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김지운 감독이 타인의 기억을 통해 남을 구하려고 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건 여러모로 흥미로운 일이다.
“한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는 뇌과학자 고세원은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으로 고통받고 있다. 타인의 뇌와 뇌파를 동기화해 기억을 공유하는 기술을 연구하던 세원은, 죽은 자들의 뇌에 접속해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의 단서를 쫓기 시작한다.” 만화가 홍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상화한 애플TV+의 첫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닥터 브레인>(2021)의 시놉시스를 읽으며, 난 김지운 감독이 왜 이 작품의 영상화에 끌렸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지운 감독이 끈질기게 파헤쳐 온 주제, ‘기억’이라는 테마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이니 말이다.
2000년대 내내 김지운이 반복해서 그려왔던 세계가 그랬다. 그 세계는 일순의 기억으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뀐 사람들과, 도망치고 싶은 기억을 지우지 못해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끔찍한 기억을 지운 탓에 아내의 행방을 몰라서 새로 입주한 아파트를 헤매는 성민(정보석)과 아직 개발이 덜 되어 황량한 신도시를 하염없이 헤매는 그의 아내(김혜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쓰리>(2003)의 ‘메모리즈’, 지우려고 발버둥 쳐봐도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죄의식 때문에 서로에게 끝없이 고통을 남기는 인물들이 한 집에서 부대끼며 괴로워지는 영화 <장화, 홍련>(2003), 잊히지 않는 기억 때문에 복수귀가 되어 만주까지 달려온 창이(이병헌)와 자신이 지워버린 기억 때문에 싸움에 휘말린 태구(송강호)의 서사가 끝을 장식했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보스의 어린 애인이 첼로를 연주하다 말고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순간의 기억에 사로잡혀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선우(이병헌)의 삶을 그린 <달콤한 인생>(2005)까지, 김지운의 세계는 ‘기억’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 안으로 가라앉다가 끝내 파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닥터 브레인> 속 세원(이선균) 또한 그런 인물이다. 해마는 보통 사람의 2배 크기지만 편도체의 크기는 1/4밖에 되지 않는 사람. 남들이 느끼는 감정은 느낄 수 없지만, 남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기억할 수 있어서 엄마가 트럭에 치이던 순간 허공에 흩어지던 유리 파편의 궤적까지 하나도 잊지 못한 채 다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 남들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해 같은 연구소 동료들과도 제대로 된 교류를 하지 않고 사는 외톨이지만, 아내 재이(이유영)와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자신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내 재이와 아들 도윤(정시온)과 함께 웃고 떠들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남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경험하는 평범한 인생. 그러나 폭발 사고로 도윤을 잃고 난 뒤 그 평범한 인생의 가능성은 멀리 가버렸다. 한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 세원에게 다 타버린 도윤의 시신을 두 눈으로 확인한 기억은 더없이 선명하다. 그러나 아내 재이는 끝없이 아들이 살아있다고 중얼거리고, 유일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던 가정이 무너진 세원은 ‘타인의 기억’을 꺼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착하며 일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죽은 자의 기억과 처음 접속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억’을 향한 세원의 집착은 김지운의 전작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타인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이 충돌하며 생기는 환영을 걷어내려 노력하던 세원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도윤이 살아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려낸다. 그 누구보다 정확한 기억력을 지닌 세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도윤의 사망을 의심한 적이 없다. 아내 재이의 하소연조차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긴 엄마의 착각으로 생각하며 안타까워하던 세원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목격한 도윤이 살아있다는 말 한마디에 기대기 시작한다. 정말 아들 도윤이 살아있다면, 가서 아들을 구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채 누워있는 아내 재이도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른다.
6개의 에피소드 중 아직 첫 회만 공개된 <닥터 브레인>이 어떤 작품으로 기록될지, 난 아직 모른다. 김지운 감독의 첫 드라마 연출작이자 애플TV+의 첫 한국 오리지널이라는 기대치에 부합하는 작품이 될지, 아니면 스트리밍 서비스의 춘추전국시대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 정도로 기억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김지운 감독이 타인의 기억을 통해 남을 구하려고 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건 여러모로 흥미로운 일이다. 김지운의 2000년대 필모그래피가 기억 때문에 자기 안에 갇혀 나쁜 선택을 내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면, <닥터 브레인>은 제 안에 갇혀 있던 세원이 기억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 그를 계기로 진실을 밝혀내 끝내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는 이야기인 것이니 말이다. “저 아이가 자신의 뇌를 어떻게 사용하게 될지 정말 궁금해.” 어린 세원을 거둬 뇌과학의 길로 인도한 스승 명박사(문성근)의 말처럼, 난 김지운이 새롭게 들려줄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궁금하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