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가 MBC <전원일기>(1980~2002)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의 대부분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삽입된 것들이다. 우리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살기 전이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일요일 오전 식구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면 채널 선택권이 있던 내 아버지는 <전원일기>를 즐겨 보곤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그 이후 일평생 서울을 기반으로 생활했던 아버지에게, 어쩌면 <전원일기>란 자신이 늘 그리워하는 정서적 고향을 간접 체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1948년 경남 산간내륙에서 태어나 두 손을 다 동원해야 형제 수를 헤아릴 수 있는 대가족으로 자랐던 사람이니까. 지금은 대부분의 친척들이 하나둘 고향을 떠나 서울로, 경기로, 대구나 부산으로 떠나갔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절만 되면 일가친척 3대, 4대가 한자리에 모이곤 했으니까. 물론 명절 때 내려가보는 내 본적지는 <전원일기> 속 양촌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 정도도 아버지에게는 충분한 위안이었으리라.

1984년에 태어나 90년대의 문화적 세례를 받고 자란 내게, 딱히 <전원일기>를 막 좋아했던 기억은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내내 서울에서 자란 나에게 <전원일기>란 너무 멀고 막연한 이야기였다. 보도블록을 밟고 자란 탓에 신발에 흙먼지 한 톨 묻는 것도 신경 쓰던 나는 명절이라고 본적지에 내려가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일요일 아침에 나와는 정서적인 연결고리가 별로 없는 농촌의 이야기를 보는 건 그렇게까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굳이? 이 아침에? 게다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 때문에 내려가서 직접 경험하는 농촌과 <전원일기> 속 양촌리는 비슷한 듯 많이 달랐다. 어린 내가 경험한 내 본적지는 같은 집안 식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집성촌 특유의 아늑하지만 폐쇄적인 공기가 맴도는 동네였는데, 그에 비하면 양촌리는 서로 간의 거리가 사뭇 쾌적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캐주얼한 농촌이었다. 딱히 농촌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던 주제에, 어린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건 진짜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기껏해야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내게 무슨 채널 선택권이 있었으랴. 나는 묵묵히 밥을 먹으며 <전원일기>를 보았고, 그때 아버지 옆에서 함께 보았던 에피소드의 조각들은 아직도 뇌리를 맴돈다.

<전원일기>

그 시절 아버지가 <전원일기>를 보며 어떤 감각을 느꼈을지 새삼 깨닫게 된 건, 엉뚱하게도 영화 <벌새>(2018)였다. <벌새>는 1994년 서울 대치동 대단지 아파트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성장 영화인데, 주인공이 겪는 수많은 방황과 고민만큼이나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90년대 대단지 아파트의 풍경이었다. 물론 내가 자란 동네는 대치동과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긴 했으나, 80년대 말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이들이 터를 잡은 신도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별다른 미적 고려 없이 위로 높게 높게 세워 올린 무뚝뚝한 아파트 외벽, 단지 안에 심어 둔 울창한 나무의 풍경, 단지마다 하나씩 있었던 상가 건물과, 주로 그 상가 건물 2층쯤에 있었던 각종 학원들의 모습까지, 내가 유년을 보냈던 아파트 단지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러닝타임을 가득 메웠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온 나는, 한참을 탁월한 서사와 감정묘사에 감탄하고, 배우들의 흡인력 있는 연기에 감탄하고… 그리고 내심 내가 자랐던 90년대의 아파트단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내가 <벌새>를 보며 느꼈던 감각은 내 아버지가 <전원일기>를 보며 느꼈을 감각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는 깨달음도 함께 밀려왔다. 물론 내 아버지의 고향은 <전원일기> 속 양촌리와 다르고, 내가 자란 아파트 단지는 <벌새> 속 대치동과 다르다. 하지만 <벌새>의 주인공이 오르내리던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 계단의 시멘트 질감이, 단지 한 켠에 설치되어 있던 ‘방방이’ 트램폴린의 풍경이, 내가 처음 세상을 인지하고 배워 나가던 어린아이였던 시절에 경험한 익숙한 감각을 되살려 주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전원일기> 속 양촌리 또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양촌리 사람들의 발 밑으로 자박자박 깔리는 흙길이, 마당 한 켠에 쪼그려 앉아 세수를 해야 하는 옛 농촌 주택 구조가, 고추 파동이니 배추 파동이니 각종 농산물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온 밭을 다 갈아엎으며 쓰린 속을 달래야 했던 마을 어른들의 한숨이, 아버지에게 당신께 익숙했던 세계의 감각을 일깨워줬던 건 아니었을까?

<벌새>

만약 그런 거였다면, 아버지가 왜 굳이 모든 식구들이 함께 모여 아침을 먹는 일요일 오전마다 <전원일기>를 틀었는지 이제 조금은 짐작이 갈 것도 같다. 그건 아마 흙 한 번 맨발로 안 밟아보고 자란 당신의 아이들이,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아침마다 산을 두 개를 넘어야 했던 자신의 유년기를 조금은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의 유년을 빚었던 풍경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강 저런 것이었노라고, 마흔이 다 되어서야 낳았던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