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주인공을 성룡에서 양자경으로 변경했다.

2022년,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와 배우라면 단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양자경일 것이다. 평범한 세탁소 주인 에블린이 모든 차원의 우주를 파괴하려는 '조부 투바키'를 막기 위해 멀티버스를 들여다보는 내용의 이 영화는 독특한 발상과 기상천외한 전개로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특히 에블린을 맡은 양자경이 수많은 멀티버스의 이블린을 소화하는 열연을 펼쳐 감탄을 자아낸다. 원래 이 영화는 양자경이 아닌 성룡을 주인공으로 고려했으나 영화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양자경을 중심에 두고 판을 새로 짰다. 그 결과 여타 영화와는 차별화된 지점을 찾을 수 있었고, 양자경 또한 다시 한번 배우 활동에 순풍을 달 수 있었다. 이렇듯 1순위 배우를 놓친 이후 찾아온 배우가 영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원래 다른 배우의 자리였던 캐릭터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영화와 배우 5를 만나보자.


루크 홉스 <분노의 질주>

토미 리 존스→드웨인 존슨

<맨 인 블랙 3> 토미 리 존스(왼쪽), 드웨인 존슨

드웨인 존슨은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큰 족적을 남겼다. 비록 앞으로의 <분노의 질주> 메인 시리즈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래도 그의 루크 홉스는 <분노의 질주>가 바라보는 '액션 영화'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그의 합류를 시작으로 비현실적인 액션조차 '가능할지도…?' 여길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루크 홉스 캐스팅의 1순위는 드웨인 존슨이 아녔다. 루크 홉스는 드웨인 존슨과는 정반대에 있는 노년 배우 토미 리 존스를 위한 캐릭터였다. 토미 리 존스는 그동안 무뚝뚝하지만 사명감 넘치고, 정의롭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불법도 눈감아줄 그런 캐릭터를 맡았던 대표적인 배우니까.

그렇게 토미 리 존스에게 갈 뻔한 역할이 어떻게 드웨인 존슨에게 왔을까. 시리즈의 주연이자 제작자 빈 디젤이 읽은 팬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한 팬이 '빈 디젤과 드웨인 존슨이 한 화면에 있는 걸 보고 싶다'고 글을 남겼고, 이걸 본 빈 디젤이 팬의 간절한 바람을 이뤄주고자 캐릭터의 방향성을 바꾸기로 한 것. 덕분에 우리는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부터 '근육질 빡빡이 대전'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팬의 바람으로 만난 빈 디젤과 드웨인 존슨이 서로 안 맞아서 틀어진 점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설령 토미 리 존스에게 제안이 갔어도 거절했을 것 같지만, 만일 출연이 성사됐다면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지금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그 버전의 루크 홉스는 <분노의 질주: 더 세븐>부터 등장한 미스터 노바디(커트 러셀)에 가까운 캐릭터였을지도.


스타워즈

미후네 도시로→알렉 기네스

<요짐보>의 미후네 도시로(왼쪽), 알렉 기네스

영화 좀 좋아한다는 사람이면 <스타워즈> 시리즈가 사실은 '짬뽕'이란 사실을 알 것이다. 미국 서부극과 일본 사무라이극의 정서를 하나로 혼합한 것이 <스타워즈>다. 창시자 조지 루카스도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모티브로 삼은 영화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로 일본 배우를 캐스팅하려 했던 건 그렇게 유명하지 않다. 조지 루카스는 이 시리즈의 시작,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의 오비완 역을 미후네 도시로에게 맡기려고 했다. 미후네 도시로는 <7인의 사무라이> <거미의 성> <요짐보> 등에 출연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사무라이 캐릭터로 유명한 배우. 애초 이 오비완이란 캐릭터도 미후네 도시로가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연기한 마카베의 영향을 맡았으니까. 하지만 미후네 도시로는 신인 감독의 SF 영화가 사무라이의 이미지를 망칠까 제안을 거절했다. 조지 루카스는 도시로를 꼭 출연시키고 싶어 얼굴을 가리는 다스베이더 역까지 부탁했으나 이 또한 거절당했다.

