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은 봉선과 소쌍의 관계를 레즈비어니즘 대신 플라토닉한 관계 내지는 지극한 자매애인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지극한 아낌을 ‘사랑’이라는 이름 말고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지 알지 못한다.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이향의 두번째 부인은 순빈 봉씨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는 동안 승휘(세자의 후궁) 권씨가 회임한 것을 두고 표나게 원망하고 슬퍼했으며,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으면 공연히 서러워했다. 궁궐의 법도에 어긋나게 몰래 친정에 먹을 것을 보내는가 하면, 마음에 투기가 일 때면 궁인과 나인들을 손수 때리기도 했다. 시아버지 세종이 직접 내린 <열녀전>은 한번 읽어보고는 “이걸 배운 뒤에 어떻게 생활하겠는가”라며 뜰에 던져버렸고, 제 침소에 술을 숨겨두고는 연거푸 술을 마시기를 즐겼다.

이를 모두 보고도 세자의 두 번째 혼인만큼은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던히 넘겼던 세종은, 순빈이 여종 소쌍을 아껴 밤에 동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순빈을 폐위했다. 항간에는 폐위된 봉씨가 친정으로 돌아와 자신은 잘못이 없노라 주장하자, 아버지 봉여가 “다음 생애에는 사내로 태어나라”라고 말하고는 딸을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는 설이 퍼져 있다. 아마 ‘나쁜 여인이 징벌받는 이야기’를 즐기는 이들이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테다. 봉여는 순빈 봉씨가 폐위되기 3개월 전에 예순 두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폐위된 순빈이 궁을 떠난 뒤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니까.

<KBS 드라마스페셜 2021>의 세 번째 주자 <그녀들>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자리를 상상력으로 새롭게 채워 넣은 드라마다. <그녀들>이 재해석한 순빈 봉씨 봉선(정다은)은 투기에 몸서리치는 사람도,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는다고 서러워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세자빈이 된 삶이 고통스럽고, 여자라는 이유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열녀문>이 지긋지긋하다. 제 가치가 오로지 세손 생산에 성공하는지에 따라 매겨지는 사랑 없는 결혼이 싫고, 훗날 유산했다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일단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라는 걸 보여주자며 거짓 임신을 하라고 부추기는 아버지가 끔찍하다.

봉선은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나뭇가지라도 휘두르며 칼싸움 흉내라도 내야 살 것 같고, 궁궐 안을 마음껏 달려야 제 안의 울분이 가실 것 같다. 말하자면 봉선은 15세기 조선에 갇힌 21세기의 현대인이다. 그 숨 막히는 궁궐 안에서, 봉선은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친 사람인 척한다. 성격이 포악하여 뜻한 바는 반드시 이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좀 덜 건드리고 덜 가로막겠지.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몰라.

나인 소쌍(김새론) 또한 처음에는 봉선을 해칠 목적으로 투입된 간자에 가깝다. 우연한 계기로 승휘 권민(서은영)이 봉선에게 꾸준히 약을 먹이며 회임을 가로막아 왔다는 사실을 엿들은 소쌍은, 자신이 궁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권민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슬쩍 흘린다. 내가 당신이 저지른 일들을 알고 있으니 부디 날 내쫓지 말아 달라고. 내가 믿음직한 심복이 되어 이런저런 궂은일을 할 테니 궁에만 남아있게 해달라고.

권민에게 받은 유산 유도제를 품에 숨긴 채 빈궁전으로 출근하게 된 소쌍은, 오래지 않아 세상 포악한 미치광이라던 봉선이 실은 뼛속까지 외롭고 슬프며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 어떤 세자빈이 궁궐 나인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이유로 “너희 집으로 가자, 내가 막무가내로 가자고 우겨서 넌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하면 누가 뭐라 할 것이냐”라고 말해준단 말인가. 세상 어떤 ‘포악한 미치광이’가 궁궐 한 켠 공터에 손바닥만 한 공갈 봉분을 대신 만들고는, 직접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것으로 달래라고 말해준단 말인가?

봉선의 본질을 알게 된 소쌍은 자연스레 봉선을 아끼게 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아낀다는 것이 이상할지는 몰라도, 두 사람 사이는 그렇다. 소쌍은 봉선이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봉선은 소쌍이 더는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소쌍은 봉선에게 자신과 관련된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뒤 말한다. 우리 발로, 이 궁을 나가자고. 봉선에게 숨 막히는 순종만을 강요하는, 원치 않는 정치 게임의 한가운데로 봉선을 밀어 넣는 이 궁에서 나가서, 자유로워지자고. 그렇게 봉선은 궁궐의 법도가 지엄한데 감히 일국의 세자빈의 몸으로 여종을 희롱한 미치광이 며느리가 되어, 소쌍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해야 함에도 세자빈과 동침한 궁녀가 되어 궁에서 쫓겨난다.

<그녀들>은 봉선과 소쌍의 관계를 레즈비어니즘 대신 플라토닉한 관계 내지는 지극한 자매애인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지극한 아낌을 ‘사랑’이라는 이름 말고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지 알지 못한다. 소쌍은 봉선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밝고 행복하게 웃으며, 봉선은 소쌍과 둘이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이를 사랑이 아니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녀들>의 재해석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왕실의 법도가, 유가의 가르침이, 당대의 사고방식이 온통 여성의 행실을 재단하고 규정지어온 15세기에, 갑자기 혼자 21세기를 사는 듯 갑갑해하는 봉선이라는 캐릭터를 보고 당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순빈 봉씨가 왜 폐위되었는지에 관한 기록도 있고, 그를 둘러싼 자극적인 야사도 많지만, 정작 봉씨의 입장이 어땠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정말 순빈 봉씨가 어떤 마음으로 궁궐 생활을 버텼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 “폐위된 순빈 봉씨는 친정집에 돌아가서 잘못이 없다고 우기다가 애비의 손에 목이 졸려 죽었다” 같은 야사를 정설인 양 떠들고 다닌다면, 나라고 <그녀들>이 역사의 빈 칸에 그려 넣은 상상을 정사인 양 여기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그린 봉선과 소쌍의 이야기가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대신 아버지의 권력 추구 수단으로, 왕실의 대를 이을 후사를 생산할 모체로, 세자를 보필하고 순종할 아내로 살아갈 것을 강요받던 순빈 봉씨를, 그의 인생을 망치러 왔던 나인 하나가 지극히 사랑하여 끝내 구원해냈다고 믿기로 한다. 누가 뭐래도 그 쪽이 조금 더 아름답지 않은가.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