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거짓말을 하고는 그걸 믿는 상태를 일컫는 '리플리 증후군'은 사실 '결정장애', '허언증' 같은 말과 결이 비슷하다. 듣고 보면 실제로 존재하는 질병 이름일 것 같지만, 사실 이에 대한 의학적 합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신조어라는 점에서 말이다.

미디어가 다루는 리플리 증후군은 본래의 뜻과는 다소 멀어진 모습이다. 상술했듯 이는 거짓말을 한 사람이 들키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그걸 믿어버릴 때 성립한다. 사는 곳은 현실인데, 머릿 속은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꽉 찬 것이다. 그러나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보통 리플리 증후군은 거짓말로 거짓말을 덮는 연쇄적 상황을 단순 묘사할 때 사용된다.

쿠팡플레이 <안나>

쿠팡플레이 <안나>에서는 '사기꾼'과 '리플리 증후군'을 분리해야 할 당위가 발견된다. 주인공 이유미(수지)는 사소한 거짓말을 발단으로 타인의 삶을 살게 된다. 대부분이 그렇듯 그의 거짓말 역시 순간의 자존심, 별 것 아닌 욕망, 작은 잘못의 은폐를 위해 내뱉어진다. 그 거짓말을 가리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는 과정 끝에 완성된 건 '이안나'라는 정체성이다. 안나는 유미가 다니던 갤러리의 주인이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현주(정은채)의 영어 이름이다.

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은 새로운 인물이 됐지만, '두 번째' 안나는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불안하다. 하지만 '리플리들'에게 불안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세계는 진짜이기 때문이다.

유미 혹은 안나의 불안은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정서다. 리플리 증후군이나, 거짓 자아로 타인의 돈을 뜯는 사기꾼이 나오는 이야기들과의 결정적 차이이기도 하다. 그런 작품들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거짓말을 오락적으로 그린다면 유미의 거짓말은 오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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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는 가난하지만 떼를 쓰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해 줬던 부모의 노력 속에 컸다. 세상 물정을 자세히는 모른 채 자란 유미는 예쁘고, 공부도 곧잘 하고, 예술적 재능도 있고, 자존심까지 강했다. 그러나 동네 작은 의상실 딸인 고등학생 유미의 "난 하고 싶은 건 다 해요"라는 한 마디는 욕망의 범위가 가난한 부모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는 있을 만큼 좁았다는 반증이다.

부러움과 시기를 적당히 겪던 유미는 다니던 학교의 교사와 사귀다가 들킨다. 그리고 처음으로 거짓말 탓에 인생이 흔들리는, 부모 울타리 밖의 세상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집 밖의 세상에서 유미의 자존심은 근거가 부족했다. 여전히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을 것이란 유미의 믿음조차 근거는 없었다. 떨어진 대학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등록금으로 재수 학원에 등록하고, 매달 하숙비를 타 쓴 건 그 믿음 때문이었다.

자존심을 지켜 주던 작은 거짓말들은 가짜 대학생 유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2화까지 그의 거짓말은 늘 물정 모르는 아이가 순간적 충동으로 뱉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부러움을 사기 위해 철저히 계획된 거짓말의 연쇄가 아니다. 올 초 공개된 넷플릭스 <애나 만들기>의 애나(줄리아 가너)와 안나는 공교롭게 이름도, 사기꾼이란 점도 같다. 하지만 애나가 타인의 신뢰를 얻고 대접을 받기 위해 자신을 꾸민 것과 달리 안나는 찰나의 생존, 순간의 자존심을 위해 거짓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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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울타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유미는 차마 거짓을 떠올리기도 힘든 현실로 내던져 진다. 보잘 것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다간 당장 굶을 판이다. 고졸도 채용하는 갤러리에 취직해 만난 상사 현주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가진 것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현주의 심부름을 하던 나날이 계속되던 중 애써 억눌렀던 유미의 자존심이 깨어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사건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유미는 얼마간의 돈과 현주의 인생 일부를 훔쳐 갤러리를 뛰쳐 나간다.

유미가 마지막으로 갤러리에서 바라본 바깥은 큼직한 눈발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통창의 안쪽에선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였지만, 도망쳐 나간 밖에선 낡은 구두에 닿은 눈들이 본래의 색을 잃은 채 진창으로 변해 들러 붙었다. 이제 유미에게 세상은 눈 같은 것이었다.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내가 발을 디딜 땐 그렇지 못한 것.

유미가 무작정 들고 나온 현주의 신상을 처음부터 쓰고자 했던 건 아니다. 그의 거짓이 다시 시작된 시점은 '가짜 대학생 유미'의 근원과도 같은 지원(박예영)과의 재회였다. 여전히 그 때의 유미를 기억하는 지원 덕에 유미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가 아닌,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기로 했다. 쓰레기통에 버린 현주의 여권을 주워든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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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속 안나라는 이름을 쓰기로 결심한 후 유미의 거짓에도 어느 정도 계획이 생겼다. 영어를 배우고, 미학을 독학하고, 미술 입시 컨설턴트들과 거짓 상담을 해서 노하우를 배우는 식이다. 성과가 나오니 예상치 못한 정보와 인맥들이 '안나'를 향해 손짓했다. 안나가 미술 강사를 거쳐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 그가 예상한 '행운'은 없었다. 단지 예상할 수 있던 건 '기회' 뿐이다. 그렇게 유미의 흰 눈 같던 세상에 안나의 발자국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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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새로운 기회를 만날 때마다 유미의 표정을 하곤 했다. 그건 조금씩 세상과 접하며 욕망의 범위를 확장하는 아이의 불안한 사회화 과정과도 비슷해 보였다. 잘 나가는 IT 벤처기업 대표 지훈(김준한)과의 결혼도 안나에겐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부부가 된 지훈과 함께 행진하는 안나의 결혼식 장엔 눈을 닮은 종이꽃비가 내렸다. 그 옆으론 식장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예쁜 설원이 펼쳐졌다. 밖으로 나가면 안나가 모르던 또 다른 진창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오는 불안이야말로 <안나>가 다른 사기극이나 리플리 증후군을 다룬 작품과 결을 달리 하는 근본적 이유임이 분명하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