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당대 가장 독보적인 필모그래피를 구축하고 있는 여성감독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의 최신작 <퍼스트 카우>가 개봉해 눈 밝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첫 영화 <초원의 강>부터 차기작까지,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세계를 살펴보자.


초원의 강

River of Grass, 1994

30세가 되던 1994년 발표된 켈리 라이카트의 데뷔작. 뮤지션 출신의 감독 제시 하트만(Jesse Hartman)이 프로듀서와 원안을 맡았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나고 자란 라이카트는 마이애미와 에버글라데스 사이 '초원의 강'이라 불리는 지역을 배경으로, 어릴 적 어머니가 떠나고 알콜중독자이자 경찰인 아버지와 성장한 30대 여성 코지(리사 도널드슨)가 아버지가 잃어버린 총을 주운 떠돌이 리(래리 페슨덴)를 만나고 우연히 격발 사고를 일으키고 도망 다니는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 코지의 과거를 몇 장의 사진과 내레이션으로 간략히 설명한 오프닝 이후에도 사진 이미지를 군데군데 삽입하고 드럼 솔로 연주를 곁들여 독특한 리듬을 만들었다. '일탈'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자유의 쾌감보다는 정처 없음의 황량한 정서가 두드러진다.


올드 조이

Old Joy, 2006

드문드문 단편 3개를 만들었던 라이카트는 <초원의 강> 이후 12년 만에 두 번째 장편 <올드 조이>를 내놓았다. 히피로 살고 있는 커트(윌 올드햄)과 그와 달리 평범한 가정을 꾸린 마크(대니얼 런던)는 오랜만에 만나 오리건 포틀랜드 산악지대 속 온천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후 꾸준히 라이카트와 시나리오를 작업하는 조나단 레이몬드(Jonathan Raymond)와의 첫 협업인 <올드 조이>는 라이카트 영화의 꾸준한 공간인 오리건 주가 처음 배경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크레딧에서 두 음악가의 이름이 눈에 띈다. '보니 "프린스" 빌리(Bonnie "Prince" Billy)'를 비롯한 수많은 명의로 활동하는 포크 뮤지션 윌 올드햄(Will Oldham)이 커트를 연기했고, 미국 인디 신의 전설적인 밴드 욜 라 텡고(Yo La Tengo)가 음악을 담당했다.


웬디와 루시

Wendy and Lucy, 2008

<올드 조이>로 다시금 연출을 시작한 레이카트는 2년 만에 세 번째 장편 <웬디와 루시>를 발표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반려견 루시와 단둘이 차를 타고 오리건에서 알래스카로 향하던 웬디는 차가 고장 나고 마트에서 사료를 훔치다가 걸려 연행되는 바람에 루시를 잃어버린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변화는 주인공 웬디 역에 캐스팅된 할리우드 스타 미셸 윌리엄스(Michelle Williams)의 존재. <시네도키, 뉴욕>(2008) 작업을 마치고 이틀 만에 <웬디와 루시> 현장에 온 윌리엄스는 (그녀가 너무 예뻐 보일 수 있겠다고 염려한) 라이카트의 요청에 2주 동안 메이크업은커녕 머리도 감지 않은 채 촬영에 임해, 자꾸만 꼬여만 가는 계획해 지쳐가는 여자의 불안과 좌절을 이끌어냈다. 강아지 루시는 <올드 조이>에도 출연했던 실제 라이카트의 반려견이다.


믹의 지름길

Meek's Cutoff, 2010

1845년 오리건, 서부로 이동하려는 세 가족이 가이드 스티븐 믹(브루스 그린우드)을 고용하고, 믹이 안내한 지름길로 가다가 사막 한가운데에 고립되고 만다.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이 닥치자 세 가족 사이엔 불신이 싹튼다. 전작에 이어 미셸 윌리엄스를 히로인에 내세운 서부극. 라이카트는 세르지오 레오네로 대표되는 수정주의 서부극의 2.35:1 화면비의 광활한 이미지가 아닌 고전 서부극 특유의 1.37:1 화면비를 택해 풍경보다는 그 공간에 갇힌 이들의 갑갑한 상황을 강조했다. 윌리엄스가 연기한 여성 주인공 에밀리가 총을 빼 들어 난관을 헤쳐나가려 한다는 점에서 마초 중심의 세계에 집중한 서부극의 전통을 비트는 시도가 돋보인다. 2012년 세상을 떠난 위대한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스(Harris Savides)의 카메라 오퍼레이터 출신의 크리스토퍼 블로벨트(Christopher Blauvelt)가 <믹의 지름길>부터 꾸준히 라이카트의 촬영감독을 맡고 있다.


