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들. 너들이 와 전쟁에서 지는 줄 아네? 너들이 와 도망치기 바쁜지 알아? 기건 와 싸우는지 모르기 때문이야. 이 전쟁, 일주일이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이 조국에 정말 필요한 건 너들이야. 고향에 가서 조용히 숨어있다가 전쟁이 끝나면 조국 재건에 나서라우.” 한국전쟁 개전 초기 의정부에서 수혁(고수)과 은표(신하균)가 속한 국군 소대와 싸워 이긴 인민군 현정윤 대위(류승룡)는, 확신에 찬 말투로 승리를 말하며 국군을 풀어준다. 그때부터 은표는 계속해서 그날의 만남을 곱씹었다. 대체 이 짓거리를 왜 하는 걸까. 얼굴에 여드름도 다 안 가신 열일곱살 소년까지 신병으로 전선에 끌어들이면서.

2011년 영화 <고지전>은 연출자 장훈 감독보다 각본가 박상연의 존재감이 더 강한 작품이다. 그가 원작 소설을 집필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처럼, 애록 고지를 두고 엎치락뒤치락 공방전을 벌이는 국군과 인민군은 벙커를 매개로 기묘한 연대감을 형성한다. 어차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빼앗기고 빼앗기를 반복해야 하는 고지, 짐을 바리바리 다 싸들고 후퇴하는 것보다는 숨겨두고 내려가는 게 낫겠다 싶어 급한 대로 벙커 안에 술이니 담배니 숨겨놓고 내려갔던 게 계기였다. 인민군을 밀어내고 애록 고지를 재탈환한 날, 다시 찾아간 벙커 안에는 숨겨 놨던 짐 대신 인민군이 남긴 쪽지가 있었다. “술 잘 마셨다. 양말 잘 신었다.” 분노한 국군이 쌍욕이 가득 담긴 답장을 남기고 퇴각했다가 다시 고지를 재탈환했을 때, 벙커 안에는 정종 한 병과 편지들이 국군을 맞이했다. 남쪽에 고향을 둔 인민군 병사들이 집으로 보내는 편지들이었다. 집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께, 대신 좀 부쳐 달라고.

그때부터 애록 고지의 국군과 인민군은, 전선에서 만나면 총을 겨누며 목숨을 앗아가지만 벙커를 통해서는 서로에게 필요한 물품과 편지를 주고받는 기묘한 연대를 이어간다. 서로 총질을 하는 사이라 해도, 따지고 보면 불과 8년 전만 해도 한 덩어리 땅에서 같은 식민치하를 살았던 동포 아닌가. 저 빨갱이 놈들한테도 집이 있고 엄마가 있겠지. 술도 마시고 웃기도 하겠지. 총질을 하다가 퇴각한 인민군이 술이니 성냥이니 묻어두고 가면, 그걸 받아서 쓰던 국군이 다시 화랑 담배를 묻어두고 퇴각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노래를 부르는 애록 고지의 청년들은 그렇게 이상한 날들을 산다. 벙커에 남겨둔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노래를 가르쳐줬던 학도병을, 벙커 밖에서 마주치면 저격총으로 쏘아 죽여야 하는 이상한 날들. 은표는 더 궁금해진다. 도대체 이 짓거리를 왜 계속하는 걸까. 전쟁을 왜 하는지 알고 있다던 현정윤 그 자식도 이 애록에 있다는데. 그놈을 만나면 그 잘난 면상에 대고 물어볼 수 있을까.

세상 대부분의 싸움이 그렇다. 처음 싸우기 시작할 때는 이유가 선명해 보인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한 북한도, ‘공산세력의 한반도 침탈을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이유로 응전에 나선 한국과 UN군도, 처음 출발할 때엔 분명 너무도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서른 번까지 세고” 그다음부터는 애록 고지의 주인이 몇 차례나 바뀌었는지 세는 걸 관뒀다는 수혁의 말처럼, 너무 오래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이유가 있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싸워야 해서 싸우는 지경에 이른다. 최전방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죽고, 팔다리를 잃고, 정신을 놓고 스러져가는데, 협정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포로교환 조건을 이유로 사인을 차일피일 미뤘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까지 영토를 한 뼘이라도 더 확보하겠다는 생각으로 주고받은 고지전에서, 왜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50만 명이 넘게 죽어갔다.

왜 싸우는지 알고 있다던 현정윤 대위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더 좋은 조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이념으로 출발한 사람도, 내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한 사람도, 결국 영토를 둘러싼 이권다툼으로 변질된 싸움 속에서 왜 싸우는지 이유를 잊었다. 애록에서 오래 싸우다가 그저 싸움 그 자체가 되어버린 현정윤은, 정전협정 발효 직전 벙커에서 은표와 마주친다. 그때 왜 싸우는지 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이유나 들어보자고 말하는 은표에게 현정윤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내래 확실히 알고 있었어. 긴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싸우는 이유를 잊은 채 싸움을 반복하다 살아남은 두 사람은, 정전협정 발효를 알리는 무전을 들으며 구토하듯 조소한다. 이제서야, 이유도 모르고 싸우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 죽고 나서야.

고증을 둘러싸고 <고지전>은 적잖은 비판을 받은 작품이다. 포항 철수작전은 <고지전>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성공적으로 이뤄진 작전이었고, 실제 전쟁 막판 최전방에서 국군을 상대했던 주력부대는 인민군이 아니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이었다. 정전협정 조인 직후 발효까지 지상군끼리 전투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크고 작은 디테일들을 묘사하며 생긴 그 수많은 오류를 지적했던 사람들도, 전쟁의 무의미함 앞에서 깊게 탄식하는 영화의 고갱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모두가 왜 싸우는지 이유를 잃고 괴물이 되어가다가 덧없이 죽어갔다는 비극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한국전쟁의 참혹함에 비할 바 없지만, 가끔 극단으로 갈려서 싸우는 이들을 볼 때면 난 <고지전>을 떠올리곤 한다. 특히나 선거철이 될 때면 사람들은 서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게 역겹다는 듯 목숨을 걸고 싸워 댄다. 좌와 우로, 여당과 야당으로, 수도권과 지방으로, 세대로, 젠더로, 학벌로, 계급으로, 고용 형태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우며 서로를 향한 혐오를 불태우는 저 수많은 이들은, 상대를 향한 절멸의 의지를 숨기지 않으며 모진 말을 탄환처럼 내뱉는다. 오프라인에선 옆집 이웃으로, 오촌 아저씨로, 중학교 동창으로, 직장 상사로 마주칠 사람들을 향해, 온라인에서는 누구보다 더 모욕적인 말들을 주고받는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순박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싸워야 하는 싸움이라면 응당 싸워야겠지. 그것도 잘 싸워야겠지. 그런데 지금 저렇게 서로를 향해 독설을 던지는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왜 싸우기 시작했는지 기억은 하고 있을까. 분명 과거엔 ‘내가 누구를 지지하는가’ 따위로 서로의 절멸을 기원하진 않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모욕하게 된 걸까. 어쩌다가 싸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것만 같을까.

선거의 계절, 나는 다시 현정윤의 대사를 곱씹는다.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왜 싸우는지 누구보다 확신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잊었노라는 그 대사. 난 가끔 그 대사가 지금의 우리 몫인 건 아닐까 두렵다. 만약 그런 거라면, 누가 이겨도 우리 모두 진 게 아닌가.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