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 평론가와 김철홍 평론가의 <승리호> 찬반 비평
<승리호>는 한국 SF영화의 새로운 도약인가, 신파와 국뽕으로 점철된 망작인가. <승리호>를 둘러싼 반응이 심상치 않다. 양극단으로 갈리는 호평과 악평은 과열 양상을 보여 영화 자체가 지워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승리호>에 대한 냉철한 목소리를 전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이 자리를 마련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승리호>에 드리운 명암을 살펴보려 한다.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부디 상반된 두편의 글을 통해 당신의 감상이 좀더 풍요워로질 수 있길 바란다.
찬성 / 시대정신을 타고 나아가다
<승리호>의 가치 - 제임스 설리반과 업동이를 중심으로
조성희의 영화는 질문한다. ‘인간은 살아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빌어먹을 족속에 불과한가?’ 그가 죄의식을 무릅쓰면서 선택하고 괴롭히는 대상은 우리가 가장 순수하다고 믿는 쪽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어리거나 보호받지 못한 존재가 거대한 위협에 봉착한다. <남매의 집>의 순이, <짐승의 끝>의 순영, <늑대소년>의 순이,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의 말순. 언제나 ‘순’이라는 이름이 붙는 그들에게 악몽처럼 죽음이 덤벼든다. 까딱하면 죽을 판인데, 정작 그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게 뭔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우주와 마주한 SF영화 <승리호>에서도 마찬가지다. 순이라는 아이는 우주 궤도를 떠돌며 아빠와의 작별을 준비한다. 차이가 있다면 <승리호>는 적어도 위협을 가하는 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까발린다는 데 있다.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인간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설리반
<탐정 홍길동> 이전까지 조성희의 영화는 레트로한 의식을 지녔다. 시대적 배경이 다소 불투명해 보여도 그것이 대충 60년대에서 80년대를 넘나드는 언제쯤이라는 인상을 제공했다. 특정 시대를 통과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기시감의 영화로 기능한다. 위협의 주체는 아래로 경제적 권력자로부터 위로 정치적 권력자까지 지시되지만, 조성희는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이름을 구체적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몇번의 만남에서 그것에 대해 질문해보았으나 조성희는 딱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긍정 또한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현실을 한정하는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영화들은 레트로한 감성을 지녔으면서도 미래의 통찰력을 발휘한다. 즉, 레트로한 비전의 영화다. 조성희는 살아남은 인간보다 미래에 버티고 있을 인간에게 더 흥미를 느낀다. 서기 2092년을 배경으로 한 <승리호>는 그러한 짐작에 실마리를 내준다. 제임스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그는 앞선 영화의 모호한 권력자와 스스로 차별화한다. 20세기 중반에 태어나 150살을 넘긴 그는 의사, 물리학자, 우주공학자, 역사학자로 살아왔다. 지적 엘리트의 전형인 그가 미친 과학자로 전락하는 게 장르영화의 공식인데, <승리호>는 그에게 현실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메트로폴리스>(1927)가 100년의 시간을 보낸 지금, 과학자는 권력자의 도구라는 자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동시에 거머쥔 그는 우주 낙원의 창조자이자 인류의 구원자로 행세한다. 부드러운 미소 아래 신의 손길을 뽐내는 그는 완벽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혁명에 성공한 자들이 역사적으로 그러했듯이 자기기만에 빠진다. <탐정 홍길동>에서 소수 권력을 노린 광은회 일당의 논리- 세상엔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중요하지 않으면 없어도 된다–를 설리반은 반복한다. 인종 말살 캠프에서 살아남은 자가 유전적으로 우월한 극소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낙원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조성희가 생각하는 인간의 아이러니다.
<승리호>는 설리반에 맞서는 주요 인물로 4명을 내세우는데, 승리호를 이끄는 장현숙 선장(김태리)은 의외로 흥미롭지 못하다. 거친 스페이스 활극의 우두머리로 여성이 나선다는 점에선 주목할 만하지만 남성의 자리를 대체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힘들다. ‘지니어스 프로그램’에 선출돼 귀족과 무사의 자리를 보장받았다 반란자의 입장으로 돌아섰으나 그는 여전히 명령을 내리는 위치다. 게다가 그의 탁월한 능력으로 지칭되는 과감한 결단력이나 지도력도 남성의 그것을 흉내내는 것 같다. 비슷한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돼 일찍이 상류층의 삶을 누렸던 김태호(송중기)는 다르다. 동료 선원으로 일하는 타이거 박(진선규)과 로봇 업동이(유해진)처럼, 조종사 김태호는 노동자의 삶을 산다. SF영화인<승리호>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시스템의 밑바닥을 이루는 노동자계급을 명확하게 그룹화한다는 데 있다. 극 초반에 돈벌이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계급의식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영화는 다수의 인간이 속한 계급으로 노동자를 전면에 부각함으로써 노동자의 시대와 인간의 삶을 담론에 부친다.