어둠 속에서

Night Moves, 2013

전작들이 개인 간의 갈등에 집중하는 이야기였다면 <어둠 속에서>는 환경 문제를 경유한 스릴러적 설정이 돋보인다. 급진적인 환경운동가 조쉬(제시 아이젠버그), 디나(다코타 패닝), 하몬(피터 사스가드)은 댐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할리우드의 젊은 배우들을 기용했고 장르적인 접근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라이카트 필모그래피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댐을 폭파하기 위한 작전이 실행되기까지의 긴장이 상당한데,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인물들이 마주한 윤리적인 딜레마를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제목이 주지하듯 밤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가 담아낸 야간 촬영의 결과물이 라이카트의 대가적인 면모를 확실히 증명한다.


어떤 여자들

Certain Women, 2016

켈리 라이카트는 조나단 레이몬드가 쓴 오리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여성 작가 마일 멜로이(Maile Meloy)가 쓴 세 개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어떤 여자들>을 연출했다. 로라 던(Laura Dern), 크리스틴 스튜어트(Kristen Stewart), 미셸 윌리엄스, 그리고 신예 릴리 글래드스톤이 몬태나 리빙스턴에서 각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네 명의 여자를 연기했다. 변호사 로라(로라 던)은 자꾸 고집만 부리는 의뢰인 때문에 골치를 썩인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그동안 꿈꿔온 집을 짓고 살려는 지나(미셸 윌리엄스)는 그 열망으로 인해 가족과 이웃과 갈등하게 된다. 외딴 마을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한 여자(릴리 글래드스톤; 이 캐릭터만 이름이 없다)는 야간학교 선생님인 법학도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설렘을 느낀다. 라이카트의 세계답게 열심히 사는 그들의 노력이 결국 화해와 사랑의 결실로 이어지진 않지만 그들의 일상과 마음을 차분히 펼쳐 보이는 진행이 안기는 감흥이 상당하다.


퍼스트 카우

First Cow, 2019

<퍼스트 카우>는 라이카트와 조나단 레이먼드가 다시 협업한 작품이다. <믹의 지름길>의 배경보다 20년 더 앞선 1820년의 오리건, 사냥꾼의 식량을 담당했던 쿠키(존 마가로)는 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니던 중국인 킹 루(오리온 리)를 구해주고, 얼마 뒤 다시 만나 함께 생활한다. 고급 종의 암소가 마을에 들어왔다는 걸 안 그들은 몰래 우유를 짜내 케이크를 만들어 팔고 맛있다는 소문이 일대에 퍼진다. 고요한 풍경들을 지나 나란히 앉은 유골이 발견되는 프롤로그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머잖아 개척시대에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던 두 남자 쿠키와 킹 루의 사랑을 방불케 하는 우정을 따라가면서 이들이 왜 바로 곁에서 죽어갔는지 펼쳐 보인다. 초기 자본주의에 관한 탐구로 보아도 충분히 흥미롭다.


쇼잉 업

Showing Up, 2022?

켈리 라이카트

<쇼잉 업>은 올해 초 제작이 발표된 라이카트의 신작이다. 커리어의 전환점이 될 만한 전시를 목전에 둔 아티스트를 날카롭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낸다고 한다. 라이카트의 뮤즈 미셸 윌리엄스를 비롯해 <퍼스트 카우>의 주연 존 마가로, 데뷔작 <초원의 강>의 주연 래리 페슨덴, 힙합 뮤지션 안드레 3000(André 3000)으로 알려진 안드레 벤자민(André Benjamin) 등이 캐스팅 진이 포함됐다. 지난 6월 오리건 포틀랜드에서 촬영을 시작해 한 달 만에 마치고 후반 작업 중이다. <퍼스트 카우>에 이어 A24가 배급을 맡는다. 작업 상황으로 봐선 내년 베를린 영화제나 칸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될 전망이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