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상상>은 긴 호흡의 작품을 주로 만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이례적으로 시도한 옴니버스 영화다. 영화는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은 서로 다른 배우들이 출연하는 독립된 이야기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드라이브 마이 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에서 채집한 몇 가지 이야기 조각을 느슨하게 환기하는 장편이라면, <우연과 상상>의 개별 이야기들은 하나의 세계로 연결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온다. ‘우연과 상상’이라는 제목은 세 편의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데 있어 길잡이가 된다. 영문 제목 'wheel of fortune and fantasy'는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라는 타로 이름을 연상시킨다. 이를 힌트 삼아 셋으로 나뉜 이야기를 세 장의 타로라 상상해볼 수 있다. 타로에서 의뢰인이 뽑은 세 장의 카드는 뽑힌 순서대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준다고 해석된다. 세 가지 이야기는 누군가의 과거에 대한 미련과 현재 마주한 곤란함, 미래에 맞게 될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알려주는 것일까.

각각의 이야기는 이렇다. 첫 번째 이야기,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퇴근길 두 친구가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출발한다. 츠구미(현리)는 최근에 만난 한 남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와 이야기할 때 서로의 내밀한 곳을 만지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잘 통했지만, 관계에 신중하게 된 것은 남자가 전 여자친구와의 관계로 인한 상처를 고백했기 때문이다. 츠구미는 다음 만남에도 마법 같은 느낌이 지속될지 두려워하면서도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츠구미가 먼저 내린 뒤 홀로 남은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기사에게 돌연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달라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과 함께 이야기도 예상치 못한 지점을 향해간다.

‘문은 열어 둔 채로’라는 제목의 두 번째 이야기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익숙한 워크숍 장면으로 시작한다. 학생들이 일제히 교실 복도 쪽 창문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짝지어 토론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장면의 중심이 그토록 쉽게 이동할 거라고 예상할 수 없다. 갑자기 바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외침이 들려오면서 모든 시선은 외부로 향한다. 맞은편에서 학생사사키(카이 쇼마)가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 앞에 꿇어 엎드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읍소하는 광경이 보인다. 교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두기를 고집할 뿐이다. 그로부터 5개월 후 사사키는 세가와의 문학상 수상 소식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접한다. 함께 있던 섹스파트너이자 동문 나오(모리 카츠키)가 세가와의 팬임을 밝히자, 사사키는 즉흥적으로 교수를 곤궁에 빠뜨릴 간계를 떠올린다.

3부 ‘다시 한번’에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한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역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던 중 마주 내려오는 사람을 보고는 흠칫 놀란다. 그는 서로 사랑했던 친구 유키(카와이 아오바)다. 황급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이번에는 친구가 올라오는 중이다. 그렇게 몇 번의 엇갈림 뒤에 둘은 다시 만난다. 나츠코는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유키는 무뚝뚝한 오타쿠 아들을 둔 주부가 되어있다. 한때 서로 사랑했던 친구가 서로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회한을 나누는 익숙한 상황은 유키의 말 한마디에 황급히 전환을 맞는다.

세 편의 이야기에서 중심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다. 감독이 직접 영향 관계를 공언했으니, 에릭 로메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로메르 영화가 말의 영화로 불리며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영화 속 대화와 상황이 무척이나 유머러스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미끄러지더라도 결국은 더 좋은 쪽에 도착해있으리라는 믿음을 지켜내기 때문이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대화의 흐름과 좋은 기운들이 <우연과 상상>에도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간과할 수 없는 차이 역시 존재한다. 잠정적으로 말해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는 현재를 침입해 들어오는 유령과도 같은 과거가 잠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서늘함이 나온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대화 도중의 정면숏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일상적인 대화 시퀀스 가운데 인물의 정면숏이 불쑥 등장할 때의 도무지 교차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시선과 이에 의해 생성되는 기묘한 공간을 논한 바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에서 정면숏은 오즈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말의 대화가 아닌 침묵의 대화를 위해 쓰인다. 10여 명의 사람이 나누는 단체 대화 장면 도중 A와 B가 각각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숏이 연속해서 배치될 때 그것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비밀을 예고했다. <우연과 상상>은 대화 도중 두 사람을 분리해서 촬영하는 것만으로 동상이몽을 표시한다. 1부에서 메이코와 츠구미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아 대화한다. 두 사람 사이로 보이는 창밖 거리 풍경은 둘의 간격을 과장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덧붙여 카메라가 한 인물씩 나누어 클로즈업할 때, 거기에 유령과도 같은 누군가가 개입하고 있음을 누설한다. 반면 2부에서 관객은 그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령과도 같은 인물이 누구인지를 이미 아는 상태다. 정면숏은 이러한 비밀을 무력화시키며 새로운 마주침을 통해 다른 비밀이 창출되었음을 보여준다.

잠복한 것은 이제 서사적 흐름 속 제삼자가 아니라 각자의 심리 안에 자리한 분열이다. 1부에서 메이코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스른 뒤, 되찾는다. 되찾은 것은 원래의 것과 같지 않다. 2부에서 나오는 자신의 진심을 연기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는다. 거기에서 서스펜스가 나온다. 3부는 보다 긍정적인 방식으로 인물들의 분화와 연결의 동시성을 표시한다. 두 사람 각각 분화되는 동시에, 무한히 증폭될 가능성을 내재한 관계의 연결고리가 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를 느슨하게 연상시키는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누구이고,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며 불확정성과 미완의 상태에 도달하는데, 그것이 바로 두 사람의 만남이 그토록 감동적인 이유다.

인물들이 대화하는 현재는 유령과도 같은 과거를 연이어 불러낸다. 이때 과거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 인물의 선택과 반응 속에서 전혀 다른 상태로 변한다. 메이코가 택시의 방향을 되돌릴 때, 사사키를 피하고 외면하던 나오가 다시 그에게 다가갈 때, 두 친구가 번갈아 가며 상대방을 향해 달려갈 때, 이들의 행위는 완료되고 바꿀 수 없는 시간을 재생하는 단순하지만 큰 방향 전환의 힘을 보여준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고 손을 맞잡을 때, 그 작고 굳센 움직임이 품은 온기를 다시 힘껏 믿고 싶어진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