우주 궤도의 쓰레기 쟁탈전에서 장 선장은 경쟁하는 무리를 무능한 것들이라 놀리며 나눠 먹자는 요구를 묵살한다. 빚더미에 시달리는 세 선원은 노동의 무게와 피로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김태호는 타이거 박과 업동이에게 “헛소리 그만하고 일 좀 하라”고 고함치고, 타이거 박은 “내가 언제까지 이걸 손으로 밀고 있어야 하냐”고 푸념하고, 업동이는 “진짜 일하기 싫다. 왜 맨날 나만 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라고 자문한다. 그들에게 다가온 천사 같은 존재 꽃님이는 말한다. “우주에서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대요. 우주의 마음으로 보면 버릴 것도 귀한 것도 없고요. 다 자기 자리에서 소중해요.” 꽃님이의 말은 “지구의 천한 종자들 몇 십억쯤 없어도 그만이야”라고 주장하는 설리반의 그것과 정확하게 대치된다. 중요한 점은, 노동자계급이 양극의 언사 및 전달과 상관없이 자각에 이른다는 것이다. 분리와 지배의 개념에 얽매인 권력자가 억압했던 시대와 비교해, 노동자들은 상하 관계를 동반자의 그것으로 이끈다. 푼돈을 놓고 경쟁하던 노동자들이 함께 뭉쳐 악에 대항하는 것을 두고 빤한 결말이라 부를 수도 있고 미스터리하다고 평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일컬어 시대정신에 들어맞는 행위라 할 것이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로봇, 어쩌면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존재
<승리호>에서 시대정신을 발견하게 하는 첫머리는 업동이다. 유해진이 얼굴 없이 연기한 로봇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의 그루트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업동이의 진짜 가치는 정체성의 변화와 자각을 또렷이 보여준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전쟁형 로봇인 업동이에게 첫 정체성은 남성성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내면적으로 여성성을 품은 그는 꽃님이로부터 ‘언니’라는 말을 듣자 볼을 붉게 물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피부 이식수술을 받을 때 여성에 가까운 외모를 선택한다. 업동이의 노선은 호전성으로 가득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균형을 바로잡는다. 업동이의 자각과 행동은 장 선장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데, 조성희는 두개의 숏에서 그것을 선명하게 표현했다. 무사의 기질을 내면화한 장 선장이 <영웅문>을 손에 든 반면, 업동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릴케: 삶과 노래>를 읽는다. 화면을 가득 채운 업동이의 모습에서 ‘인간의 자각, 성의 초월, 시간의 성숙’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화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업동이는 <A.I.>(2001)의 소년 로봇 데이빗의 다른 버전이다. 겁의 시간을 건너 그렇게 인간이 되고 싶었던 로봇은 기실, 인간이 궁극에 도달해야 했던 존재 자체다. <승리호>를 심심한 SF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영화가 넌지시 전하는 충만한 인간의 비전을 확인할 일이다.
추신/글을 쓰는 동안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일당백>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보게 되었다. 그 채널에서 로렌스 토브의 저서 <3가지 원리>에 대한 강의를 듣고 글의 도움을 얻었음을 밝힌다.
글 이용철 영화평론가
반대 / 욕망이 선명하지 않다
<승리호>의 진짜 문제 - 조성희 월드의 자기 복제에서 오는 예측 가능성을 중심으로
강화 두랄루민 선체. 양자 레이더. 320만 파운드의 추력으로 최고 속도 4만8천km/h에 이르는 우주선. 두랄루민이 무엇인지 4만8천이라는 숫자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속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해 설명하는 영화 속 한 인물은 이러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승리호를 ‘괴물’이라고 표현한다. 그 말을 들은 태호(송중기)는 “그래봐야 쓰레기 줍는 배”라고 응수하고, 그렇게 영화 초반부 ‘승리호’라는 캐릭터의 성격이 손쉽게 주입된다. 말하자면 능력은 뛰어나지만 현재 그 가치에 부합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캐릭터 혹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히어로인 것이다.
여기서 이런 캐릭터를 ‘손쉽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이러한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승리호>의 클리셰를 문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슬프지만 이제 어떤 한국 상업영화에 대해 말할 때 클리셰를 지적하는 것만큼 클리셰인 것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대신 가리키고 싶은 것은 ‘어디’이다. 어딘가에서 본 캐릭터인 것까지는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출처가 그 어느 곳도 아닌 감독 자신의 영화라면 어떨까. 조성희 감독의 세편의 장편 상업영화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 그리고 <승리호>까지. 영화의 제목이 그 영화의 주인공인 세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신세다.