그래서 오비완은 영국의 명배우 알렉 기네스가 맡게 됐다. 셰익스피어 극을 통달한 배우이자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 서사극으로 유명한 알렉 기네스였지만 <스타워즈>의 오비완 역으로 그야말로 세대를 아우르는 스타가 됐다. 기네스 본인은 이 인기가 그다지 탐탁지 않았으나 그래도 <스타워즈> 시리즈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스타워즈>의 멘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블레이드

LL 쿨 J →웨슬리 스나입스

<딥 블루 씨> LL 쿨 J(왼쪽), 웨슬리 스나입스

조만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마허샬라 알리로 돌아올 블레이드.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 블레이드는 이미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세 편의 영화로 우리와 만난 바 있다. 해당 시리즈에서 웨슬리 스나입스가 블레이드를 맡아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로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블레이드는 작품마다 쿨한 캐릭터성과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뽐내며 사랑받았다. 평소 쿵후 같은 무술을 연마한 웨슬리 스나입스의 장점이 잘 녹아든 것이 시리즈의 매력.

물론, 웨슬리 스나입스가 처음부터 블레이드였던 건 아니다. 블레이드에 처음 거론된 건 래퍼로 유명한 LL 쿨 J였다. 각본가 데이빗 S. 고이어는 사냥꾼에 어울리는 강인한 신체, 투박하되 열의에 불타는 블레이드로 LL 쿨 J를 상상하며 각본을 썼다. LL 쿨 J가 아닌 웨슬리 스나입스가 발탁된 이유는 다소 의외인데, 영화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졌기 때문. 제작비를 더 배정받으면서 제작진은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를 고려해야만 했고, 그래서 LL 쿨 J가 아닌 웨슬리 스나입스에게 블레이드를 맡겼다.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앞서 말한 대로 평소 무술을 수련했으니 액션을 수월하게 소화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제작진의 기대에 부응하듯 웨슬리 스나입스는 블레이드와 혼연일체 한 연기로 시리즈를 이끌었다.


제5원소

프린스→크리스 터커

<퍼플 레인> 프린스(왼쪽), 크리스 터커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는 SF 영화의 유구한 역사에서도 유별난 영화다. 우주 존폐가 걸린 모험에도 이상할 정도로 유쾌하고 참신한 순간들이 이어지기 때문. <제5원소> 만의 에너지 중 7할은 루비 로드에게 기인하고 있지 않을까. <제5원소> 세계에서 유명한 DJ 루비 로드는 쉴 새 없이 떠들고 자기애를 숨기지 않고 과시한다. 그 유별난 성격과 별개로 중성적이고 화려한 패션을 보고 어쩐지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어쩌면 그건 프린스의 그림자였는지 모른다.

루비 로드는 원래 프린스가 맡기로 돼있었다. '제작진이 원했다' 정도가 아니라 프린스 또한 영화의 출연을 어느 정도 수락한 상태였다. 그렇게 합심한 의지와 달리 시간이 문제였다. 프린스는 투어를, <제5원소> 제작진은 촬영 일정을 잡아두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프린스가 둘 다 참여할 수 있는 일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프린스는 투어를 위해 영화에서 하차했고, 루비 로드는 크리스 터커가 맡게 됐다. 크리스 터커의 현란한 화술과 까불거리는 캐릭터 연기를 보면 루비 로드가 제주인을 찾았구나 싶지만, 프린스가 연기했을 루비 로드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시스터 액트

베트 미들러→우피 골드버그

<두 여인> 베트 미들러(왼쪽), 우피 골드버그

특유의 흥겨운 분위기로 한국에서도 명절 단골 영화로 사랑받은 1992년 <시스터 액트>, 1993년 <시스터 액트 2>. 신변 보호를 위해 수녀로 위장한 밤무대 가수 돌로레스가 흥겹고 리드미컬한 음악으로 정숙하고 경직된 분위기의 수녀원 성가대를 변화시키는 영화로, 우피 골드버그의 대표작이다. 지금이야 우피 골드버그 없는 <시스터 액트>가 상상조차 안되지만, 원래 돌로레스 역은 가수 겸 배우로 유명한 베트 미들러의 몫이었다. 수많은 히트곡과 <로즈> <두 여인> 등의 영화 출연작이 입증하듯 그는 노래도 되고 연기도 되는, 돌로레스에 딱 필요한 배우였다. 그러나 베트 미들러는 “내가 수녀 두건을 쓴 모습을 내 팬들은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란 이유로 영화를 거절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미들러는 <시스터 액트>를 거절한 것이 자신의 실수 중 하나라고 고백했다(그는 <미저리>도 거절했다고). 베트 미들러의 <시스터 액트>가 궁금하긴 한데, 그럼에도 우피 골드버그가 영화 내내 발산한 유쾌하고 소울 가득한 분위기가 <시스터 액트>에겐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