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편견은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편견, 고정관념, 잘못된 생각들에 의해 비롯되는 유무형의 피해들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히어로, 즉 영웅은 거대한 적으로부터 좁게는 도시의 사람들을, 넓게는 전 지구를 넘어 전 우주의 생명체들을 지켜내는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무형의 편견과 맞서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블의 '엑스맨', 즉 뮤턴트들일 것이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차별받아 왔기에 이런 문제의식은 그들 삶 자체에 녹아 있었다. 즉 수호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셈이다.
비단 엑스맨뿐만 아니라, 히어로 코믹스가 갖고 있는 오랜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히어로들은 압제와 편견에 맞서 싸워 왔다. 어쩌면 근래 두드러지고 있는 'PC함'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런 소재적인 특성 때문에 다른 장르나 세계관에서보다 훨씬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히어로 무비 등지에서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히어로 코믹스의 발상지가 서구이기 때문에 다소 안일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문제들이 있다. 미국 서브컬처 문화였던 히어로 코믹스가 실사화를 통해 대중화되고, MCU와 DCEU 등 본격적으로 거대한 세계관을 토대로 한 프랜차이즈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문제의식은 차츰 더 확대되기 시작했다. 소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문제다.
오리엔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에 저술한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용어다. 학계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이론과 지식체계로 굳어진 동양에 대한 서구의 왜곡과 편견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서구 지식인들을 통해 사회 전반에 폭넓게 형성된 동양에 대한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짚어 올라가면 오리엔탈리즘의 시작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동양 침략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상대적으로 발전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수많은 서구권 국가들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을 침략과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고 실제로 이들의 침략을 당하지 않은 국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한국도 마찬가지였으며, 서구권 국가들을 본뜬 일본 제국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이며 그들이 목표로 했던 대제국 건설은 과거의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서구권에서 나고 자란 현대인들조차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이어져 반복되고 있다.
현대의 오리엔탈리즘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확하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인식 기저에 깔려 문화콘텐츠를 비롯한 창작물 곳곳에까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의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서양인들에게는 이 이슈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어려울지도 모르나, 한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동양인들은 이런 콘텐츠를 접할 때마다 불쾌감을 표시하곤 한다.
히어로 코믹스, 히어로 무비 - 동양인을 그리는 어떤 방식에 대하여
히어로 코믹스의 주 무대는 서구권이다. 대개는 북미, 그것도 미국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으며 어벤져스의 경우에는 뉴욕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일부의 경우 유럽 혹은 아랍권이 등장하기는 하나 말 그대로 일부분일 뿐이며, 가상의 지역이나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외의 지역은 전장이나 이벤트성 공간으로서 그려지며 대부분의 히어로들이 말하는 '집'은 미국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히어로 코믹스의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인종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넷마블의 공식 마블 IP 게임인 '마블 퓨처파이트'의 오리지널 캐릭터 '루나 스노우'가 공식 코믹스로 발간되는 등 한국인 캐릭터도 속속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아시안 히어로들의 팀 '뉴 에이전트 오브 아틀라스' 이슈가 연재를 시작하기도 했다.
MCU가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한국 배우인 수현과 마동석을 캐스팅하는 등 한국 친화적인 행보를 자주 보여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비해 설정 기초 단계부터 한국인으로 출발한 캐릭터가 국내 팬들을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특징을 보여준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보다는 중국인 혹은 일본인 캐릭터가 많았고 동양 국가 중 한 곳이 무대로 등장한다 하더라도 어떤 특징적인 모습보다는 그저 표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그쳤다.
<블랙 팬서>에 등장했던 한국어는 솔직히 말해 한국어라고 하기 어려웠고, 한국인으로 등장한 배우의 대사보다는 루피타 뇽고의 한국어가 그나마 더 알아듣기 쉬웠다며 국내 팬들에게 우스갯거리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기 위해 이들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는 뜻이다.
