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제약 없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유튜브를 찾아보는 요즘에야 상상이 잘 안 가겠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기 전까지 일본에서 오는 모든 문화와 제품은 불법이었다. 금지된 열매가 더 달콤했던 것일까. 불법복제된 테이프와 CD로 일본 영화와 음악은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고, 나는 자막 없이 <롱 베케이션>(1996)이니 <러브 제네레이션>(1997) 따위를 보겠노라며 일본어 공부에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다 일본은 저물었고, 그 문화도 힘을 잃고, 외웠던 가타카나는 망실됐다.
잊고 있던 추억이 되살아난 건 엉뚱하게도 최근 한 예능을 보고 난 후다. MBC에 얼굴을 비춘 '다나카'의 샤기컷과 그가 부르는 '엔드리스 레인'을 듣자 일본 문화의 '황금기'가 떠올랐다. 방구석을 뒤져 스마프, 킨키키즈, 우타다 히카루 CD를 찾아 틀었고, 소름 끼치게도 나는 가사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적응되지 않는 일본 문화의 어떤 지점
일본 문화가 유행해 향유할 기회가 많았던 시대를 살았고, 지금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사랑해 마지않는 나이지만 '친일파'보다는 '지일파'로 남고 싶다. 특히 오늘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일본 대중문화의 어떤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참인데, 그것은 바로 일본 매체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식이다.
여자력? 그게 뭔데?
<호타루의 빛>, <테라스 하우스>, <너의 이름은.>
드라마 <호타루의 빛>에서 아야세 하루카는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똑 부러지지만, 퇴근 후 집에 오는 순간 체육복 차림에 건어물을 씹으며 맥주를 들이키며 널브러져 있는 '건어물녀' 아메미야로 분한다. '늘 여자다운 행실을 잊지 않고 집에서도 몸가짐이 올바른' 직장동료 유카(쿠니나카 료코)와는 다르게 아메미야는 소위 '여자력'이 없다. '건어물녀'의 면모는 발설되선 안 될 비밀이다. 아메미야의 회사 동료들도 연애 성취를 위해 외모를 가꾸고 다소곳한 말투와 친절한 태도를 장착하며 여자력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는 능력'이라고 그럴싸하게 정의되어 있지만, '여자력'의 핵심은 이렇듯 남성의 구미에 맞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2000년대 등장해 2009년 인기 신조어에 뽑힐 정도로 화제가 된 이 단어는 2022년 현재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최근 트위터에서는 여자력 빙고 게임도 등장했다. (이 빙고게임에 따르면 여자력이 높다는 것은 요리를 잘 하고, 날씬한 몸매에도 C컵만은 유지하며, 상냥한 행동과 말투로 무장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털 관리에 완벽을 기하며, 애교를 잘 부리돼 남자가 편하게 기댈 수 있게 만듦을 의미한다). 재미로 해보는 것이겠지만, 일본 젠더 인식의 편린이 보인다.
체육복에 상투머리하고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대관절 맥주와 오징어가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묻고 싶지만 '15년 전 드라마잖아'라고 너른 이해심을 발휘해 본다. 한데 '여자력'이라는 단어는 비교적 최근작인 넷플릭스 <테라스 하우스>에서도 심심찮게 들린다. <테라스 하우스>는 남녀 6명이 한 집에서 생활하고 연애하는 내용을 다루는 리얼리티 쇼로 '대본 없음'을 표방한다. 자연스러운 대화 속 성 역할에 따른 역학 관계가 잘 보인다.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 한 한 참가자는 '아마 나한테 여자력이 부족한 거라고 생각해'라고 넋두리를 하며 같은 방을 쓰는 여성에게 '잠옷이 너무 남자 같다'라며 새 잠옷을 사러 가자 말한다. 한 여성은 화장을 고치는 다른 여성에게 '여자력 높아졌는데'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자는 여성스러운 잠옷을 입고 화장으로 자신을 꾸며야 한다는 '여자력의 세계'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듯한 젊은 일본 여성들의 모습은 시대를 역행한다. 양성이 평등하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회를 외치는 20대 한국 여성의 모습이 겹쳐지며 아마도 또래일 화면 속 그들이 더 늙어 보이는 것은 기분탓일까.
애니메이션에도 '여자력'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너의 이름은.>에서 남자 주인공의 몸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가게 된 여자 주인공은 함께 일하는 선배의 치마를 수선해 주게 된다. 이를 보고 선배는 "여자력 높구나?"라고 말한다. '여자력'이란 보통 요리나 가사 등을 잘하는 여자를 보며 사용하는 용어이다. 요리나 가사 등을 잘하면 '여자력'이 높고, 그렇지 않으면 '여자력'이 낮다는 식의 발언은 여성의 고정된 이미지에 암묵적 동의를 강제한다.
역행하는 일본의 시계
드라마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사회화 도구로서 기능하며 수용자에게 시각적으로 구현되어 내면화된다.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젠더 담론은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만큼 '여자력'으로 대표되는 젠더 의식은 역행하는 일본의 시계를 꽤나 잘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성 역할이 일본에서는 여전히 견고하다. 일본은 남녀 성 역할을 신체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 강해 예컨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경력단절여성’으로 살아가는 상황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이 남녀의 사회적 역할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라고 간단히 이해하고 넘어갈 일일까.
'베개영업'이나 '여자력' 같은 말이 쓰이는 일본과 같은 사회에서는 미투가 불가하다는 한 신문의 사설처럼, 이런 안이한 상황 인식은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깊은 고정 관념 때문에 좌절하는 이들의 삶을 더 비참하게 끌어내릴 것이다. 일본에서도 성 불평등은 제거해야 할 사회적 병폐일 텐데도,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당사자인 여성을 포함해 일본 사회가 이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이질적이다. 일본의 드라마는 사회적 부조리는 소거한 채, 개인으로, 여성으로 감내해야 하는 조건으로 불평등을 받아들이라 강제하고 여성들은 저항 없이 수용한다. 일본 드라마가 재미 없어진 이유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일본 문화에 열광했던 나에게 일본은, 어쩔 수 없이, 기무라 다쿠야가 세상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 도쿄에서 사랑과 진로로 고민하는 빛나는 청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애석하게도 일본 드라마의 서사는 변화하는 세계를 담지 못하고 96년 작인 <롱 베케이션>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 한 채, 퇴보한 기분마저 든다.
일상생활과 가장 닮아 있는 드라마라는 장르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모델이자 규범이 된다. 21세기에 '여자력'을 강조하는 일본의 드라마는 일본인들에게 어떤 삶의 모델과 규범을 제시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 하나는 '여자력'을 필두로 가부장적 질서를 존속시키는 메시지를 강조해서는 예전과 같은 일본 문화 부흥의 영광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