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극장가가 큰 타격을 입고 있던 지난 3월 5일,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가 개봉했다. 영화 산업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도 이 영화는 극장 개봉을 결정했고 이후 지금까지 전국 관객 2만 5천 명(5월 5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을 넘기며 순항 중이다. 지난해 한국 독립영화 가운데 관객의 사랑을 받은 <벌새>(2018, 감독 김보라)가 14만 명 이상, <윤희에게>(2019, 감독 임대형)가 11만 명 이상의 관객 수를 기록한 것과 비교해도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스코어는 의미 있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혹한에도 꿋꿋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마치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요체와 똑 닮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 프로듀서로 오랫동안 일한 극 중 찬실이 맞게 된 일생일대의 위기와 함께 시작한다. 오랜 영화적 동지였던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찬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다. 오직 영화만 보고 달려온 찬실은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제야 제 손에 남아 있는 게 도대체 뭔가 싶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돈은 없고, 그간 한 감독과만 꾸준히 작업해온 터라 그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도 찬실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나이는 어느덧 불혹. 흠뻑 빠져 사랑할 애인도 없다. 세상이 망한 것만 같은 절망감,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 하지 않겠느냐는 갈급함, 그런데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고독과 외로움이 찬실을 겹겹이 에워싼다. 하지만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찬실을 암흑의 구렁텅이 빠뜨려놓고 그곳에서 허우적대는 걸 지켜보지 않으려 한다. 절망의 감정을 복기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찬실은 지금껏 자기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것이었던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찬실이라는 사람 특유의 기질로 삶을 긍정하는 그 태도와 기운에 있을 것이다.
찬실의 드라마, 찬실의 캐릭터 영화, 찬실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영화적 승부는 그렇기에 누가 찬실을 연기할 것인가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다. 영화를 본다면 그것을 의연하게 해낸 사랑스러운 배우를 발견하는 기쁨을 맞게 될 것이다. 바로 배우 강말금이다. 아직 많은 관객에게 소개된 적 없는 강말금은 이 영화 한 편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아 마땅한 귀한 배우임을 증명한다. 독립영화에 눈 밝은 관객이라면 <82년생 김지영>(2019)을 만든 김도영 감독의 단편 <자유연기>(2018)에서 육아와 가사로 지칠 대로 지친 무명의 배우 지연을 연기한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극 중 지연은 연기하고 싶지만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기회 앞에서 좌절하고, 어느 날 기적처럼 찾아온 오디션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에게만큼은 최선이고 싶은 마음으로 모든 걸 쏟아붓는 연기를 해 보인다. <자유연기>는 여러 영화제에 공개된 직후 수상 소식을 알렸고 그 가운데 강말금은 제17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연기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강말금이 배우로서 받은 첫 번째 상이다. 김초희 감독은 이미 매체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 영화에서의 강말금의 연기를 보며 ‘바로 저 배우가 찬실이다!’라고 직감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인정 여부를 떠나 자신이 열망하는 바를 향해 꿋꿋하게 걸어온 사람만이 얻게 되는 다부짐과 삶의 구력이 강말금의 연기와 얼굴에서 전해진다고 느꼈던 것이다. 실제로 강말금은 20대 내내 직장생활을 하다가 30대에 들어서서야 오랫동안 꿈꿔온 연기를 시작한 경우다. 생계와 연기 사이를 오가며 견디고 버티며 연기 ‘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찬실의 고립감과 절박함을 깊이 이해했을 거라 짐작한다. 김초희 감독 역시 연출자이기 이전 영화의 프로듀서로서 꽤 긴 시간을 보냈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기점 삼아 비로소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의 길을 새로이 걸으려 한다.
그만큼 동병상련의 연대가 빛을 발한 것일까. 김초희의 영화적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찬실은 배우 강말금을 통해 찬실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빛나는 열매’가 돼 영화 속에서 반짝인다. “망했다”는 한탄도 잠시,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며 친한 배우 동생의 집 가사도우미를 시작하는 찬실의 강한 생활력,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이제는 무조건 직진”하겠다는 용기,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 앞에서 마음을 열고 눈물을 훔칠 줄 아는 사랑스러움까지. 씩씩하고 귀여운 찬실의 기질을 강말금은 태연하게 그려냈다. 보는 이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드는 강말금의 건강한 웃음, 차분함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순간 툭툭 던지는 반전 같은 엉뚱함, 대사의 높낮이와 장단을 조율해 만드는 말의 리듬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찬실만의 유머가 완성되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스무 살부터 지금껏 오직 연기를 향해 달려온 우직한 배우 강말금에게 찬실과의 만남은 분명 복됨의 시작일 것이다. 이 배우를 통해 자신의 영화 인생의 제2막을 열어젖힌 김초희 감독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일 터다. 그리고 이 행복의 기운은 ‘망한 세상’에서도 끝내 웃음을 잃지 않는 찬실을 만나는 관객에게로 뭉근히 스며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 정지혜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