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온 배우 이정재의 <헌트>가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1999년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에 ‘청담 부부’ 정우성과 이정재가 함께 출연하는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난 이정재의 첫 감독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제5공화국을 배경으로 조직 내의 스파이 ‘동림’을 색출하기 위한 두 남자의 냉혈한 권력 다툼을 다룬 <헌트>는 감독 이정재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재의 <헌트> 이전에 메가폰을 잡은 국내외 명배우들의 데뷔작들은 어땠을까?
<미성년> - 김윤석이 다시 쓰는 김윤석 설명서
이정재가 <관상>의 수양대군으로 분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가 스크린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그가 가진 아우라에 짓눌려 숨죽였다. 그런 이정재만큼이나 영화에서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배우를 꼽자면 단연 김윤석이다. <타짜>의 아귀, <도둑들>의 마카오 박, <1987>의 박 처장이나 <추격자>의 형사 엄중호. 배우 김윤석의 필모그래피는 특유의 형언할 수 없는 무게감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거칠고 남성적인 인물로 가득하다. 그런 그가 메가폰을 잡는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대다수 대중은 그가 누아르나 범죄물 같은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작품을 맡지 않을까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김윤석의 2019년도 감독 데뷔작 <미성년>은 그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의 대척점에 놓여 있었다.
한 가장의 외도로부터 비롯된 두 가정의 혼돈을 그리는 <미성년>은 단순한 치정극이나 불륜으로부터 시작되는 가정의 붕괴를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미성년>은 모든 문제의 원흉이 되는 아버지 ‘대원’을 둘러싼 네 여성의 감정과 이들 간의 복잡한 심리적 관계를 균형감 있게 그려낸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감독’ 김윤석은 ‘배우’ 김윤석에게 자신을 낮출 것을 주문한다는 점이다. 다른 감독이 그려낸 ‘배우’ 김윤석은 강한 카리스마와 남성성의 대명사였다면, 그가 <미성년>에서 분한 ‘대원’은 한없이 궁상맞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모든 문제의 원흉일 뿐이다. 덕분에 <미성년>은 골칫거리인 ‘대원’에게 집중하기보단 그가 저지른 일들이 어떻게 네 여성의 삶에 큰 여파를 끼쳤는가에 대하여 집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감독’ 김윤석이 그려낸 데뷔작 <미성년>은 ‘배우’ 김윤석을 어떻게 새롭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설명서이자, 그가 이전의 자신이 그려온 캐릭터에 대한 일종의 참회록일지 모른다.
<여배우는 오늘도> - 문소리의 위트와 처연한 현실
김윤석의 <미성년>이 자신의 이전 배우 생활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면, 문소리의 2017년도 장편 데뷔작 <여배우는 오늘도>는 그녀가 여태껏 살아왔던 ‘여성 배우’의 사회적 지위와 삶은 스크린 밖에서 어떠한지를 그려낸다. 배우 문소리의 뛰어난 커리어는 많은 영화팬들이 익히 알고 있다. 그녀는 이창동 감독과 2002년 <오아시스>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 신인 배우상을 받았고, 이후 홍상수 감독과의 협업을 힘입어 2016년 베니스 영화제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 이야기는 그녀의 영화 속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하지만,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거머쥔 명배우라는 타이틀이 잘 어울리는 그녀의 빛나는 커리어와 달리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감독 문소리가 그리는 배우 문소리는 처절하다.
장난하냐? 문소리가 뭘 아무것도 안 찍어. 뭐 찍고 있어?
홍상수? 이창동? 베니스 상도 받았잖아.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3막 속 정락의 대사
총 3막으로 나눠진 영화는 시종일관 ‘여’배우 문소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1막에 등장한 등산객 남성들의 무례한 발언과 무리한 합석 요구, 2막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무리한 세상의 요구들, 3막의 자신을 쫓아 다녔던 무명 배우 ‘정락’의 술주정. 문소리가 그려내는 ‘여배우의 삶’은 화려한 커리어나, 치열한 백스테이지의 모습이 아닌 구조적으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처연함이다. 다만, 그녀는 이를 특유의 위트를 곁들이며 보다 친숙하게 관객들에게 다가가려 한다. 이 영화의 3막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을 직접 확인해 본다면, 그녀가 왜 그토록 애달픈 여배우의 삶에 위트를 한 스푼 얹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로스트 도터> - 젊은 날의 나와 네가 너무 닮아서
문소리와도 연관이 매우 깊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전년도 배우 출신 감독의 데뷔작이 각본상을 받으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녀의 이름은 매기 질렌할. 아마 할리우드 스타인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로 더 많이 알려져 있겠지만, 사실 그녀 역시도 동생 못지않게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명배우다. <다크나이트>의 레이첼이나 <프랭크>의 클라라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는 영화를 떠올린다면 절로 기억이 날 것이다. 배우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매기 질렌할의 데뷔작 <로스트 도터>는 그녀가 직접 각색과 연출 모두 소화하면서 화제를 모았는데, 최근 7월 국내에서도 개봉하며국내 관객과도 만났다.
<로스트 도터>의 플롯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리스에 휴가를 온 교수 ‘레다 (올리비아 콜맨 분)’은 딸을 가진 젊은 여성 ‘니나 (다코타 존슨 분)’을 보고 이따금 묘한 감정을 갖는다. 어느 날, 니나의 딸이 실수로 인형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레다는 니나를 보며 계속 과거를 떠올릴 뿐이다. 이 단순한 이야기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모성이라는 애증의 관계다. 자꾸만 잃어가는 나를 보며 자녀를 원망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녀에게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복합적인 감정. 휴양지에서 만난 니나에게서 레다는 젊은 날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신이 방치한 딸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처럼 뒤섞인 과거에 대한 회상은, 딸과 어머니는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닌 시간의 수직선 위에 있는 여성의 일대기임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녀가 연기했던 다양한 층위의 캐릭터만큼이나, 복합적인 그녀의 시선을 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로스트 도터>를 관람하는 것은 어떨까.
<레이디 버드> - 연대와 회고라는 이름의 성장
솔직히 말하자면 이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배우 겸 감독은 단연 그레타 거윅이 아닐까? 2019년 <작은 아씨들>의 상업적, 예술적 성공은 그녀가 얼마나 할리우드에서 핫한 감독인지를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마고 로비와 라이언 고슬링을 앞세운 <바비>라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감독으로서의 그레타 거윅의 커리어는 연착륙을 넘어서 고공비행을 앞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장편 데뷔작 <레이디 버드>를 보았을 때, 이미 그녀의 성공을 예견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얼핏 보면 <레이디 버드>는 소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전형적인 성장 영화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장르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크리스틴’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크라멘토에 남기려 하는 어머니를 혐오하고, 쿨하지 않은 자신의 옛 친구들을 떠나려 하며, 그런 자신을 새로운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부르려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그 이름처럼 둥지에서 벗어나 완벽히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었을까? <레이디 버드>는 알에서 깨어나 날아가는 청춘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둥지에서 떨어져 나온 후에야 그곳이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바보같이 작은 나의 집도, 시시해 보이는 내 학교도, 사사건건 나를 막아서는 내 어머니도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그것이 나를 이루고 있다는 깨달음.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는 통상적인 성장영화가 집중하는 도약과 탈피가 아닌, 연대와 회고가 성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녀가 연출할 <바비>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최현수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