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자드 오브 소울>는 7월 16일(목) 올레 TV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극장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대로 놓치기 아쉬운 영화들을 한 주에 한 편씩 소개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5년, 독일군은 러시아를 침입해 라트비아의 영토까지 다다른다. 라트비아는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한편,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라트비아인 형제 에드가(라이몬즈 셀름)와 아르투르스(오토 브란테비츠). 에드가가 아버지를 찾아간 사이 어머니와 평화로이 시간을 보내던 아르투르스네 집에 독일군이 들어 닥친다. 한 잔의 우유를 얻어 마신 뒤 떠나는 독일군의 모습에 무사히 지나갈 것이라는 안도감도 잠시, 어머니가 우발적으로 쏜 독일군의 총에 살해당하고 침대 밑에 숨어 목숨을 건진 아르투르스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아르투르스와 에드가, 아버지 바낙스(마르틴슈빌손스)는 전쟁을 위한 라트비아의 첫 징집에 지원하고, 아르투르스는 17살 생일을 두 달 남겨둔 채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총탄 속으로 향하게 된다.
한 소년이 겪어야 했던 제1차 세계대전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온 <블리자드 오브 소울>은 실화 기반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전쟁 드라마다. 동명 소설 『블리자드 오브 소울』이 원작이며, 라트비아의 유명 작가이자 육군 장교였던 알렉산더스 그린스(Aleksandrs Grīns)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겪었던 경험을 엮어 소설화한 것이다. 알렉산더스 그린스는 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뒤 1920년 이후 라트비아 군대의 공식 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1934년 발간된 소설이 바로 『블리자드 오브 소울(Dveselu putenis)』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 소비에트 연방이 라트비아를 점령하게 되었고, 알렉산더스 그린스는 1941년 체포되어 라트비아에서 추방, 그해 12월 러시아의 한 감옥에서 총살당했다. 그가 집필한 소설은 소비에트 연방 시대 내내 금서였다.
<블리자드 오브 소울>은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치열한 전투 끝에 인물들이 승리를 거머쥐는 여타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핏빛 가득한 격전지를 비추기보다 어디선가 나를 겨냥하고 있을지도 모를 총구로 인해 두려움으로 가득 찬 소년의 얼굴을 주목한다. 주로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작품 활동을 해온 진타르스 드레이베르크스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해 비현실적인 스펙터클함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전쟁상을 카메라에 담아내기를 택했다. 빠른 속도로 적진을 돌파하긴커녕, 기어가려는 자리마다 피가 솟구치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체에 쉽게 움직이지도 못한다. 전우의 죽음에 슬퍼할 새도 없이 또 다른 죽음으로 내몰릴 뿐이다. 날아드는 총탄을 무적처럼 피해 가는 주인공도 없다. 리얼리티를 살린 감독의 연출은 밀도 높은 긴장감을 자아내며 블록버스터 그 이상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한 인물을 쫓아가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근작이었던 샘 멘데스 감독 <1917>을 떠올려보자. 같은 배경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무력감에 변해가는 인간의 심리에 주목한 사울 딥 감독의 <저니스 엔드>도 좋다. 인물이 겪는 극도의 긴장감과 압박감은 유사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형적인 참호전이 주를 이뤘던 두 영화와는 달리 <블리자드 오브 소울>은 다양한 지형을 활용한 전투신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가야 하는 방향조차도 분별이 되지 않는 자욱한 안갯 속이라던가, 추위와도 맞서 싸워야 하는 새하얀 설원에서의 전투, 진흙과 곡물‧나뭇가지로 뒤엉킨 격전지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총, 칼보다 악명 높았던 가스 살포까지 더해져 제1차 세계대전의 지난함을 상기시킨다.
대부분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드라마는 승자 혹은 대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1917> 역시 영국의 역사다. <블리자드 오브 소울>은 우리에겐 생소한 유럽의 소국 라트비아의 역사를 아르투르스의 일대기를 통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볼 만하다. 라트비아는 1721년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그 영향 아래 참전했다. 때문에 전쟁터로 향하는 아르투르스는 자신의 국가조차 당당하게 부를 수 없었다. 간신히 살아남아 귀향을 목전에 두었을 때, 갑작스레 찾아온 비극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페이드아웃 후 ‘라트비아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인구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세시스 전투 이후 수천 명이 국군에 자원해서 입대했고 라트비아는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라며 직접적으로 당대의 역사를 요약해 보여주기까지 한다. <블리자드 오브 소울>은 아르투르스의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한 나라의 역사를 엮어내었다는 점에서 한 편의 역사영화로서도 기능하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 라트비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패하자 1918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 함께(발트 3국) 러시아에 다시 합병되었다가 1991년 현재의 라트비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