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극적인 사실엔 일말의 광기가 존재한다. 기쁨이나 슬픔, 환희나 영광, 절망과 좌절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광증(狂症)이 숨어 있지 않다면, 상궤를 벗어난 일탈과 삐걱거림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희로애락은 그저 밋밋한 일상의 겉표지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 등을 느끼는 감정은 결국 모종의 ‘미친 상태’다. 너무 극단적인가. 더 극단으로 여겨질 수 있는 영화를 얘기하기 위한 전제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사랑엔 광기가 숨어 있다
일상은 대체로 평범해 보인다. 그래서 지루하거나 심심하다. 사랑이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소모품 같은 것이라면 그 어떤 생생한 에너지도 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개 사람들은 안온하고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기 원한다. 어떤 충돌이나 분열, 갈등과 소진을 바라면서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삶은 결국 특별하거나 의외의 충돌과 갈등에 의해 그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건 불행과 악덕, 혹은 죽음과 폭력에 의해 유발되거나 결론지어진다. 반복건대, 모든 드라마틱한 사실은 전면적이거나 잠재적인 광기의 출현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타인에게 내던지는 사랑은, 더더욱 그렇다.
안드레이 줄랍스키는 폴란드 출신이다. 소피 마르소의 전 남편으로 유명했는데, 2016년 76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젊은 시절 공산주의 사회였던 폴란드의 정치적 예술적 억압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해 영화를 만들었다. 괴랄하고 산만하고 그로테스크한 영화들을 줄창 연출했는데, 1980년대 프랑스 영화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악명 높은 감독이었다. 1981년 개봉된 <포제션>은 그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주목받은 작품이었다. 이자벨 아자니가 1인 2역한 여주인공 역할은 추후 줄랍스키 영화에 등장하는 광기 어린 여배우의 효시가 되었다. 이 영화를 찍은 직후, 이자벨 아자니는 정신병원 치료를 받았을 정도로 충격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당시 자살 기도설도 떠돌았으나 나중에 낭설로 알려졌다.
막 하이틴 이미지를 벗은 소피 마르소가 이후 줄랍스키의 히로인이 되었다(결국 둘은 결혼한다). 올누드는 물론이고 파격적이고 폭력적인 정사씬은 줄랍스키 영화의 전매특허라 할 만한데, 섹슈얼리티와 죽음, 폭력과 사랑의 노골적이고도 복합적인 울림은 줄랍스키만의 특장이자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1996년에 개봉한 <샤만카>에선 사랑하는 남자가 죽자 그의 뇌를 파먹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당시 폴란드 출신 신성으로 메인 롤을 맡은 이오나 페트리는 그 작품을 찍고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입고선 얼마 안 가 미술작가로 전업했을 정도다.
빤한 치정극? 아니 엽기 공포의 끝판왕!
<포제션>은 이상하고 망측하고 끔찍하고 불편한 영화다. 등장인물들은 현실을 살면서 자기 안의 괴이한 동굴 같은 곳에 수시로 숨어드는 듯 몽롱하고 산만하다. 마크(샘 닐)는 전쟁 중에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집(베를린이 배경이다)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내 안나는 마크를 멀리한다. 안나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쓸수록 안나는 더욱 냉담해진다. 집에 왔으나 집이 아닌 게 되는 셈이다. 전쟁 중에 어떤 심리적 내상을 겪었는지, 안나가 왜 마크를 등한시하는지 자세한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둘에겐 아들이 있다. 아들을 돌보기 위해 가정교사 헬렌(역시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한다)을 들이게 되는데, 안나를 쏙 빼닮은 헬렌에게 마크의 마음이 동한다. 하지만 안나에 대한 사랑을 놓고 싶지는 않다. 마크는 사립 탐정을 고용해 안나의 일상을 추적하다가 하인리히라는 정체불명의 남자,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이와 안나가 외도 중임을 알게 된다. 문제는 ‘또 다른 어떤 이’다. 마크가 고용한 탐정은 ‘그’와 안나에게 살해당한다. 마크는 안나를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나중에 마크는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대략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빤한 치정극의 스토리이지만, 영화는 전혀 빤하지 않다. 초반의 냉랭하고 몽롱한 분위기부터 심상치가 않다. 이자벨 아자니 특유의 넋 나간 듯한 눈빛, 새하얀 피부, 백치와 천사를 동시에 연상케 하는 표정은 시작부터 마음을 비릿하게 쥐어짜는 구석이 있다. 평범한 중산층처럼 보이지만, 적은 대사에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영상들은 이들이 이미 내면 어딘가에서부터 철저히 파괴되어 있음을 암시해준다. 공포물로 홍보되었지만, 웬만한 공포 스릴러보다 더 느릿느릿하고 뜬금없는 장면 연출은 초반 30분 즈음 관람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딘가 끈덕지게 시선을 빨아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영혼을 발가벗은 인간 안에 괴물이 산다
‘포제션’은 ‘소유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뭔가에 씌거나 사로잡히다’는 뜻도 있다. 이 영화는 그 두 개의 의미를 모두 적용할 수 있다. 사랑의 가장 나쁜 경우가 상대에 대한 소유욕 아니던가. 그 ‘소유물’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상실감은 인간을 피폐한 폭력성 앞에 굴복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크가 안나의 냉랭함에 좌절하는 건 곧 모종의 폭력과 자기 상실의 출발이 된다. 앞서 집에 왔으나 집이 없어진 셈이라 말했거니와, 내 것이었던 것이 다른 이의 것으로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발가벗게 된다.
