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에 이어집니다


1997년, CGV 1호점 강변점이 개점 이후로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렸다. 상영관이 증가하고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제작편수가 증가하고 장르가 다양화되며 양질의 한국 영화들이 탄생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첫 천만 영화 <실미도>(강우석, 2003)의 탄생은 이러한 한국 영화의 성공 가두를 드러내는 첫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만 영화가 줄줄이 탄생하고 고예산 블록버스터로 영화산업의 중심이 옮겨지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아기자기한 스케일의 멜로 장르는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적은 수의 멜로 영화가 제작되었고 80년대까지 박스오피스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멜로드라마의 개봉 편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멜로 장르는 과거의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다만 팬더믹의 기간 중에도 <장르만 로맨스>(조은지, 2021), <연애 빠진 로맨스>(정가영, 2021) 등 신인감독들의 중·저예산 멜로 영화들이 꾸준히 개봉되었다는 점, 이 영화들이 완만한 흥행을 누렸다는 점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23년 1월에 개봉한 첫 멜로 영화,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이하 ‘어우헤’)는 한국영화사적 시점에서 그리고 장르적 변화의 시점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을 보여준다.

일단 <어우해> 역시 여태까지의 한국 멜로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인감독에 의한 작품이다. 영화를 연출한 형슬우 감독은 단편 <병구>(2015), <그 냄새는 소똥 냄새였어>(2016) 등으로 서울독립영화제, 후쿠오카국제독립영화제, 그리고 시체스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를 포함한 유수의 국내외 영화제들에서 수상하며 재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어우헤>는 형슬우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 개봉 포스터

영화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이야기의 시작점이 일반적인 멜로 영화의 포맷인 연애를 시작하는 커플의 이야기가 아닌 수명이 다한 커플의 이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들이 ‘어쩌다’ 이별을 하고, 어쩌다 그것이 현실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꽤나 현실적으로, 그러나 서글프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낸다.

‘준호’(이동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다. 그의 오랜 연인, ‘아영’(정은채)은 그림을 전공했지만 생활비도 벌고 취준생인 준호도 도와야 하기에 현재는 공인중개사 일을 하며 근근이 일상을 꾸려 나간다. 문제는 준호가 아영의 고군분투를 1도 헤아리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등학생들이 담벼락에 숨겨놓은 담배를 훔쳐 피거나 동네 친구를 불러 게임을 하는 일상으로 공무원을 준비하는 취준생과는 거리가 먼 시간을 보낸다.

결국 아영이 이별을 통보하고 이들은 담담하게 헤어진다. 그 누구도 크게 아파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준호는 아영의 아이패드를 돌려주기 위해 그녀와 재회하게 된다. 각자 다른 이유로 약간의 설렘이 있었겠지만 물건을 돌려주고 돌려받는 행위 이외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나눠 마신 이들은 그렇게 정말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마음속에서 지운다.

아영 역을 맡은 정은채 배우

엄연히 멜로 영화의 범주에 들어가겠지만 <어우헤>는 멜로드라마적인 플롯보다는 관계의 ‘삼라만상’에 주목한다. 꽤 오랫동안 일상을 나눈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떼어내야 하는 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는 누구나 거쳤을, 혹은 누구나 거칠 시간과 단계를 매우 사실적이지만 그럼에도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준호와 헤어진 이후 아영은 자신의 꿈을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형슬우 감독의 <어우헤>는 과거 한국 멜로드라마의 감정적 과잉(때로는 신파로 규정짓는), 즉 극단적인 재현 방식과 이야기의 설정으로부터 엄청난 진화와 차이점을 보여준다. 예컨대 (과거의 영화들이 천착했던 서사들처럼) 남녀 중 그 누구도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끝내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희생되거나 희생해야 하지 않으며, 제도권을 피하기 위해 유사 결혼 생활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각자의 일상을 무난하게 합쳐서 무난하게 행복하고 싶은, 무난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런 무난한 삶을 위해서는 무난함을 초월하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들은 이제 배워가는 중일뿐이다.

취준생, 준호 역을 맡은 이동휘 배우

공무원 시험을 결국 포기하고 회사원이 된 준호는 작품 전시회를 열고 있는 아영과 우연히 마주친다. 준호는 결국 꿈을 이룬 그녀가 대견하고 반갑기만 하지만 그의 눈을 마주친 아영은 그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고 일행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서 준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갤러리를 서성이다가 이내 거리를 떠난다.

두 사람의 이별은 희생이나 제도권을 벗어나려는 시도 없이 이뤄진다. 기존 한국 멜로 영화의 새로운 국면이다.

결말에서조차 <어우헤>는 멜로드라마 영화의 전형을 벗어나는 선택을 한다.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엔딩을 철저히 배반하며 <어우헤> 속 옛 연인들은 반가운 인사조차 교환하지 않는 관계로 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오랜만에, 혹은 거의 처음으로 등장한 생활밀착형 ‘멜로’영화다. 영화학자, 린다 윌리암스는 멜로 장르를 ‘과잉 (excess)’으로 정의했지만 아마도 이 작품으로 한국의 멜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뛰는 로맨스도, 눈물이 쏟아지는 이별도, 회한에 가득 찬 재회도 없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충분히 멜로적이다. 그것은 영화가 바라보는 (연인에 대한 애정뿐이 아닌) 삶에 대한, 그리고 일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애착 때문이다. <어우헤> 속에 등장하는 것은 ‘닳아빠진 로맨스’지만 이를 위로하고 감싸고 있는 존재들은 골목에서 일어나는 이웃과의 해프닝이고, 친구와의 신명나는 하룻밤이며, 지리멸렬한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술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누군가의 연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버틸 만큼의 암울한 미래와 일상을 한탄하고 있는 사람들, 그럼에도 그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현재를 ‘버텨 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지는 위로이자 응원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