한국뿐만은 아니다. 남아시아의 인도와 네팔, 티베트 등이 다양한 히어로 무비에 등장했으나 이들 국가들의 모습이나 특징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서양인들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던 어떤 판타지적인 모습을 그리는 데 그쳤다. 뉴욕이나 워싱턴, 유럽 등지의 국가들이 비교적 실제와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데 비하면 동양에 대한 판타지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에 이야기했던 그 시절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들만을 위한 콘텐츠
히어로를 매개로 하는 영화와 코믹스가 서구권 내부에서만 유통되는 콘텐츠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지도 모른다. PC함의 기준에서 볼 때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판타지를 (그것이 실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환상적인 모습으로 구현해 관객과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도 어쩌면 가상의 세계와 시간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할 법한 상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성장한 히어로 무비와 히어로 코믹스라는 장르 콘텐츠는 결국 같은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동양의 역사와 철학이 지니고 있는 어떤 심오함에 대해 탐구하는 정도로 그친다면 그들에게 없는 것을 신기해하는 호기심의 형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콘텐츠들 속에 비친 묘사는 여전히 동양이 서양에 비해 발전이 더디며 서양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비롯된 고정관념은 지금까지도 많은 서구 국가들의 다양한 방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아시아권의 히어로 무비 팬들, 그리고 히어로 코믹스의 독자들은 그들 국가 혹은 아시아인 히어로가 등장해 활약을 펼칠 때 환호한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시아권의 수많은 국가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어떤 경우에는 서양 국가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수준의 저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미지는 여전히 편협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순간 드러나기 때문이다.
익숙함에 대한 경계
할리우드 무비로 대표되는 서구권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이 서양인, 그것도 미국 국적의 백인이다. 이런 강력한 백인 히어로 혹은 주역 캐릭터가 아시아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아주 오래된 영화에서부터 다수 찾아볼 수 있으며, 전 지구적인 문제를 미국의 대통령이나 유력 인사, 혹은 유능한 인물이 앞장서서 해결하는 경우도 아주 오랫동안 다루어져 온 스토리라인이었다. 말하자면 할리우드 무비 속의 현실적인 듯하지만 실상은 비현실적인 '영웅신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예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를 소재로 한다면 모를까(이를테면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토르> 시리즈라든지), 아시아 등지의 국가들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동양인을 전격적으로 내세워 역으로 서구권 국가들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의 역발상을 해낸 영화는 아직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최근 5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페미니즘 이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 히어로는 왜 존재하지 않는가, 혹은 '납득할 만한' 영웅적 서사를 가진,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 작중 시대의 요구에 발맞추어 나갈 수 있을 만한 시대를 선도하는 여성 캐릭터 서사는 왜 제시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이미 다수의 영화가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 오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는 서구권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이에 대한 반향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영화가 대안을 제시했고,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블랙 팬서>였다. 물론 비브라늄이라는 광물을 보유한 와칸다라는 가상의 국가를 통해서이기는 했으나 흑인 고유의 문화와 아프리카 본토의 특색에 대해 다루는 데 성공했고 이는 전 세계 관객에게 신선한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대답하는 방식이 아주 세련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캐릭터 자체에 대해서는 이 부분에 대해 이견이 없을 것이다.
왜 이런 부분은 'PC'함의 원칙에 포함되지 않나
히어로 무비 프랜차이즈는 이런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이슈에 대해 상대적으로 민감한 편이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이자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었던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폭로 이후 '헐크' 역 마크 러팔로는 물론이고 다수의 히어로 무비 프랜차이즈 참여 배우들이 이에 힘을 보탰으며, <원더우먼 1984>는 '반 성폭력 가이드라인'에 의해 제작되는 첫 번째 영화였다.
뿐만 아니라 약자를 대변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히어로를 다룬다는 점에서 콘텐츠 서사 또한 해당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루려 노력해 왔다. 즉 영화 내외로 이런 윤리적 올바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실현하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 이슈로부터는 아직도 자유롭지 않다.