안나는 마크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만난다. 그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이고, 그 ‘무언가’는 마크에게도 안나에게도 공히 존재할 수 있는 어떤 미지의 쾌락과 분출되지 못한 폭력적 욕구의 화신이자 대상이 된다. 안나는 마크의 소유에서 놓여나는 순간, 그 ‘무언가’를 소유하는 동시에 ‘무언가’에 소유된다. 그 ‘소유’는 자발적인 듯 불가항력처럼 보인다. 왜 안나가 ‘무언가’의 노예 혹은 주인(이 두 요소가 양가적으로 공존한다)이 되어 별스러운 쾌락에 빠져들게 되는지 영화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왜 안나가 집 밖으로 나와 모처에서 괴이한 존재와 보기에 끔찍하고 참혹한 사랑을 나누는지, 그 ‘무언가’(이제 괴물이라 하자)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건 모두 영화 속에서 공란이다. 그 공란이 그런데, 모든 사람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모종의 광기와 허기와 환상의 복합체로 채워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안드레이 줄랍스키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한번 ‘사로잡히면’ 웬만한 작품들을 다 뒤져서 보게 된다. 아마 그런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폭력적이고 산만하기 그지없는 영상이지만, 군데군데 보석같이 박힌 시적인 대사와 아름답고 수려한 장면들은 마치 괴물의 입에 박힌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리기도 한다. 거의 모든 작품이 사랑과 죽음, 폭력과 피투성이의 영혼을 다루고 있지만, 다 보고 난 다음의 애잔함은 기묘할 정도로 푸근하고 아득하다. 피가 철철 흐르던 상처가 말끔히 씻기고 새하얀 피부에 흉터로 남은 흔적이 혼돈 그 자체로 매혹적인 타투처럼 여겨진다고나 할까.
괴물을 만난 다음 더 푸르러진 하늘
‘영상으로 표현한 시’라는 표현은 아마 진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제션>뿐 아니라 줄랍스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표현 말고 딱히 다른 수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격렬하고 애잔하고 기괴하면서도 슬픈 시집 한 권을 통독한 다음 텅 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거기엔 방금 전 보았던 끔찍한 장면들이 구름의 얇은 선들이 그려놓은 형상처럼 아련하게 지워질 듯 그려져 있다. 마치, 막 통과해 나온 지옥도 같은 풍경이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욕망과 그로 인한 분투의 투영일 뿐, 실상은 하나도 이상하거나 괴이한 게 아니라는 듯 하늘은 영화를 보기 전보다 더 고요하다.
그 고요 뒤는 또 어떠하겠는가. 온갖 물리적 화학작용으로 파랗게 떠있는 저 거대한 궁륭 뒤편에 수많은 별과 우주먼지를 뒤집어쓴 괴물들이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바로 우주의 실체이고, 사람의 진정한 속내라는 메시지를 줄랍스키는 던지려 했던 건지 모른다. <포제션>은 결국, 광기와 폭력의 충격적 시연을 통해 사랑의 편을 들어주는 영화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H.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뒤섞은 것 같은 영화라는 사견은 뱀꼬리 삼아, 아니, 괴물의 거대한 꼬리 삼아 덧붙인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