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2021)는 성공적인 작품인가? 쉽게 말하기 어렵다. 신화화 돼있던 전태일 열사의 인간적인 면모에 주목함으로써 전태일을 오늘날의 관객과 만나게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제작된 작품이지만, 미안하게도 그 목표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애초에 도달하기 힘든 목표이긴 했을 것이다. 열사가 남기고 간 기록과 살고 간 삶이 ‘평범한 청년’이라 말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숭고미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패션산업의 최첨단에서 노동하며 멋있는 옷으로 자신을 꾸미던 20대 청년의 면모가 더 부각되었다면 어땠을까. 노동환경을 현장에서 개선하려는 노력만 했던 게 아니라, 자신이 창업주가 되어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업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도 가지고 있었던 개척자의 면모도 조명되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99분짜리 애니메이션에 그 모든 걸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을 안다. 그런 소소한 면모를 함께 담기에는 열사가 살고 간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이 너무 찬란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개봉 당시엔 아쉬움을 안고도 말을 아꼈다.
물론 러닝타임 하나만 가지고 아쉬움을 삼킨 건 아니다. <태일이>는 관객의 탄식을 자아내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사업주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가지고 임금을 적게 지급하면, 재단사는 다시 그 임금을 쪼개서 미싱사들에게 월급을 나누어 준다. 대폭 줄어든 월급을 받은 미싱사들은, 다시 거기에서 얼마간 쪼개어 시다들의 월급을 준다. 형편 없이 줄어든 월급을 받아 든 시다는 미싱사에게 따지지만, 미싱사도 월세 내고 교통비 떼고 집에 보내야 하는 돈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왜 나에게 따져 묻느냐고, 월급이 줄어든 건 재단사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항변해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제 월급은 언니가 주는 거잖아요”다. 같은 공장의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조수임에도, 형식상 본인이 월급을 줘야 하는 상황이기에 월급날이면 노동자들끼리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 <태일이>는 전태일이 분노했던 평화시장 피복공장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관객들을 설득해낸다.
어린 시다에게 월급을 적게 떼어주고는 기싸움을 하던 미싱사 영미(정예진)라고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다 무너져가는 판자촌에서 부양해야 할 동생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영미도, 환기 시설 하나 없어 섬유먼지가 자욱한 공장을 간신히 참고 일하는 처지인 건 매한가지다. 그래도 참고 일하는 거지 어쩌겠나 하며 자신을 다독이던 영미는, 끝내 근무 중 피를 토한다. 사장(권해효)은 폐병을 숨기고 일한 것이 괘씸하다며 영미를 해고하고, 이 모든 게 사장님 공장에서 섬유먼지 마시며 일하다가 생긴 병 때문 아니냐고 묻는 태일(장동윤)은 사장의 핀잔을 듣는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여기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사람 전부 다 폐병에 걸려야 한다고. 아니지 않느냐고. 영미가 쓰러진 자리 옆에, 다른 미싱사들은 여전히 태일이 재단한 천 조각들을 이어 옷을 만든다. 기일 내에 물량은 맞춰야 하고 그래야 월급이 나오니까. 태일은 이런 구조를 참을 수 없다. 시다들에게 풀빵 몇 개 사주고 청소 대신 해주는 것으로 어른의 일을 했다고 믿었던 태일은, 그때부터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내가 <태일이>에 대한 아쉬움을 굳이 이야기 안 했던 건 이 때문이었다. 어느덧 ‘노동운동’이나 ‘열사’라는 말이 너무 낡게 들리는 시대, 그 단어를 낯설어 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태일이>는 말한다. 그건 그렇게 어렵고 무서운 이야기도 낡은 이야기도 아니라고, 언제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냥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는 운동이라고. 그 쉽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도저히 안 들어주는 세상, 한사코 틀어 막아보려는 자본의 벽을 넘어보려다가, 더는 도리가 없어서 누군가는 몸에 불을 지르고 누군가는 뛰어 내렸을 뿐이라고. <태일이>를 통해 전태일의 삶을 처음 접하는 젊은 관객들도 많다는 이야기에 나는 더더욱 말을 아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태일이>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건 1970년 11월 13일이었다. 벌써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5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전태일이 분노했던 광경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내 제빵업계와 외식산업의 큰손 SPC 그룹은 그 살인적인 노동환경을 끊임없이 지적당했다. 제빵 기사들은 점심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일하고, 여성노동자들은 성희롱, 성폭력에 노출되었으며, 생리 휴가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임신 노동자에 대한 모성보호 조치도 보장되지 않았다. 임신 노동자에게는 야간근로와 휴일근로, 시간외 근로를 시킬 수 없지만 이조차도 지켜지지 않았다. 일을 했으면 점심시간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임신한 노동자는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노조에 가입했다고 탄압하지 말고 임금과 승진에서 차별을 두지 말라고 요구하기 위해 임종린 파리바게뜨 노조 지회장이 단식투쟁에 나섰는데, 회사는 이 기본적인 요구 조건을 53일간이나 모르쇠 했다. 53일간의 단식 투쟁 이후 동료 노동자들도 연대 단식에 나섰지만 회사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사람이 죽었다. SPC의 계열사 SPL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에 식자재를 넣는 업무를 보던 23세 여성 노동자 A씨는, 지난 10월 15일 오전 6시 20분 경 작업 중 앞치마가 기계에 말려들어가 상반신이 끼어서 사망했다. 사고는 예정된 인재였다. 해당 기계에는 인터록(덮개를 열면 자동으로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자동방호장치)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많이 기계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9대의 소스 배합기 중 7대가 인터록이 없었다. 바로 같은 공장에서 불과 1주일 전에 비정규직 노동자 B씨의 손이 20분간 기계에 끼이는 사고가 있었는데, B씨가 정규직이 아니라 기간제 노동자라는 것을 알자 공장 측은 알아서 병원에 가라는 말로 B씨를 방치했다. 이런 작업장에서 사람이 죽지 않으면 그게 운이 좋은 일이었다.
마치 <태일이> 속 한미사 사장이 영미에게 “폐병을 숨겼다”고 괘씸해 했듯, SPL은 B씨의 손이 기계에 끼었을 때 오히려 “누가 기계에 손 집어넣으라고 지시했느냐”고 화를 냈다. A씨가 사망한 이후에도 회사는 ‘2인 1조로 일해야 하는데 같이 일하던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진 일’이라며 다른 노동자 탓을 했다. (노동조합 측은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3인 1조로 작업해야 했는데 사측이 비용을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동료가 기계에 끼어 사망하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직접 시신을 수습한 노동자들은, 트라우마를 호소했음에도 대부분 다음 날 현장 작업에 투입되었다. 마치 영미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 이후에도 옆 자리 미싱사들이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던 것처럼.
나는 <태일이>에 느끼는 아쉬움을 속 편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다. 애니메이션의 품질이나 더빙의 완성도, 충분히 입체적이지 못했던 인물 묘사 같은 이야기를 더 오래오래 하고 싶다. 그런데 세상이 그럴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여전히 노동자가 죽어 나가고, 그 꼴을 지켜본 동료 노동자들이 곧바로 생산라인에 투입되어야 하는 세상이라서, 여전히 열사의 삶을 통해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은 것 같기 때문이다.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52년, 영화가 개봉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나는 그저 겸허한 마음으로 <태일이>를 권한다.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자본과, 여전히 사람이 죽어 나가는 공장 앞에서, 우린 아직 <태일이>를 만나야 한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