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총선이 펼쳐졌다. 이번 선거에선 연동형 비례제가 부분적으로 도입됐고, 선거연령도 만18세로 하향조정 돼 변화가 생겼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코로나19 영향 때문에 재외국민 투표가 일부 취소되는 등 불의의 변수도 일어났고, 국내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 영향으로 인해 투표율이 저조할 수 있단 전망도 일부 제기됐다. 하지만 지난 10일과 11일 이틀간에 걸쳐 펼쳐진 사전투표는 그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26.7%라는 역대 최고의 사전투표율을 기록했고, 4월 15일 펼쳐질 본 선거에서 92년 제14대 총선 이후 줄곧 70% 아래만을 기록했던 낮은 투표율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드라마틱한 상승곡선을 탈 수 있을지 귀추가 모아지고 있다.
정치와 선거는 사회화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은 화두다. 끊임없이 다투고, 이해관계에 따라 연합하며, 정권을 거머쥐기 위해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을 행해왔다. 그리고 그 밑엔 무모한 도전과 수많은 희생이 존재했다. 이런 드라마틱한 승부와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쉽고 강력하게 드러내는 재미를 영화계에서 놓칠 리 만무했고, 일찌감치 부터 정치영화를 만들어왔다. 너무나도 유명한 <스미스씨 워싱톤 가다>를 필두로,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온>, <모두가 왕의 부하들>, <군중 속의 얼굴>, <워싱턴 정가> 등을 거쳐 1970년대 코스타 가브라스의 <제트>로 촉발된 정치스릴러의 유행으로 번지며 확고한 전통과 명맥을 지켜왔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이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와 <증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특별시민> 등이 제작됐다.
이는 <웨스트 윙>과 <하우스 오브 카드>, <지정생존자>와 <부통령이 필요해>, <마담 세크리터리>, <커맨더 인 치프> 등 드라마로 확장되며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고, 국내에선 과거 MBC에서 시작된 일련의 ‘공화국 시리즈’를 비롯해 <코리아게이트>, <시티홀>, <프레지던트>, <보좌관> 등 다양한 정치드라마들이 꾸준히 만들어지며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방송계에 저변을 넓히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격정적인 총선을 맞아 정치영화들 중에서 선거에 관련된 영화들과 그 음악들을 소개해본다.
프라이머리 컬러스(1998)
음악: 라이 쿠더
<프라이머리 컬러스>는 지명도 낮은 일개 시골 주지사였고, 각종 성추문과 이권사업에 개입돼 약점만 많던 빌 클린턴이 어떻게 1992년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하며 대권을 거머쥐었는지를 다룬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블랙 코미디다. 정치는 이미지이며,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정치꾼들의 쇼를 존 트라볼타와 엠마 톰슨, 빌리 밥 손튼 그리고 캐시 베이츠 등 스타들의 호연으로 시니컬하게 담아낸다. 이런 불편하고 침울한 진실을 중화시키는 건 라이 쿠더의 서정적이고 리드미컬한 기타 소리와 ‘테네시 왈츠’나 ‘유 아 마이 선샤인’ 등 익숙한 삽입곡들 덕분이다. 탁월한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고, 영화음악가이기도 한 그는 주로 빔 벤더스나 월터 힐 감독의 영화들에서 음악을 맡아 블루지한 음색으로 황량함과 터프함을 묘사해왔는데, <프라이머리 컬러스>에선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꾸는 현대 정치극을 택해 새로운 변화를 들려준다. 미국 남부의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정치인 뒤에 숨은 이기적인 섹스 중독자의 모습을 발견하듯, 라이 쿠더의 익숙한 기타가 정계 인물들을 배경으로 펼쳐졌을 때 영화의 반어적인 효과는 더욱 강조되어 임팩트를 남긴다.
불워스(1998)
음악: 엔니오 모리꼬네
<불워스>는 배우이자 감독이며 제작자이고 작가이기도 한 다재다능의 워렌 비티가 자신의 지인이었던 존 제이 후커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절망 끝에 선 정치가가 물러설 곳이 없어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에 대해 시원스레 돌직구를 던지자 오히려 인기를 얻게 되는, 우화 같은 상황을 그린 코미디다. 공격적이고 속사포 같은 랩으로 무장한 닥터 드레나 LL 쿨 J, 아이스 큐브, 르자, 블랙 아이드 피스 등 힙합 사운드가 영화 전편에 흐르는데, <러브 어페어>와 <벅시>의 인연으로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스코어를 담당해 이질적인 부조화가 눈에 띈다. 그런 만큼 모리꼬네의 음악은 영화 내에서 온전하게 활용되지 못했는데, 이에 불만을 느낀 마에스트로는 두 번 다시 워렌 비티와 작업하지 않았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를 떠올리게 만드는 서정성과 <언터처블>의 긴장감 넘치는 스타일이 균형을 이루며 독특한 색채를 자아내는데, 여기에 초기의 실험적이던 불협화음과 모더니즘 요소를 섞어 나름 망가진 정치인의 색다른 재기를 들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강력한 블랙 뮤직 파워에 가려진 탓에 모리꼬네의 음악은 영화 내에서 존재감을 찾기 어려워지고 말았다.
