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을 둘러싼 복잡하게 얽힌 이같은 관계망을 딜레마라고 요약할 때, 이는 다르덴이 이제껏 보여준 세계와 연속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더 차일드>(2005)의 브뤼노는 여자친구 소냐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의 입양을 브로커를 통해 추진했다가 돌이켜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브뤼노는 돈을 돌려주고 아기를 돌려받지만, 번복으로 생긴 손해를 이유로 금품을 갈취당하는 곤경에 처한다. <로나의 침묵>(2008)에서 로나는 벨기에 국적 취득을 위해 위장 결혼한 뒤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돈을 모아 연인과 가게를 차릴 꿈을 꾸지만, 계약 남편 클로디와의 예상치 못한 관계가 깔끔하던 계획에 균열을 낸다. 반면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의 추락은 관객을 목격자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충격에 의한 내상과 연루가 혼재된 보다 질긴 수렁이다. <약속>(1996)에서 이민자의 추락이 상황을 통해 암시된 바 있으나, 실제 추락하는 모습은 생략되었다. 소년이 추락하는 모습의 재현은 다르덴의 영화 세계에서 간단치 않은 변화다.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의 추락은 시릴의 추락과 같은 충격 효과를 불러오지만, 추락의 세부 내용과 그것이 주는 감정의 경로는 다르다. 아메드는 외부 자극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의 선택과 믿음으로 인해 추락한다.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선택과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주리라는 사소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아메드는 선생 이네스의 돌봄 학교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지붕을 타고 올라 건물 외벽에 매달려 이동하던 중 그가 손으로 잡았던 창문틀이 그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추락한다. 추락 직전 아메드는 자신을 관리하던 사회복지사를 피해 도망나왔고, 곧장 이네스의 학교로 달려왔으며, 무기가 될 만한 날카로운 것을 손에 쥔 참이다. 일련의 행위는 아메드가 이네스를 공격하겠다는 처음의 결심이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아메드의 행위를 이해할 만한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종교에 집착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아메드를 비난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급작스러운 추락은 행위에의 판단을 정지시킨다. 나아가 아메드의 추락은 시릴의 추락과 기시감을 형성하면서 그를 다르덴적인 인물로 일시에 편입시킨다. 아메드를 다르덴의 인물로 수용하는 행위는 영화에 내포된 것인 동시에 관객인 나의 의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적인 인물로 이해하지 않는 이상 인물을 이해할 방도가 영영 없기 때문이다. 관객은 빈곤한 가운데 겨우 다르덴적 인물이라는 선택지를 쥐게 된다. 추락의 전조 현상은 손에 쥐거나 붙들고 있던 무언가 를 놓치는 것이다. 다르덴의 영화에서 추락이 유독 충격을 주는 이유는 인물이 무언가를 붙드는 행위가 늘 절실했기 때문이다. <로제타>(1999)의 첫 장면은 해고를 통보받은 로제타가 자신을 끌어내려는 사람들에 맞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붙들고 버티며 저항하는 모습이다. 해고에 맞서는 행위는 무엇보다 무언가를 붙드는 것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가스통을 붙든 채 우는 마지막 장면은 무언가를 붙드는 행위가 생사를 건 절실한 몸짓임을 알게 한다. 인물이 붙드는 것이 누군가의 몸일 때, 그 행위는 더욱더 애처롭고 강렬해진다. <더 차일드>에서 소냐의 몸을 붙들며 애원하던 브뤼노와 <로나의 침묵>에서 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며 로나에게 엉 겨들던 클로디(두 캐릭터 모두 제레미 레니에가 연기한다)의 몸짓도 잊을 수 없지만, <자전거 탄 소년> 속 시릴의 행동은 유독 마음에 박힌다.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찾아 간 병원에서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던 시릴은 대기석에 앉아 있던 생면부지 사만다의 몸을 붙들고 버티기 시작한다. 시릴의 맹렬함으로 인해 사만다는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넘어져 바닥에 끌린다. 시릴의 후견인이 되기로 한 사만다의 선택에 의문을 붙일 수 없는 이유는 시릴이 사만다의 몸을 붙드는 이 순간 때문이다. 이때 사만다가 시릴과 함께하기로 한 선택의 의미는 ‘내가 옆에서 지켜줄게’가 아니라, ‘때로는 너와 함께 넘어질게’라는 각오에 가깝다.
사람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아메드는 서로를 붙잡는 강렬한 접촉을 보여주던 다르덴의 인물군에서 낯선 존재다. 그는 여자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급진적인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오랜 선생인 이네스와의 악수조차 거부한다.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 강아지의 혀와 침 등 물렁물렁하고 축축한 것과의 접촉을 불결하다고 여기며 피한다. 접촉에 대한 거부 반응은 그가 도구로 벌이는 대담한 일들을 생각하면 기이하다. 아메드의 도구는 이네스를 찌르기 위해 준비했던 칼과 손잡이 부분이 갈린 칫솔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다. 아메드가 농장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보다 다시 누군가와 접촉하는 방법이다. 농장에서 기르던 개가 자신의 손을 핥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아메드는 조금씩 동물에게 손을 내밀고, 아주 잠깐 루이즈와의 접촉을 받아들인다. 그외에 아메드에게 허락된 접촉은 접견실을 통과하기 직전 몸수색하는 손,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는 손처럼 그와 적대 관계에 놓여 있긴 하나 그것조차 접촉에 대한 교육의 성격을 지닌다.영화에서 보여준 가장 급진적인 접촉은 루이즈가 아메드의 안경을 잠시 빌려 쓰는 순간에 깃든다. 이때 안경은 사물을 잘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루이즈는 아메드에게 안경을 통해서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느 쪽의 자신이 더 나은지 묻는다. 아메드에게 안경을 벗는 것은 대상에 대한 흐릿한 체험을 의미하지만, 루이즈에게는 안경을 쓰는 것이 그렇다. 누군가의 시선을 빌리는 일이 그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간 시선의 차이를 체험하는 일임을 영화는 안경이라는 도구를 매개로 보여준다. <소년 아메드>는 흡사 아메드의 시선을 체험하도록 유도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핸드헬드 팔로 숏으로 인물의 뒤를 쫓는 것으로 요약되는 다르덴의 카메라 기법은 종종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체험하기 위함이라 인식되었다. 그러나 관객에게 요구되는 건 아메드의 시선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에 덧입혀지는 흐릿한 필터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도구는 전혀 다른 결과를 출력할 수 있다. 아메드는 자신의 안경 뒤에서 이네스를 찌르기로 결심하지만 아메드의 안경 뒤에서 루이즈는 아메드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르덴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도수가 잘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각자의 흐릿함을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대면하는 일이다. 당신에겐 인물이 선명하게 보이는가, 혹은 흐릿하게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