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이라면 어디서든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걸까. 보통 자국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인지도가 있거나 극찬을 받은 것들은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이나 문화권에서 영화화가 되곤 한다. 이번에 개봉한 <불릿 트레인>도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 유독 인상적이다. 이처럼 원산지(?)와 제조국(!)이 다른 사례의 영화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불릿 트레인

일본 이사카 코타로 「마리아비틀」-> 데이빗 레이치

「마리아비틀」(왼쪽), <불릿 트레인>

<불릿 트레인>의 제작을 처음 발표했을 때, 여러 가지가 기대 포인트로 뽑혔다. 브래드 피트가 꽤 오랜 만에 액션영화 주연으로 나선 거였고, 그것도 감독이 데이빗 레이치(<존 윅>, <아토믹 블론드>)였으니까. 그러다 이런 점을 넘어 가장 궁금증을 자극한 건 원작 소설의 존재였다. 이 할리우드 영화가 선택한 건 일본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마리아비틀」이었다. 일본의 고속 철도 '신칸센' 내부에서 각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맞붙은 킬러들의 이야기는 속도감과 액션, 캐릭터성을 모두 잡기에 적합해보였다. 배우들까지 모두 동양인을 할 수는 없으니 캐릭터 설정은 수정을 거쳤지만 '신칸센에서 벌어지는 킬러들의 싸움'이란 콘셉트는 영화에 고스란히 남았다. 참고로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중 영화화된 작품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 영화화한 <골든 슬럼버>도 그의 작품이다.

일본 현지에선 「마리아비틀」을 무대로 각색하기도.


사일런스

일본 엔도 슈사쿠 「침묵」 -> 마틴 스콜세지

「침묵」(왼쪽), <사일런스>

바다 건너 왔지만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영화로 재탄생한 작품도 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일본으로 선교하러 떠났다가 연락이 끊긴 신부를 찾아나선 두 신부의 발자취를 따른다. 아직은 서양의 종교가 배척당하는 17세기 중엽, 외국인 신부가 보는 일본의 모습을 2017년 마틴 스콜세지의 손에서 영화로 승화됐다. 테마가 가톨릭이고,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돋보이는 작품인 만큼 가톨릭 신자이자 (영화 속 신부처럼) 외국인으로 보는 일본의 풍경이 상당히 잘 살아있는 영화로 완성됐다. 물론 주제가 주제라서 흥행도 실패하고, 마틴 스콜세지 명성에 비하면 그렇게 인지도가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스콜세지가 소설을 접하고부터 쭉 영화화를 꿈꿨던 프로젝트였으니 거장의 소원성취로서 가치가 있는 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아야와 마녀

영국 다이애나 윈 존스 -> 일본 지브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개성적인) 표지들과 지브리 애니메이션(오른쪽 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이웃집 토토로>가 대표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본이란 간판 때문일까. 지브리 스튜디오는 여러 작품에서 서양을 배경 삼아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동양적인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양 작가에 대한 애착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는데, 아마 다이애나 윈 존스가 지브리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 2004년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애니메이션화하더니, 2020년에 「이어위그와 마녀」를 원작으로 <아야와 마녀>를 완성시켰다. 두 작품은 지브리의 작품 중에서 그렇게 고평가받는 편은 아니지만, 다이애나 윈 존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호평했다고 한다. 2011년에 세상을 떠나서 <아야와 마녀>는 못 봤지만.

「이어위그와 마녀」 표지와 <아야와 마녀>(오른쪽)


알리타: 배틀 엔젤

일본 키시로 유키토 「총몽」 -> 제임스 카메론

「총몽」 (왼쪽), <알리타: 배틀 엔젤>

9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본의 문화 영향력은 상당했다. 옆동네인 우리나라는 양국의 역사와 정서 차이로 일본 문화를 암암리에 묻어두곤 했지만, 정작 바다 건너 미국에선 '와패니즈'(이른바 일뽕)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일본 문화에 심취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그런 문화 교류 가운데 한 만화에 빠져 10여 년을 '존버'한 감독이 있었으니 제임스 카메론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키시로 유키토의 SF만화 「총몽」의 열혈 팬이었고 2000년부터 영화의 실사화에 매진했다. 물론 세상사 뜻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 제 아무리 제임스 카메론이어도 이런 스케일 큰 SF가 쉽게 제작될 리 없었고, 「총몽」 영화화는 꿈에서나 이뤄질 법한 일처럼 여겨졌다. <아바타>로 대박을 터뜨린 제임스 카메론은 「총몽」 영화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지만, <아바타> 5부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우연히 만난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영화화에 대해 묻자 그동안 자신이 준비했던 자료들을 모두 건네주고 '직접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감독직에서 제작자로 물러난 제임스 카메론과 이런 장르물에 일가견 있는 로버트 로버리게즈가 뭉쳐 마침내 2019년 <알리타: 배틀 엔젤>로 영화화가 일단락됐다. 원작급의 어두컴컴한 세계나 두 감독의 이름값을 기대한 이들에겐 실망이긴 했지만 그래도 만화 원작 영화치고는 시원한 액션과 훌륭한 CG로 꽤 사랑받았다.

<총몽>비디오 애니메이션판(OVA)가 북미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고.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프랑스 기욤 뮈소 -> 홍지영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왼쪽),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국내에도 개정본이 나올 만큼 인기가 있다.

어떤 분야를 좋아하지 않아도 한 번쯤 듣게 되는 이름이 있는데, 문학에서는 기욤 뮈소가 그런 위치에 있지 않나 싶다. 로맨스 소설을 미스터리와 엮어 맛깔나게 쓰는 작가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기 때문. 특히 그의 작품 중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한국 영화계에서 영화화돼 관객들을 만났다. 한 남자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10개의 알약을 얻게 돼 과거의 연인을 구하고자 돌아가는 이야기 골자는 동일하지만,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 대신 1980년대 한국으로 배경을 옮겨왔다. 원작과는 거의 동일한데, 한국 배경으로 가져오면서 한국 관객들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디테일이 추가됐다. 주인공 수현은 김윤석과 변요한이 맡았는데, 기욤 뮈소가 <추격작>을 봤기 때문에 김윤석 캐스팅을 무척 반겼다고.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프랑스 피에르 쇼데를로 드라클로 「위험한 관계」 -> 이재용

「위험한 관계」(왼쪽),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이 분야 탑 오브 탑이라면 「위험한 관계」이지 않을까.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1796년 집필한 이 소설은 21세기에도 꾸준히 회자되고 다른 매체로 옮겨졌다. 천하의 귀족들도 욕망에 휘둘리며 사랑에 울고 웃는 모습은 때로는 로맨틱하게, 때로는 아이러니하게 대중들을 만나왔다. 이재용 감독이 이 중세 귀족사회의 이야기를 조선시대로 옮긴 2003년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위험한 관계」에서 특히 아련함을 부각시켰다. 물론 기본 바탕이 뇌쇄적인 유혹과 어찌보면 천박한 내기인 건 마찬가지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각본진(이재용, 김대우, 김현정)의 탁월한 각색으로 상당히 성공적인 각색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