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는 엄마 유미(이영진)와 함께 사는 탈학교 청소년 소현(김환희)은 어느 날 우연히 엄마가 웬 남자와 싸우고 있는 걸 목격한다. 몇 가지의 희미한 단서와 몇 단계의 논리적 비약을 거쳐, 소현은 그 남자가 그 동안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이렇게 지옥 같은 불행 속을 걷고 있는데, 우리를 버리고 간 당신은 제법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네? 마침 남자가 운영하는 동네 치킨집 상호도 ‘행복한 치킨’이다. 소현은 마침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남자 재영(류수영)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복수를 하고자 마음먹는다. 소현은 자신이 소매치기해 온 장물을 처리해주는 장물아비 언니 희진(김이경)의 이름을 빌려 재영이 사는 집 근처로 이사하고, 재영이 운영하는 치킨집에 취직한다. 그리고는 재영과 사귀고 있는 요양보호사 복희(이진희)를 해코지할 생각을 품는다. 재영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앗아가면, 재영의 삶은 반드시 불행해질 테니까.

아마 뉴스에서 접한 소식이었다면 소현을 곱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매치기부터 신분 도용, 폭행 사주, 그리고 살인 시도까지. 소현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죄목들은 경범죄부터 흉악범죄까지 화려한 편이니까. 그런데 MBC <목표가 생겼다>(2021)를 보고 있자면, 희한하게도 소현을 마냥 미워만 하기는 어렵다. 학교에선 학원폭력과 따돌림을 당하는데, 소현에겐 그 고민을 털어놓을 어른이 없었다.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는 엄마는 자신을 학대하고 방임했으며, 잠시 보육원에서 자라며 그 모든 악몽이 사라지는가 싶을 무렵 멋대로 불쑥 다시 나타나 자신을 데려갔다. 술 사 먹을 돈 몇 푼 벌겠다고 타짜들에게 자기 집을 불법 도박장으로 내어준 엄마를 용서하는 건, 소현에겐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아마 그래서 누구든 미워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이 자신에게 불친절했으니 자신도 세상에게 불친절해도 된다고 믿었으리라. 더군다나 이 불행의 원인으로 돌릴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일단은 붙잡고 할퀴고 싶었겠지.

나는 소현의 나이에 어땠던가 돌이켜보니, 나 또한 그 무렵에 경험한 불행과 상처들을 다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나아가 그 사람만 없으면 이 모든 불행이 끝날 거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막연하게 살의를 품는 것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서 그 살의를 실행하려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으며, 소현과 비슷한 조건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소현이 저지른 일들에 동의할 순 없지만, 적어도 어쩌다 그 지경까지 갔는지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다행히도 내게는 힘들 때마다 붙잡고 내 심중의 어둠을 토로할 만한 어른들이 있었다. 농담처럼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를 많이 본 덕분에 ‘죄짓고는 못 살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살의를 꺾었노라 너스레를 떤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심각한 비행으로 빠지지 않고 비교적 무탈하게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올 수 있었던 건 다 그들 덕분이었다. 세상이 밉고,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인 것만 같은 아무개가 밉고, 그 무엇보다 내가 밉다고 울 때마다 그걸 묵묵히 들어주고 손을 내밀어줬던 어른들. 허튼짓 하지 않고 이대로 살아봐도 나쁘지 않겠다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해준 사람들.

소현이 깊은 어둠에서 나오게 된 것 또한 그를 붙잡아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소현을 잡아준 건 복수의 대상이었던 재영과, 재영의 정보를 캐내려는 목적 하나로 가짜 연애를 시작했던 치킨집 알바생 윤호(김도훈)였다. 소현이 가장 날카롭게 할퀴고 이용하려 했던 이들은 도리어 소현에게 조건 없는 선의와 신뢰를 베풀었고, 그랬기에 소현은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달을 수 있었다. 소현이 제 죄를 고백하고 그 책임을 지려 노력할 수 있었던 건 소현이 강인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기 힘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지지해 준 사람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전히 삶은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기습할 것이고,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붙잡아줄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또 하루를 살아볼 수 있을 테니까.

어렸을 땐 그 시절 날 붙잡아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은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꼭 그것만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휘청거리던 시절 내 손을 잡아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지금 휘청거리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재영과 윤호, 희진과 복희가 소현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누군가에게 받았던 선의를 잊지 않고 그 선의의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내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이 다음 주자에게 바톤을 넘기는 일이 이어진다면, 어쩌면 불행과 악의로 점철된 이 세상도 조금은 더 살아볼 만해질 것이다.


글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