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개혁군주와 권신들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이야기를, 혹은 암군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진 사대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궁중 사극을 즐겨보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모든 것들이 영 시큰둥해졌다. 무엇 때문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아무리 성군인 임금이 나오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결국엔 세습군주제 왕정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화면 위에서 누가 더 백성을 위하는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그들 또한, 자신이 좋은 사람이고 노력한 자여서 존엄해진 것이 아니라 부모를 잘 만나서 왕족이 되고 양반이 된 신분제 엘리트들 아니었던가. 공화정인 오늘날의 한국 사회조차 충분히 평등하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TV 앞에 앉아서는 상하 신분구조가 명확한 세계를 즐기는 일이 내겐 조금은 앞뒤가 안 맞는 농담처럼 느껴졌다. 하긴, 나이를 먹으면 입맛도 바뀌는데, 하물며 사극 취향이야.
하지만 궁 안의 남정네들 말고 궁 안의 여인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순간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타고 태어나길 존엄하게 태어난 남정네들과 달리, 여인들은 신분은 높을지언정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에는 늘 한계가 있지 않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야 하고, 다른 궁녀가 임금의 성은이라도 입으면 안 되기에 끊임없이 견제해야 하고, 친정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 원자 아기씨를 생산해야 하고, 임금 몰래 제 뜻을 펼치려 해도 직접 움직일 수 없기에 남자 조력자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궁 안의 여인들이 손에 쥔 권력이라는 건,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결국 남자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여인들의 암투” 정도로 소비되어 왔던 궁중 여인들의 삶은, 곱씹어 보면 볼수록 더 서글픈 생존 투쟁으로 가득하다. 비빈이 되어도 가문의 남자들이 권력 다툼에서 지면 언제든 폐비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 삶, 신분이 높아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비단으로 지어진 감옥 속에 유폐된 삶은, 그 중요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탐구되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