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기호식품인 ‘라면’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한국 영화에 등장했다. <신라의 달밤>(김상진, 2001)의 두 주인공이 가운데에 두고 싸우는 대상, ‘주란’(김혜수)은 학교 앞 인기 라면집의 사장이며, <파송송 계란탁>(오상훈,2005) 에서 뒤늦게 재회한 부자의 매개체 역시 라면이다. 지극히 서민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음식이지만 하층민의 전유물로만 등장한 것도 아니었다. <기생충>(봉준호, 2018) 역시 호화 캠프에서 막 돌아온 상류층 가족의 허기를 달래 줄 음식으로 ‘짜파구리’ 라면을 선택했다. 물론 채끝살을 듬뿍 얹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라면’의 활약이 가장 컸던 최초의 영화, 혹은 가장 상징적으로 등장했던 순간이라면 역시 허진호 감독의 <봄날이 간다>(2001)가 아닐런지.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의 라면, “매혹의 표식”
소리 채집자, ‘상우’(유지태)와 강릉 방송국의 라디오 피디, ‘은수’(이영애)는 그녀의 프로그램을 위해 처음 만나게 된다. 소리 채집을 다니며 점점 가까워지지만 지극히 내성적인 상우는 선뜻 은수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일이 끝난 늦은 밤, 상우는 은수를 차로 데려다주고 그날 역시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그녀를 보낸다. 다시 운전대를 잡는 순간, 은수가 상우의 차로 돌아온다. “라면 먹을래요?”
발랄하지만 의도가 농후한 이 한마디에 상우는 얼마나 놀랐으며 설렜을까. 그럼에도 이후에 장면에서 상우가 정말 라면만 먹고 가려는 듯한 인상을 보이자 은수는 똑같은 톤으로 확인사살을 한다: “자고 갈래요?” 물론 라면을 뜯으면서 말이다.
짧지만 강렬하고, 그럼에도 서정적인 이 대사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토크쇼에서 수없이 회자되고 패러디 되며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봄날은 간다>가 수십 년 동안 대중적 기호식품으로서 전 국민의 찬장을 군림했던 라면의 역사를 바꾼 셈이다. <제리 맥과이어>의 딸기가 그랬듯, <나인 하프 위크>의 젤리가 그랬듯, <봄날은 간다>의 라면은 영화에서 가장 섹시하고 농밀한 순간의 표식이다.
<내부자들>(우민호, 2015)의 라면, “안상구의 페르소나”
자신을 배신한 세력에게 복수를 꿈꾸는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헌) 는 이 영화에서 참 다양하게, 많이도 먹는다. 라면, 맥주, 어묵, 삼겹살 등 정치 음모를 중심으로 한 범죄 드라마치고는 정말 많은 종류의 먹는 장면이 영화에서 등장한다. 안상구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상처럼 차분하게 앉아 음식을 맛있게 씹고 삼키지 않는다. 그는 험하게 자란 깡패인 만큼, 고상하게 먹지 못한다. 상구는 언제나 음식 이 입에 가득 찬 상태로 (심지어는 씹는 중에도) 말을 하는 습관이 있고, 누가 옆에 있든 말든 먹던 음식을 고스란히 뱉어내는 것에 스스럼이 없다. 다시 말해 안상구가 음식을 먹는 많은 장면은 하나같이 안상구의 캐릭터 서술을 위한 장치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안상구가 옥상에서 라면을 먹는 두 장면은 한국 영화에서 캐릭터를 정의하는 데에 먹는 장면을 가장 잘 쓴 예로 기록해두고 싶을 정도로 효과적이고 훌륭하다. 물론 이는 배우 이병헌의 무시무시한 연기력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첫 번째 라면 신, 낮, 야외: 상구는 자신이 살고 있는 허름한 아파트 옥상의 평상 위에 앉아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 오른손이 없는 상구는 왼손에 끼워진 젓가락으로 라면을 걷어 먹는다. 이때 상구의 오른팔, ‘박정팔’(배성우)이 찾아온다. 혼자 먹기에도 부족해 보인다며, 같이 먹자는 상구의 권유를 정팔은 사양한다. “콩 한쪽도 나눠 먹어야 않긋냐”는 상구의 말에 정팔은 더 이상 거절도 못 하고 평상에 걸터앉아 상구가 따라주는 소주를 받는다. 입안 가득 라면을 넣고 연신 쩝쩝거리며 씹어 삼키던 상구는 곧 소주로 입을 가시고 정팔에게 장필우 일당 복수 작전의 보고를 받는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고, 대포폰을 건네받는 순간에도 상구는 라면을 입안 가득 넣고 어딘가를 유심히 응시하며 우걱거린다.
