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에 <두 인생을 살아봐>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이제 임신과 출산은 온전히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때문에 그 모든 과정에서 여성의 선택이 최우선임은 상식의 영역에 접어든 지 오래다. 그럼에도 아직 임신과 출산이 여성에게 모종의 포기를 강요한다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영화 <두 인생을 살아봐>가 임신이라는 사건을 두고 두 갈래로 나뉘는 한 여자의 인생을 명백한 '희망편'으로 그린다는 사실이다.
"준비 됐어?"라는 3번의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대학 졸업반 나탈리(릴리 라인하트)가 분위기에 취해 친구 게이브(대니 라미레스)와 보낸 하룻밤으로 이어진다. 나탈리가 게이브를 완전히 연애 상대로 본 적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향후 5개년 계획을 충실히 짜 놓은 나탈리에게 게이브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지금 이 순간'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계획에 실패하는 건 실패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잠언처럼 여기는 나탈리는 미래로 향하려는 사람이었고, 역사를 전공했지만 무명 밴드의 드러머 신분이 더 좋은 게이브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었다.
그저 '순간'으로 넘긴 원나잇 이후, 나탈리는 졸업 파티에서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절친 카라(아이샤 디)가 가져온 임신 테스트기를 해 본 그날 밤의 파티장 화장실에서 나탈리의 삶은 두 개의 평행 현실로 분리된다. 게이브의 아이를 가진 나탈리와, 임신이 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할리우드로 떠난 나탈리의 모습은 어떻게 달랐을까?
임신한 나탈리는 이 사실을 곧장 게이브에게 알리고, 아이를 낳겠다고 말한다. 게이브는 모든 임신 과정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나탈리의 부모님을 찾아 간다. 하지만 할리우드 입성만을 그리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딸이 애인도 아닌 남자의 아이를 덜컥 임신했다는 말이 달가울 부모는 없을 테다. '역사학과를 나왔지만 세탁소에서 돈을 버는 뮤지션'이라는 게이브의 자기소개에 나탈리의 엄마는 "뮤지션이 아니라 그냥 드라이클리닝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현실이다.
이미 LA에 카라와 함께 살 집까지 구해 놓았던 나탈리는 졸지에 싱글이자 무직에 22살 엄마의 삶을 살게 된다. 그 와중에 게이브는 즉석 청혼까지 하지만 혹시 모를 관계 변화를 감당할 수 없던 나탈리는 이를 거절한다. 그의 5년 후 미래는 유명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역대급 직원'일 줄 알았지만, 임신은 나탈리를 무섭도록 '지금 당장'이라는 순간으로 빨아 들인다. 카라가 LA에서 광고회사 커리어 우먼의 삶을 만끽하는 걸 인스타그램으로 확인하며 마주한 나탈리는 그림 그리기는 커녕 유축기에 가슴을 내맡긴 채 널을 뛰는 호르몬 변화를 버티는 모습이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계획할 수도 없었던 현재였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을 애도하며 시간을 보내던 나탈리는 게이브의 두 번째 청혼을 거절하며 줄곧 그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임신 탓에 여태 세웠던 미래 계획이 전부 무산된 나탈리는 게이브와 지금의 '공동 부모' 관계를 발전시킨 그 다음이 두렵다. 그는 게이브가 약혼자를 만들고 자신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자 충격을 받는다. 갑자기 닥친 삶이 버거워 잠시 미래를 현재로 유예했다 생각했지만, 정작 그의 현재는 주변에 기대 있을 뿐 온전히 홀로 서 있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한편 임신 테스트기 결과 음성을 확인한 나탈리는 계획대로 카라와 LA로 간다. 이미 광고회사에 취직한 카라와는 달리 좀처럼 할리우드에 터를 잡기 힘든 '취준생' 신세다. 결국 그가 주기적으로 세웠던 5개년 계획은 임신이라는 일대 사건 없이도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탈리에겐 인턴십, 멘토십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을 두른 무급 노동 일자리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애니메이션계의 거물 루시 갤러웨이(니아롱)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 모집 공고가 올라오고, 용기를 내 지원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탈리는 직접 루시 갤러웨이의 행사장을 찾아 눈도장이라도 찍으려 했지만, 초대 리스트가 있어 진입조차 만만치 않았다. 행사장 밖 바에서 만난 남자 제이크(데이빗 코렌스웻)의 조언으로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성공하지만, 막상 루시 갤러웨이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 가서 이력서나 더 쓰려고 돌아선 며칠 뒤, 루시 갤러웨이 스튜디오에서 연락이 와 면접을 보러 갔다가 거기서 일하고 있는 제이크와 마주친다.
제이크의 조언 덕에 면접에 합격한 나탈리는 모든 비경력 인턴들이 그렇듯 커피 타기 같은 잡일들로 일과를 채운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똑같이 머릿속이 미래와 계획들로 가득한 제이크와 연인으로 발전한다. 원래 프로듀서를 꿈꿨던 제이크는 나탈리와 함께 살 집을 알아보던 중 갑자기 이직을 하고, 두 사람은 영상통화도 좀처럼 힘든 원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영화가 보여 주는 '두 개의 삶'은 22세 나탈리의 임신 여부를 분수령으로 한다. 분명 완전히 다른 과정과 결과를 상상했을 관객들에게 <두 인생을 살아봐>는 의외의 답을 던진다. 그건 여전히 선택의 연속인 삶을 오롯이 홀로 견디지 못했을 때, 괴로움이 닥치는 것은 늘 똑같다는 일갈이다. 미래 계획에 없던 임신과 출산은 나탈리가 자신이 아닌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지만, 취준생 대신 엄마로 산 그의 삶이 불행한 건 아니었다. '원치 않은 임신'을 다룬 콘텐츠는 대개 여성이 임신으로 빼앗기는 것들에 주목하지만, <두 인생을 살아봐>는 여성의 재생산권 행사가 자유롭고 임신부 곁에 잘 교육된 사람, 특히 남자가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생긴 아이를 낳는 행위는 선택이다. 영화는 여성에게 이를 '착한 선택'이거나 '나쁜 선택'일 수 있다는 양비론 형태로 제시하지 않고, '그냥 선택'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두 인생을 살아봐>의 임신은 나탈리에게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저 선택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현실에 갖춰지지 않은 상황을 배경으로 둔 탓에 이야기는 지나치게 행복하다. 먼저 나탈리의 임신 소식을 들은 게이즈의 태도가 그렇다. 그저 친구였던 나탈리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일말의 고민 없이 모든 걸 책임지겠다며 나탈리의 집으로 들어가 육아와 돈벌이에 매진한다. 엄마가 된 후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는 나탈리에게 "너 혼자서 작은 인간을 살리고 있어"라고 하는 게이즈의 위로는 유니콘 그 자체다. 또 딸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부유한 부모의 재력이 없었다면 나탈리와 게이즈가 그토록 편한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임신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림을 몇 년 동안 소홀히 해도 막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영화제에 초청받는 나탈리의 신들린 손 역시 마찬가지다. 임신과 비임신 상태에 겪는 삶의 무게추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심리적 불안감 이외 진짜 임신과 출산의 현실은 제거한 모양새다. 로맨틱 코미디의 가벼운 유쾌함과 여성의 재생산권 이슈의 무거운 인식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는 영화지만, 바꿔 말하면 그 양극의 생각을 한곳에 확실히 녹여내지 못한 어중간함이 남는 작품이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