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후보에서 낙방해서 아쉽다.

영화 <성스러운 거미>(202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화에서 출발한 이야기

2000년 부터 2001년까지 이란의 도시 마슈하드에서 16명의 매춘부가 살해됐다. 모두 자신이 두르고 있던 차도르에 목졸려 길거리에 버려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도르로 감싸인 희생자는 마치 거미가 먹이를 처리하려고 준비한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그 살인마는 거미라고 불렸다. 그는 신념을 품고 몸을 파는 여자는 더럽다며 죽였다.

이란 정권과 국민은 보수성향으로 그의 처벌을 외면했고, 살인마 사이드 하네이는 되려 협객이라 불렸다. 그는 매춘부를 죽이는 일을 종교적 책무로 여겼다. 재판 중에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여자들을 죽이는 일은 과일을 쪼개는 것 보다 쉬운 일이라고 조롱 섞인 말투로 증언했다. 결국 2002년에 테헤란에서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실제 사이드 하네이

결핍을 가진 살인마

극중에서 사이드(메흐디 바제스타니 분)는 순교자의 아들이다. 그는 늘 자신의 삶이 비범하지 않은 것에 비참함을 느낀다. 그래서 매춘부를 죽인다. 고결한 곳에서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에 대한 정의의 심판인 동시에 스스로를 순교에 버금가는 신격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이드는 재판에서 태형과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러나 사회의 분위기는 되려 그를 옹호한다. 그에게 판결을 내린 판사는 직접 그에게 출두하여 사형장 밖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유유히 사라지면 된다고 귀뜸을 한다. 그러나 형장으로 가는 그린마일이 되어서야 태형을 실시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제서야 태형부터 집행한다. 곧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오지만 알고보니 채찍은 벽을 때리고 사형수는 소리만 질러대고 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아픈 기색조차 내지 않는 뻔뻔함을 보인다. 이제 의기양양하게 교수형의 방으로 입장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 낯선 대기를 느낀 사이드는 그제서야 세차게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리곤 판결대로 사형이 집행되고 그의 육신은 공중에 매달린다.

사이드의 아들인 알리 (마스바 탈레브 분)는 아버지의 범죄를 인정할 수 없다. 사이드는 책임감 강한 가장이며, 그가 저른 일은 정의를 위하여 신의 이름을 빌어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법원 밖에는 사이드의 살인행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인다.

영화 속 대중은 이토록 그를 지지 하는데 왜 사형이 집행된 것일까? 영화의 중반부에서 경찰서장이 라히미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 분)를 희롱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거미 살인마는 '살인'이라는 반법치의 행동을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경찰들 또한 눈감아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장의 말맞따나, 이 과감한 거미 살인마를 잡는 것은 의미없는 것이다. 그들 또한 매춘부를 혹은 여자를 그런 식으로 대해도 괜찮다는 생각과 동시에, 경찰의 일이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라면 비슷한 일을 하는 이 성스러운 거미를 굳이 잡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태형도 물어봐야 겨우 실시한다. 정말 기가 찬다.

남은 사람들

첫번째 희생자의 딸은 엄마가 일을 나가기 전에 자고 일어나면 집에 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주검이었다. 희생자의 엄마는 합의를 받아들이며 죽은 딸 자식의 매춘은 집안을 더럽힌 것 이라며 되려 잘 죽었다는 말을 되뇌인다. 외할머니의 말을 다 듣고 있던 어린 딸은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외면하는 척 티비는 보고 있지만, 이제 엄마는 없다. 엄마는 왜 죽어야 했을까.

가해자의 아들인 알리는 주변에서 아빠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태도만 접한다. 체포되는 그 순간에도 사이드는 아들이 보고 있다며, 혹은 이웃이 보고 있다며 당당히 자신의 체면만 챙긴다. 야채 가게 점원은 그렇게 아버지가 부재한 소년을 챙겨주며 의협꾼의 핏줄임을 자랑스러워 하라는 격려를 받는다. 엄마는 아빠의 살인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 조차도 불허한다. 소년은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며 빙긋이 웃지만 의아한 점이 있다. 의의 상징인 아빠는 왜 처벌을 받을까.

알리의 여동생은 오빠에게 밟히면서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지금 아빠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며, 여성의 신분으로서 사회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혹은 당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아마 엄마처럼 눈가리고 아웅을 하거나, 여전히 모르는 천진난만한 상태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이어지는 알리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아빠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이것은 그른 신념을 품은 사이드 개인이 저지르는 살인의 문제인가? 이윽고 영화는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존재가 만들어진 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것은 진지한 태도의 질문이 된다. 무엇이 괴물을 위인으로 둔갑케 하는가?

악의 수태와 전수

다시 사이드의 집행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형장의 뒷문으로 나가 자동차를 타면 될 줄 알았던 사이드는 예상과는 반대로 사형이 집해되려하자 반항한다. 그때 언뜻 비춰지는 이미지들은 그를 둘러싼 군인들이다. 당시 (2000년 ~ 2001년) 이란에서 권세를 떨쳤던 근본주의자들과 강경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군인들에게 국민을 고요히 따르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권력을 욱동시키는 원리 중의 하나가 완력임을 아는 그들에게 본보기는 필요하다. 판사는 사이드를 정말로 살리려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군대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정의의 심부름꾼'을 신격화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의 안정 (혹은 지속적인 지배)이었을 것이다. 즉, 거미 살인마를 살려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도리를 떨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 2,3 의 사이드를 양산하는 일이었을 지 모르겠다. 그렇게 누군가 안정을 담당해 준다면, 우매한 대중으로부터 헤게모니와 힘을 가져가는 것은 더욱 쉬이 발휘될 것이기 때문이다.

악독의 전승은 비단 신념으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24년 전 이 범행은 왜 이 시기에 개봉했을까? 이제 갓 13살쯤 보이는 알리는 아빠의 죽음을 억울해 했다. 그 또한 신실한 종교의 전도사다. 아빠의 범행이 종료 된 후 이제 23년이 흘렀고, 소년은 아버지가 살인을 시작했던 연령에 거의 근접했다. 실존하는 사이드 하네이의 아들이 부디 법치의 혜안을 깨닫고 알라의 진정한 사랑의 뜻을 이어나가기를 바란다. 영화의 엔딩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으려했던 철근같고 견고한 의지가 여전한 현재 진행형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