사실 이 장면에서는 라면보다 이병헌의 ‘씹는’ 쇼트가 더 많이 나온다. 어금니로 라면을 박박 씹는 이 클로즈업에서는 포만감보다 분노가 느껴진다. 분명 상구는 라면을 우물거리는 이 순간에도 복수를 떠올렸을 것이다.
두 번째 라면 신, 밤, 야외: 퇴근 후 상구는 여느 때처럼 아파트 옥상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 펄펄 끓는 라면을 쪼개지도 않은 젓가락으로 크게 ‘걷어 올려’ 입에 욱여넣는데, 후후 불며 어금니로 몇 번 굴리더니 결국 고스란히 뱉어낸다. 소주를 병나발로 입안 가득 머금고 양치를 하듯 거칠게 가글(?)을 한 후 삼킨다. 이때 상구의 대사, “어따 OO 뒤질 뻔했네” (또 하나의 박장대소 모먼트!)
앞선 라면 신에서 보인 비장함이나 긴장은 없다. 상구는 그저 배가 고프고 라면을 빨리 삼키고 싶을 뿐이다. 뜨거운 라면 때문에 ‘뒤질 뻔’했지만 그럭저럭 평온한 한때…가 될 뻔한 상구의 저녁은 장필우 일당의 습격을 받으면서 진짜 ‘뒤질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급변한다. 상구의 대사는 이후의 상황을 암시하는 전주 같은 것이었다. 이어지는 구타 신에서 상구는 더욱더 처연하게 보이는데, 그것은 그가 혼자 몇 명을 상대하며 얻어터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토록 원한 라면 한 젓갈 먹지 못한 상태라는 걸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부자들〉의 이 두 장면은 〈봄날은 간다〉와 함께 가장 영리하게 라면을 이용한 예이기도 하다.
<대외비>(이원태, 2023)의 라면: “음모의 결탁”
한방을 꿈꾸는 국회의원 후보, ‘해웅’(조진웅)은 정치판의 숨은 실세이자 멘토였던 ‘순태’(이성민) 에게 배신을 당하며 정치에서 밀려난다. 해웅은 깡패인 ‘필도’(김무열)와 협업해 순태를 끌어내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에서 순태는 분명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중심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많은 정보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다(이 점은 분명 영화의 약점으로 작용한다). 관객에게 공유되는 정보는 그가 부산의 거물이며 그의 손가락 끝에서 정치판의 전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 순태가 음모를 계획하거나 은밀한 만남을 해야 할 때 이용하는 장소가 등장하는데 이는 폐허에 가까운 ‘국밥집’이다. 순태의 밀실로 쓰이는 이 식당에서 순태는 모시는 손님(?)들에게 늘 음식을 대접한다.
배신당한 해웅이 순태에게 선전포고를 하러 왔을 때 그가 해웅에게 대접하는 음식은 ‘라면’이다.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이를 갈며 이야기하는 해웅 앞에서 순태는 라면을 참으로 침착하고 정성스럽게 끓여낸다(끊임없이 면을 들어 올려 공기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마치 해웅의 결의에 찬 선전포고가 씨알도 먹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말이다. 그렇게 공을 들여 끓인 라면을 해웅은 한 젓갈도 뜨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순태는 동요 없이 라면을 음미하고 맛본다. 이 대목에서 순태의 얼굴은 <한니발>(리들리 스콧, 2001)의 한니발 박사가 간교하고 공허한 표정으로 인육요리를 음미했던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역설적인 것은 라면 시퀀스 이후에 순태와 해웅이 한 편이 된다는 것이다. 순태가 해웅을 위해 그토록 라면을 정성스럽게 끓였던 것은 그들의 필연을 어느 정도 감지했거나 그 어떤 경우의 수도 제외하지 않는 정치꾼의 본능에서 온 예후 같은 것이 아니었을지.
※<내부자들> 파트는 필자의 책, <보가트가 사랑할 뻔한 맥주> 중 일부분을 인용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