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일요일 오전, 프랑스의 한 주택. 사춘기 남매가 서로 밀고 밀치면서 장난을 치고 있다. 아버지는 식사를 차리고 어머니는 정원 수도관을 뚫고 있다. 맥락 상 1980년대 중반쯤이라 여겨진다. 직전 장면(즉, 영화 첫 장면)엔 1971년의 어느 양육원 장면이 나온다.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녀 둘이 등장한다. 그 중 한 아이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귀신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괴이한 존재에 악몽 속에 나타난다. 다른 아이가 친구를 달랜다. 뭔가 수상하고 으스스하다. 다시, 그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자.
한 소녀의 무분별한 총격, 그 이유는?
식사 준비가 끝나고 가족들이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어머니는 수도관을 막고 있던 쥐를 한 마리 들고 식탁으로 온다. 평온한 식사 자리가 약간 기이해진다. 농담이 오고 가다가 아들의 장래 얘기가 나온다. 다시 아주 평범하다. 그때 문득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커다란 산탄총을 든, 갓 스물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들이닥친다. 이름은 루시(트로이안 벨리사리오)다. 에두를 것 없이 산탄총을 난사한다. 아이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총알이 빗발친다. 루시는 뭔가 분노에 가득 차 보인다. 모종의 슬픔마저 엿보인다. 남자아이에게 총을 겨눈 채 “네 부모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라고 묻고는 잠깐 주저하다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대한 유일한 힌트라 할 수 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살육 끝에 욕조에 옮겨 놓은 어머니가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또 여지없다. 더 잔혹하게 어머니를 살해한다. 얼마 후, 또래의 소녀가 한 명 더 등장한다. 이름은 안나(베일리 노블)다. 둘은 절친해 보인다. 안나는 난장판을 수습하고 루시의 상처를 치료하고선 시체 처리에 골몰한다. 그리고 집 안엔 또 누군가가 있다. 벌거벗은 채 금속 안대를 끼고 아랫도리는 철근으로 옥죄어져 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비쩍 말랐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유령인지 분간이 안 된다. 어릴 적부터 루시의 악몽과 함께 실제로(?) 나타나는 바로 그 여인이다. 루시는 ‘그것’과 또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안나는 그녀를 보호하려 한다. 결국에 그녀는 죽고, 루시는 그 이전에 죽어버린다.
이상, 케빈 고츠와 마이클 고츠가 공동 감독한 영화 <마터스>(2016)의 초반 장면이다. 아무 정보 없이 우연히 보게 됐다. 공포 스릴러라 분류되어 있으나 그런 상투적인 규정이 내포하는 차원과는 또 다른 공포가 시작부터 처참할 정도다. 곱상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소녀가 중화기를 들고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 자체가 이미 뭔가 선을 단단히 넘은 느낌을 준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원인과 동기가 밝혀지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아니, 그 동기를 알고 나면 더 오싹해진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시작되지만,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모종의 정치적 음모와 학대의 전모를 알고 나면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보다 몇 배는 더 교활하고 끔찍한 인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영화가 끝나면서 더 무서운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도 그 까닭이다.
금속 안대는 누가 누구에게 씌운 건가
암시는 이미 첫 장면에서부터 깔려 있었다. 루시와 안나는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를 겪곤 양육원에서 자라게 된다. 그런데, 국가에서 운영하는 양육원은 소녀들에게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안긴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 큰 고통이 가해지고 그것은 한 개인의 내밀한 아픔 차원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금속 안대를 낀 여인은 그것의 커다란 상징이다. 그녀는 살아있으면서 죽은 자이고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루시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다. 고통의 망령인 동시에 몇 번씩 고통당하고 죽어서도 안나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희생자다. 이토록 배배 꼬인 개인적 고통의 유전과 전승의 시작과 끝엔 국가가 있다. 그리고 종교가 있다. 루시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중반부부터는 이전의 요란스러운 참혹성이 다른 분위기로 나타난다. 한 무리의 공무집행 요원들이 들이닥쳐 안나를 지하에 감금하고선 학대와 폭행을 반복한다. 이유도 명분도 없다. 학대자들은 무지막지한 폭력만 자행할 뿐, 별다른 말도 하지 않는다. 안나가 저항할수록 폭행은 가혹해진다. 무슨 악당이나 범죄 집단도 아니다. 학대와 폭행을 자행하지 않을 때엔 그저 평범한 공무원의 일상이다. 그만큼 폭행의 밀도는 상대적으로 은밀하고 훨씬 더 잔혹해진다. 침묵과 비밀이 가지고 있는 암시적 공포는 극에 달한다. 영화 속 안나뿐 아니라 보는 이도 기가 질릴 정도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나면 세상 전체가 무시무시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런 일이 단지 스크린 안에서 과장되게 연출된 픽션만은 아닐 거라는 으스스한 공포. 세계는, 국가는, 그리고 특정한 이념과 신념 아래 자행되는 모든 형태의 폭력은 얼마나 잔인하고 일상적인가.
