 한번 재즈를 소재로 한 영화 <위플래쉬>(2014)를 만들었다. 먼저 제작된 18분 분량의 단편 버전이 2013년 선댄스 단편 부문에 공개돼 호평 받았고, 이듬해 공개된 장편 <위플래쉬>는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재즈를 표방한 영화이긴 하지만, 실상 재즈를 즐기는 이들을 그렸다기보단 훌륭한 재즈 연주에 목을 매는 학생과 선생의 살벌한 신경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는 음대 신입생 앤드류는 실력은 최고여도 인성은 더럽다고 소문이 자자한 플렛처 교수에게 발탁되고, 연습마다 폭언과 학대를 일삼는 플렛처의 훈육 방식은 앤드류를 점점 광기를 불어넣는다. <위플래쉬>는 휘몰아치는 드럼 연주처럼 106분의 러닝타임 동안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내달리며 보는 이를 탈진시켜놓는다. 선댄스의 수상 이후 꾸준히 입소문을 쌓고, 그해 10월 미국부터 개봉해 예산 대비 15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뒀다. 2년 후 셔젤/허위츠 콤비가 내놓은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는 전 세계를 제패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