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환대나 연대보다는 적대가 익숙해지는 시대, 우리도 김보미와 이봄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관점을 바꿔 바라볼 수 있을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자.’ 사람의 사이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귀가 따갑게 듣는 말이다. 너무 본인 위주로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면 상대가 어떤 마음일지도 이해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다. 물론 이 말이 이처럼 널리 쓰이는 건,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아서겠지.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었다면 굳이 ‘그렇게 해보라’고 권유하는 표현이 존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긴, 그게 잘 됐으면 전 세계 언어에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관용구가 존재할 이유도 없겠지. “내 신발을 신고 1마일만 걸어봐”(Walk in my shoes for a mile)랄지, “제 살을 꼬집어 남의 아픔을 알라”(我が身をつねって人の痛さを知れ)랄지, “내 자리에 1초만 서 있어봐”(mettez-vous une seconde à ma place) 같은 표현들.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했을 때 올라가는 게 오로지 타인에 대한 이해뿐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역지사지를 대단히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경험상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상황을 다시 읽어내려 할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 한결 나아지곤 했다. 내가 나이기에 내 입장으로만 상황을 보고 생각할 때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 그러니까 내 욕심, 내 단점, 내가 범한 결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오해 같은 것들이 훨씬 더 잘 보였으니까. 물론 단점만 새롭게 보이는 건 아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그 관점으로 상황을 다시 짚어 나가다 보면, 나 자신은 한번도 장점이나 매력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면모들이나,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준 사소한 습관 같은 것들도 다시 발견하곤 했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때, 우리는 상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나 자신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관점이 확장되고 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체험이라니. 과연 어려운 일이지만 귀가 따가울 만큼 서로에게 권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MBC 드라마 <봄이 오나 봄>(2019)의 두 주인공은, ‘입장 바꿔 생각하라’는 말을 가장 과격한 버전으로 실천에 옮기게 된 이들일 것이다. 스프링문화재단 이사장 이봄(엄지원)과 MBS 앵커 김보미(이유리)는, 원래대로라면 서로를 이해하기는커녕 되도록 안 얽히며 살기 위해 노력할 만한 사람들이다. 이봄은 한때 우아함으로 대한민국을 사로잡은 배우였으며 이제는 재단을 운영하고 국회의원 남편을 내조하며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이다. 매일 문 앞으로 새벽배송이 오는 신선한 식재료로 밥상을 차리는 것이 그의 행복이고, 험한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볼 때면 흠칫흠칫 놀란다. 김보미는 다르다. 특종 냄새를 맡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고, 그렇게 취재한 결과물을 선보이고는 9시 뉴스 메인앵커 자리를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치며, 자신과 앵커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동료 기자들에게는 서슴없이 이빨을 드러내는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인간형이다.

서로를 ‘상스럽다’, ‘고상한 척한다’고 생각할 이 두 사람은, 영혼이 뒤바뀌는 사고를 겪으며 원래라면 상종도 안 할 상대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미국 양자역학연구소가 개발 중인 신약을 에너지 드링크로 오인해 마시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에서 깨어나고, 각자 지금껏 지켜온 가정과 커리어가 걱정된 두 사람은 원래 자기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상대의 삶을 살아 보기로 한다. 그리고는 깨닫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잘 살았다고 생각한 김보미는, 이봄의 몸 안에서 김보미의 삶을 바라본 뒤에야 자기 주변엔 기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게 다 자신의 탓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림 같은 가정을 일구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믿었던 이봄은, 김보미가 된 이후에야 남편과 자신의 비서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 모두 남의 몸을 빌려 살게 된 덕분에,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온갖 소동과 역지사지를 경험한 끝에, 김보미와 이봄 둘 다 예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김보미는 여전히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게 중요한 악착같은 사람이지만, 이봄의 딸 시원(이서연)을 ‘언니 딸’이 아니라 그냥 ‘딸’이라고 부르며 아끼고 마음을 주는 인물로 성장했다. 다시 배우 생활을 재개한 이봄은 여전히 우아하고 고상하지만, 필요할 때면 거침없이 화도 내고 아쉬운 소리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김보미와 이봄의 삶을 모두 공유한 덕분에, 극과 극에 위치해 있던 두 사람의 관점과 성격은 그 가운데 어드메에서 만나게 된 셈이다.

살면서 우리가 김보미나 이봄이 경험한 격렬한 역지사지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고, 우리에겐 양자역학연구소가 개발 중인 신약 같은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본방송 당시 KBS <왜그래 풍상씨>와 SBS <황후의 품격>에 밀려 낮은 시청률 속에 컬트적인 인기를 모으고는 종영한 <봄이 오나 봄>을 떠올리곤 한다. 갈수록 환대나 연대보다는 적대가 익숙해지는 시대, 우리도 김보미와 이봄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관점을 바꿔 바라볼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김보미와 이봄처럼 우리도 상대를, 그리고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서로를 미워하기 바쁜 세상에도 마침내, 봄이 올 텐데.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