‘Martyrs’, 순교자란 뜻이다. 동사로는 ‘순교자로 만들다’이다. 영화 맥락상 동사의 의미가 더 적확하다 여겨진다. ‘순교자인 척하며 동정을 유발한다’는 뜻도 있는데, 이 뜻 역시 기묘하다. 왜 순교자를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로 하여금 순교자인 척 동정을 유발하려 하는가. 그 이유와 주체는 한 개인이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거대한 집단적 목적과 연관돼 있다. 국가의 이익, 또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불특정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어 있다. 특정 어젠더를 선취하거나 강화하려 할 때엔 그것의 본보기나 반면교사가 될 만한 희생양이 필수적이다. 언론이나 여론의 추이도 그것을 위해 조장되거나 조작된다. 거기 애매한 개인이 붙들려 메인다. 일종의 소도구로 쓰이며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아픔이나 상처가 되레 그를 둘러싼 혐의가 되고 희생의 동기가 된다. <마터스>는 그러한 권력 체계와 개인의 불가항력한 희생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고발하는 영화다.
노골적인 폭력보다 더 내밀한 폭력의 근원
누군가는 과도한 폭력성과 믿기 힘든 음모론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저런 일이 설마 있으려니 싶지만,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내밀한 심급들을 짚어보면 영화가 드러내는 폭력성은 단지 소리 소문 없고 자취도 없어 보이는 국가폭력과 권력의 작동 체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장만은 아니다. 프랑스는 개인의 자율성으로 바탕으로 전 세계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세운 나라다. 현재도 모든 국제적 정치 용어는 불어가 사용된다. 그럼에도 그 나라의 어느 개인들은 상상도 못할 폭력을 통해 권력과 정치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있다는 걸 <마터스>는 보여준다.
거기에 종교라는 거룩한 명분마저 동원된다. ‘순교자’는 결국 종교적 개념이다. 종교는 누군가를 못 박고 그것을 보라 지시할 ‘표본’이 없으면 권위와 전능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 모든 걸 조종하는 일견, 고귀하고 우아하신 분들의 가차없는 잔인함. 거기에 순응치 않을 경우 수도관을 막은 쥐 한 마리 취급 당하는 개인의 일상. 그래서 이 영화는 내내 무섭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순교하지 말라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적 있다.
“세상 일이 지혜라는 이름, 선의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교묘히 계획되고 논의되고 고려되고 숙의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란 얼마나 비참한지 너도 잘 알고 있잖니.”
고흐의 일생은 유명하다. 흔히 ‘예술의 순교자’라 불리기도 한다. 고통과 고독과 질병과 암흑 속에서 온갖 오해와 비난 끝에 스스로를 파멸시킨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죽은 후 현재까지 조국 네덜란드를 먹여 살리는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고흐는 “지혜라는 이름”과 “선의라는 이름”이 지닌 모든 위선과 가식에 정면으로 부딪쳤던 사람이다. 그저 그것들이 말 그대로의 ‘지혜’와 단어 그대로의 ‘선의’와는 정반대로 사람을 억압하고 고통받게 하는 ‘악의’와 ‘무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당대에 직관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 ‘지혜’와 진짜 ‘선의’를 위해 스스로를 학대하다 죽었다. 순교자를 만들지 말라. 순교 당한 사람의 고통을 직시하되, 누군가를 순교케 하는 거대하고 은밀한 폭력 앞에 당당히 금속 안대를 벗고 두 눈을 똑바로 뜨라. <마터스>는 그렇게 속삭이는 영화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 "순교자를 원한다면 스스로 순교하라."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