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재개봉 소식과 함께 그 포스터를 오랜만에 보니, 문득 카페 벽을 영화 포스터로 장식하던 90년대 한국의 유행이 떠올랐다. 이제사 생각해보면, 그 영화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 그저 포스터가 당시 한국 대중의 입맛에 맞아 인기를 끈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당시 사랑 받았던 포스터들을 모아봤다.
세 가지 색: 블루 세 가지 색: 레드
유럽의 예술영화들이 줄지어 개봉하던 90년대 중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은 경전처럼 추앙받았다. 특히 1994년 국내에 개봉한 <세 가지 색> 연작의 인기가 대단했다. 영화의 인기에 맞춰 포스터도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줄리 델피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화이트>보다는, 이렌느 야곱과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이 떡 하니 배치된 <레드>와 <블루>의 수요가 월등히 높았다. 당대 유럽영화계를 대표하던 배우의 아름다운 자태와 적당히 음울한 분위기가 절묘히 조합돼 카페의 분위기를 한껏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파릇파릇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주인공 폴이 낚시를 통해 삶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담은 <흐르는 강물처럼>은, 무엇보다 인물들이 낚시를 즐기는 공간의 아름다운 풍경이 중요했다. 포스터에는 브래드 피트의 꽃다운 미모가 일절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톤의 녹음 아래 씩씩하게 낚싯대를 던지는 사내의 작은 실루엣만으로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가을의 전설
<가을의 전설>의 제목은, 원제 속의 Fall을 '몰락'이 아닌 '가을'로 오역해서 붙인 것이다. 하지만 포스터 상단을 채우고 있는 브래드 피트, 안소니 홉킨스, 에이단 퀸의 얼굴에 드리워진 노을빛 때문인지, 오역인 제목이 꽤나 그럴 듯하게 받아들여졌다. 장발을 휘날리며 질곡의 가족사를 가로지르는 트리스탄(브래드 피트)의 매력이 뚝뚝 묻어나는 <가을의 전설>은 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브래드 피트 영화 중 하나다.
그랑 부르
당시 인기 많았던 영화 포스터의 특징. 바로 파란색이 컬러의 주조를 이룬다는 점이다.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릴 만큼 온통 파랑으로 가득한 <그랑 부르>의 포스터야말로 그 대표격이라 할 만하다. 푸르른 바다를 배경으로 두 잠수부의 우정을 그린 <그랑 부르>는 프랑스에서만 무려 907만 관객을 끌어모은 대작이었다. 포스터의 인기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11만이라는 꽤 준수한 수치를 기록했는데, 주인공 엔조 역의 장 르노가 2년 뒤 개봉한 <레옹>의 그 배우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베티 블루 37.2
<베티블루 37.2>는 세상에 주인공 조그와 베티만이 숨쉬고 있는 것처럼, 온전히 두 사람의 뜨거운 관계를 그리는 데에 집중한다. 그럼에도 특히 관객들의 뇌리를 장악하는 건 히로인 베티 역의 베아트리체 달의 존재다. 뜨거운 사랑에서 더 나아가 결국 광기에 사로잡히는 베티의 멜랑콜리아가, 심약함과 격정을 동시에 품는 베아트리체 달의 열연을 통해 확연히 전달된다. 퍼런(여기서도!) 배경에 창백하게 새겨진 달의 모습과 그 아래 노랗게 휘갈겨진 '37°2'는 <베티블루 37.2> 속 위태로운 사랑을 금세 복기시켜내는 이미지였다.
쇼생크 탈출 샤인
<쇼생크 탈출>의 포스터 역시 당시 유행하던 포스터의 또 다른 상징, 세상을 향해 두 팔을 가득 벌리고 선 남자의 모습이 찍혀 있다. 누명을 쓰고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 앤디(팀 로빈스)가 온갖 고난을 겪고 결국 바깥 세상으로 탈출하는 순간의 환희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샤인> 역시 이와 같은 컨벤션이 고스란히 담긴 포스터로 사랑받았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피아니스트 데이비드(제프리 러쉬)의 가벼운 몸짓 위로 파랗게 펼쳐진 여백이 인상적인 포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