일렉션(1999)
음악: 롤프 켄트
<일렉션>은 알렉산더 페인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로 오스카 각본상에 깜짝 노미네이트되며 페인의 이름을 할리우드에 각인시켰던 작품이다. 얼핏 일개 고등학교 회장 선거를 다룬 청춘물처럼 보이지만, 세상사에 찌든 부정부패와 비리, 권력욕 등 온갖 정치적 상황을 압축해 상징해낸 비유와 블랙 코미디가 일품이다. 우리네 정치판을 떠올리게 할 법한 냉소적인 시선과 리즈 위더스푼과 매튜 브로데릭을 뛰어난 연기 맞대결이 빛을 발한다. 음악은 이런 소소한 드라마와 코미디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롤프 켄트가 맡았다. 켄트는 알렉산더 페인과 데뷔작 <시티즌 루스>부터 최근작인 <다운사이징>까지 함께한 오랜 음악적 파트너로, 평범하지만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면모를 띄는 인간의 이중성을 탁월하게 까대는 영화의 블랙 유머에 여유와 품격을 안겨주었다. 1990년대 청춘영화스러운 영리하고 효율적인 모던 팝 선곡과 함께 마치 랜디 뉴먼을 떠올리게 만드는 롤프 켄트의 스위트한 소규모 목관-현악 앙상블은 미워할 수 없는 우리네 가식과 허세, 탐욕과 부조리를 마음껏 희롱하며 관객들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의뭉스럽고도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스코어는 영화의 날선 기운을 성숙하게 달래준다.
킹메이커(2011)
음악: 알렉산드르 데스플라
극작가 보 월먼이 2004년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하워드 딘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연극 <파라거트 노트>를 원작으로 삼은 <킹메이커>는 조지 클루니의 네 번째 연출작이다. 원제(The Ides Of March)가 시저가 믿고 의지했던 브루투스 일행에 암살된 날을 뜻하는 만큼 정치판의 추악한 배신과 배반, 더러운 암투의 본질을 다룬다. 좋은 정치물이 탄탄한 배우들의 앙상블을 자랑하듯, 이 영화 역시 조지 클루니 외 라이언 고슬링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폴 지아마티, 마리사 토메이, 에반 레이첼 우드, 제프리 라이트 등이 출연해 기가 막힌 합을 선사한다. 긴장감 넘치는 음악을 맡은 건 오스카 2회 수상에 빛나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로, 이후 조지 클루니와는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과 <서버비콘>에서도 호흡을 맞췄다. 워낙 다작에, 가리는 장르가 없다는 데스플라지만, 특히 정치영화에서 그의 음악은 진가를 발휘한다. 이미 <더 퀸>과 <유령작가>, <특별한 관계>, <시리아나> 등에서 서늘하고 긴장감 넘치며,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섬세하게 조율한 바 있기에, <킹메이커>에서도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미니멀한 선율을 점층 고조시키는 그의 오케스트레이션과 심플한 테마의 조화는 음모와 배신의 BGM으로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원래 정치는 이런 것이었지 쓴웃음 짓게 만드는 절묘한 효과다.
프레지던트 메이커(2015)
음악: 데이빗 윙고
앞선 영화들처럼 <프레지던트 메이커> 역시 현실의 정치에서 영향을 받았다. 2002년 볼리비아 대선에 참여한 미국의 정치 컨설턴트 그룹 ‘그린버그 카빌 슈럼’에 대해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원작으로, 열성 민주당원이자 <킹메이커>를 만들었던 조지 클루니가 제작했다.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여론이 조작될 수 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그 폐단을 드러내는 작품. 연출을 맡은 데이빗 고든 그린은 2000년대 손꼽히는 독립영화의 기대주 중 하나로, 대중적 코미디와 호러 프랜차이즈(할로윈)를 동시에 필모그래피에 넣어둘 만큼 넓은 소화력을 지녔다. 음악은 데이빗과 데뷔작 <조지 워싱톤>부터 여러 편을 함께 한 데이빗 윙고가 맡았다. 인디락과 일렉트릭 사운드를 맡았던 이력과 볼리비아라는 이국적인 환경, 정치 코미디라는 장르가 버무려지며 짧은 큐들을 바탕으로 모던하고 활력 넘치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라틴 색채를 품은 리듬과 서정적이지만 강직한 기타, 묵중하게 시사적인 중압감을 선사하는 스트링, 감각적인 일렉트릭 사운드가 조화를 이루며, 이슈를 조작하고 이미지를 세탁하는 정치 컨설턴트의 회한과 고뇌, 암투들을 냉랭하고도 건조하게 스케치해간다.
비밀은 없다 (2016)
음악: 장영규
앞선 정치 영화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 하지만, 무엇보다 대한민국 총선이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도 인상 깊게 선거를 주시할 수 있는 작품이다. 2주간의 선거운동은 느슨하지만 나름 긴장감을 안겨주는 타임 리미트이며, 선거가 캐릭터들의 목적과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 추악한 욕망과 권력의 상징성이자 몰락과 연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건 키치적이면서 장르를 벗어나 독특한 감성을 전달하는 장영규의 음악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나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다세포 소녀> 그리고 이경미 감독의 전작인 <미쓰 홍당무>처럼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선율과 공동으로 참여한 정무키의 아방가르드한 노래들은 기묘한 대구를 이루며 실종 사건 이면에 자리 잡은 수수께끼에 집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관습화된 지점을 벗어나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에 천착한다. 정치와 선거, 살인과 범인을 넘어 아름답고 애잔한 소리들이 들려주는 연민과 사랑의 힘은 불균질하지만 강렬하고 안타깝다. 소녀적인 감성과 미스터리적인 효과가 맞물려 마치 한국화된 안젤로 바달라멘티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