영화 속 동양인들은 왜 아직도 희화화되기 일쑤인 데다 서양인의 보조 역할로서만 등장하는가? 영화 속 동양권은 왜 그들의 판타지 속에서만 존재하는가? 질문은 계속된다. MCU 속 한국의 풍경이 과학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고는 하나 그것이 보다 폭넓고 심도 있는 차원으로 부각된 바 있나? 왜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에인션트 원은 원안 캐릭터가 동양인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인 틸다 스윈튼이 연기했어야만 했나?
결국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울트론의 신체를 만들어낸 일류 과학자 헬렌 조(수현)조차 이용당했으며, 조역으로 등장했을 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 아니었나. 결국 문제를 해결한 것은 기존 어벤져스였으며 그들은 모두 서양인이었다. 그들의 PC함은 왜 아직 이런 문제의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새로운 페이즈, 이야기를 달리 써 내려갈 가능성
지난 MCU의 10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서사와 화려한 액션씬으로 무장해 히어로무비에 걸맞은 블록버스터를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DCEU 역시 마찬가지다. 초반에 부진하기는 했으나 히어로 실사화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워너 브러더스의 DC 히어로 실사화였으며 근래 들어서는 일견 다른 행보를 보여주며 그들만의 색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히어로 무비 실사화 및 공통된 세계관을 토대로 한 거대한 연계점을 구현하는 데 지난 시간을 사용했고 이 과정에서 더 많은 관객에게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그들이 택한 방법론이 '익숙함'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준비를 위한 시간(이라기엔 지나치게 길지만)을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앞서 언급했듯 아시아 지역의 히어로들이 모인 팀업 '뉴 에이전트 오브 아틀라스'가 등장했으며 여기에는 정체성이 확실한 다수의 히어로 캐릭터들이 포진하고 있다. 또 중국인 히어로인 샹치를 전면에 내세운 솔로 무비 <샹치 앤 레전드 오브 텐 링즈>가 유수의 중국계 배우들을 캐스팅한 사실도 공개되었으며, 이집트에서 출발한 히어로 캐릭터인 <문나이트>도 제작을 확정했다. <이터널스>에는 미국 국적이기는 하나 한국 영화계에서 활발한 필모그래피를 만들어 온 배우 마동석이 캐스팅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궤는 약간 다르지만, 최초의 무슬림 여성 히어로 캐릭터인 <미즈 마블>도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제작을 확정하고 티저 영상을 공개했다.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단순할지도 모른다. 히어로 무비 프랜차이즈는 영화계 전체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으며 이 기저에는 동양과 서양을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수많은 전 세계 관객들의 지지가 있다. 그들에게 계속해서 어떤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또 더 참신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들이 택한 것은, 아직 확실해 보이지는 않지만, 더 많은 캐릭터들의 보다 넓은 무대에서 펼칠 이야기일 수도 있다.
히어로 장르는 어쩌면, 현실의 거대한 문제들을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서 해결해 주는 히어로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시대에나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영웅'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영웅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충을 앞장서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문제의식을 갖도록 촉구하는 방식으로, 혹은 중대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용기 있는 행동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발휘해 왔다.
작금의 시대에는 더더욱 히어로가 필요해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팬데믹 사태가 현재 전지구인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으며 이 사태가 과연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그 누구도 확실한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비단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사태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비극이 우리에게 덮쳐오지 않을 거란 장담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히어로 코믹스, 그리고 히어로 무비는 이런 현실적인 고통을 가상의 공간에서나마 해결하고 치유하는 어떤 위로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의' 그리고 '선(善)'에 대한 의지는 어떤 히어로에게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소위 '히어로' 장르가 이제 예전만 한 호황을 누릴 수는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MCU의 10년이 마무리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기도 하고, 소위 정의 구현을 위해 앞장서는 히어로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천편일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히어로가 필요하다.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올바른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제는 그 강한 존재가 비단 서양인, 즉 백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질 때가 됐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