조성희의 주인공들이 처한 ‘같은’ 상황과 예측 가능성
먼저 <늑대소년>의 늑대소년 철수(송중기)는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적 능력을 가진 그야말로 ‘괴물’ 같은 존재다. 그런 철수는 한 시골 마을에서 애완동물처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탐정 홍길동>의 길동(이제훈) 또한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진 존재다. 홍길동의 무예와 셜록 홈스의 두뇌를 갖춘 것으로 보이는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란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는 것뿐이고, 그러다 운좋게 사라질 뻔한 마을을 구한다. 게다가 길동의 원수는 이미 노쇠한 상태이며, 길동의 기억과 달리 그는 그렇게 엄청난 악당이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 어떤 우주선보다 단단한 몸과 빠른 속도를 가진 승리호가, 자신보다 약한 다른 우주선들로부터 우주 쓰레기를 탈취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처지라는 것이 드러날 때, 벌써부터 무언가가 예측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주인공의 처지가 무언가를 예상하게 한다는 것 또한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리호>에 감독 자신의 전작에 사용했던 설정이나 인물의 특징, 심지어 특정 장면까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띄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먼저 <승리호>는 크게 봤을 때 철수가 소녀(순이)를 구하고(<늑대소년>) 길동이 소녀(말순)를 구하듯(<탐정 홍길동>) 승리호가 소녀(꽃님이)를 구하는 이야기의 반복이다. 송중기 배우가 <승리호>에서 <늑대소년>에 이어 또 ‘순이’를 찾는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공통점이겠지만 감독이 <승리호>에서 다시 한번 양육자와 피양육자간의 갈등 과정을 영화의 주요 서사로 선택한 것은 다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순이와 철수, 길동과 말순, 태호와 꽃님은 처음엔 서로 제대로 된 교감을 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게 되는데, 세편의 영화 모두 그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서사의 빈틈을 메우는 데 적극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영화끼리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아도, 감독의 전작에 사용됐던 디테일한 장치들이 신작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만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짤막하게 등장하는 회상 신에서 순이는 노트에 한글 공부를 하는데 이 장면은 <늑대소년>의 철수가 쓰던 한글 노트를, 업동이(유해진)가 꽃님이에게 화장을 해주는 모습은 <늑대소년>에서 순이가 철수에게 장난쳤던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철수가 동네 시장에서 호떡을 앞에 두고 군침 흘리는 모습은 <승리호>에서 배고픈 순이가 길거리에서 판매되는(때는 2090년대다) 와플에 손을 내밀던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며, 업동이가 자신만의 상자에 돈을 모으는 것 또한 <탐정 홍길동>에서 동이가 들고 다니던 상자와 같은 설정 아닌가. 이에 더해 송경원 기자가 “이야기의 욕망”을 느껴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던 (<씨네21> 1293호, 프런트 라인 ‘<승리호>를 마냥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힘든 이유’) 강 박사의 죽음은 <탐정 홍길동>의 김병덕의 죽음과도 연결된다. 이때 살아남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 똑같이 ‘일하러 가셨다’인 것도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월드’를 세우려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또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어떤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성희 감독의 작품은 600만 관객을 넘기며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냈던 <늑대소년>도, 그리고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탐정 홍길동>까지도 군데군데 비판받은 지점이 많았음에도 선한 마음이 전달되는 영화인 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의식적으로 반복했던 것처럼 ‘이건 중요한 게 아니야’ 하다보면 끝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늑대소년>), 아픈 과거를 훔쳐간 자들로부터 다시 그것을 탈환하고 싶은 마음(<탐정 홍길동>)이 결국 와닿았기에 정상참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마음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감독의 욕망을 느꼈다. 작품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냈던 조성희는, 정도가 지나치지만 실제 괴물로 변해버리는 ‘늑대인간’을 만들었고, 정도가 지나치지만 어느 시기에도 존재하지 않는 탐정 홍길동을 만들었다. ‘지나친 정도’란 곧 욕망이다. 지나치면 지나칠수록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이 들겠지만 그만큼 누군가는 마음을 훔침당한다.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은 그런 의미에서 시도를 인정받은 작품이지만 과연 <승리호>에 진정한 시도란 것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완벽하진 않지만 선의로 가득 찬 ‘조성희 월드’를 세우려는 욕망이 이 영화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성희 감독의 영화는 항상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승리호>는 좋은 영화였을까. 자신의 새로운 월드를 위해 다른 월드의 것들을 그대로 가져와 만든 월드를 좋은 월드라고 할 수 있을까. 지구의 것을 화성으로 옮기려던 설리반 회장(리처드 아미티지)은 죽고, 무언가를 깨달으며 눈물을 흘리던 태호는 승리호로 유턴한다(이 유턴이 한국영화에서 숱하게 반복되는, <택시운전사>의 만섭으로 대표되는 그 유턴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아이를 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다른 아이를 이용하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 답이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인 걸까 아닌 걸까. 그래서 더 아쉽고, 그래서 문제에 대해 더 지나칠 정도로 얘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 김철홍 영화평론가
씨네21 www.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