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마우스 캐릭터를 그리는 월트 디즈니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에디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키 마우스 캐릭터를 봅니다. 아재답지 않게 스마트워치 화면을 미키 마우스로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시계를 볼 때마다 미키 마우스가 한쪽 발을 까딱까딱거리고 있습니다. 으음… 귀엽군요.

미키 마우스를 만든 사람, 누군지 아시죠?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공동 창립자 월트 디즈니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12월15일, 오늘은 그가 세상을 등진 지 꼭 50년이 되는 날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1901년 미국 시카고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 때 캔자스로 이사를 했습니다. 유년, 청소년 시기를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림을 잘 그렸던 디즈니는 캔자스 시티의 예술 대학(Kansas City Art Institute)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어브 아이웍스를 만났습니다. 그는 미키 마우스의 디자인에 참여한 인물입니다. 디즈니 사(社)에서 공로상을 받은 ‘디즈니 레전드’ 가운데 한 명입니다.

캔자스 시티 시절 회사 봉투에 인쇄된 그림.

두 사람은 캔자스 시티에서 애니메이션 회사를 차렸지만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1923년, 둘은 할리우드에 진출합니다. <앨리스 코미디>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계약됐습니다. 마가렛 윈클러라는 제작자가 파트너였습니다. 디즈니의 형인 로이 디즈니가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로이 디즈니는 월드 디즈니 컴퍼니의 공동 창립자입니다.

오스왈드 더 럭키 래빗이 등장하는 <트롤리 트러블>(Trolley Troubles) 포스터.

디즈니는 <앨리스 코미디> 이후 새로운 시리즈를 제작했습니다. ‘오스왈드 더 럭키 래빗’이라는 토끼 캐릭터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윈클러가 캐릭터 저작권을 뺏아가버렸습니다. 아이웍스를 제외한 애니메이터들도 윈클러의 편이었습니다. 화가 난 디즈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종이에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캐릭터가 바로 미키 마우스였습니다. ‘오스왈드 더 럭키 래빗’을 변형한 캐릭터입니다.

잠시 시간을 최근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겨울왕국> 시작 전에 이 영상을 보신 기억이 나시나요?

<증기선 윌리>

미키가 휘파람을 불며 키를 돌리는 이 장면은 디즈니가 1928년 발표한 <증기선 윌리>라는 작품의 한 토막입니다. 미키 마우스가 등장한 공식 데뷔작입니다. 또 최초로 사운드가 들어간 유성 애니메이션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지금의 디즈니 왕국 건설의 본격적인 시작점입니다. 참, 미키 마우스의 목소리는 디즈니가 직접 녹음했습니다. 작화는 아이웍스가 했습니다.

<꽃과 나무>

이후 디즈니는 <꽃과 나무>라는 컬러 애니메이션도 제작했습니다.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이전 작품들에 비해 월등한 색감을 자랑했습니다. 그 결과, <꽃과 나무>는 신설된 아카데미 시상식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작으로 결정됐습니다. 이후 디즈니는 이 부문에서 9년 연속 수상했습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1934년 디즈니는 좀더 큰 꿈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려고 한 것입니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우려를 표합니다. 언론은 ‘디즈니의 바보짓’(Disney's Folly)이라고 수근거렸습니다. 셀 애니메이션에는 수많은 인력과 자본이 투자됩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컸습니다. 아이들이 오랜 시간 화면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대였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는 모두가 우려를 표했던 바로 그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피노키오>(1940), <아기 코끼리 덤보>(1941), <밤비>(1942) 등이 줄줄이 제작됐습니다. 이제는 충분히 짐작 가시죠? 이 작품들은 모두 다 성공했습니다.

이 시기를 ‘디즈니의 황금기’라고 부릅니다. 디즈니가 직접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던 시기입니다. 이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두 번째 부흥기를 맞기까지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1989년 제작된 <인어공주>부터 연속으로 공개된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킹>의 시기가 ‘디즈니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입니다. 

(왼쪽 맨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잠자는 숲속의 공주>, <101마리의 달마시안>.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디즈니는 실사영화를 포함해 더 많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합니다.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 팬>(1953),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 <101마리의 달마시안>(1961) 등입니다.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

1955년, 디즈니의 일생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디즈니랜드를 개장했거든요. 디즈니는 딸과 함께 <라라랜드>에도 등장한 LA의 그리피스 공원에 갔다가 테마파크를 처음 구상했다고 합니다. 디즈니는 개장 연설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행복한 장소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디즈니랜드는 바로 여러분의 나라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곳에서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들이 되살아날 것이며,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도전과 미래에 대한 약속을 향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즈니랜드는 지금의 미국을 만들어낸 이상과 꿈, 그리고 힘겨운 현실들에 헌신을 바치는 곳입니다. (…) 이곳이 전 세계로 향하는 즐거움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월터 E. 디즈니, 1955년 7월 17일 4:43pm

월트 디즈니는 1966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도시전설 같은 루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시신이 냉동 보관중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시신이 디즈니랜드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내용입니다. 둘 다 사실과는 다릅니다. 디즈니는 화장한 후 LA 포레스트 론 묘지에 묻혔습니다.

1968년 발행된 월트 디즈니 우표.
애니메이션 감독, 제작자, 사업가로 월트 디즈니는 끊임없이 꿈을 꾸고 성공을 이뤄낸 사람입니다.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59번 후보로 지명됐고 22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3번의 아카데미 명예 공로상도 수상했습니다. 또 창의적인 제작자에게 수여하는 어빙 탈버그 상도 받았습니다.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IMDb를 보니 디즈니의 제작자 크레딧이 등록된 작품만 665편이네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디즈니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유명한 비정치적 공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아마도 미국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칭찬받은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디즈니 성공신화의 ‘어두운 뒷면’도 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보수적이라는 일반적인 평가’를 연상해보면 짐작이 됩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해피엔딩이죠. 주인공은 늘 백인이고요. 왕자가 등장해 여자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목에서는 여성 편견이 드러납니다.
<세이빙 MR. 뱅크스>. 월트 디즈니(왼쪽, 톰 행크스)와 <메리 포핀스> 원작자 P.L. 트레버스(엠마 톰슨).

실제로 디즈니가 직접 참여해서 제작한 초기의 애니메이션은 모두 해피엔딩이었습니다. 2014년, 메릴 스트립은 디즈니가 성차별주의자라고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톰 행크스가 월트 디즈니를 연기한 <세이빙 MR. 뱅크스>가 개봉할 때였습니다. 또 디즈니가 인종차별주의자라거나 반유대주의자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월트 디즈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이면서 탁월한 사업가이기도 한 월트 디즈니가 없었다면 곧 개봉할 <모아나>도 보지 못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미키 마우스가 발을 까딱거리는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급 마무리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디즈니는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는 골초였습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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