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로드무비
스즈메는 일본 열도 동남부의 미야자키현에서 출발하여 동부의 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지진의 원인이 되는 '미미즈'(지렁이)의 출현을 막는다. 이는 지도 어플의 이동경로 쇼트를 통하여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새김된다. 이러한 요소들만 조합해도 <스즈메의 문단속>(2023)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쉬이 연관된다. 이는 일본의 상영 시설이라면 조금 더 와닿는 환경이 세팅될지도 모르겠다. 극중에서 스마트폰이 울리며 지진경보를 날려주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일상처럼 수신하게 되는 지진 신호와 꽤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극장에서는 시작전에 극중에서 지진 경보가 나오니 이에 놀라지 말아달라는 경고 문구를 띄워준다. 그래서인지 관람 중에 뛰쳐나가거나 호흡 곤란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에 악평을 남기기도 했다.
스즈메와 소타는 미미즈가 출몰하는 문을 닫기 위한 여정을 거치면서, 그 비극의 잔허에서 옛 기억을 더듬는다. 비록 극중에서 등장하게 되는 장소는 '한때는 인간이 기거했지만, 이제는 시류에 의해 살게 되지 않아 폐허가 된' 곳이지만, 우리는 이를 지켜보면서 자연재해가 덮쳐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을 비유함을 알고 있다. 실제로 스즈메가 이동을 시작하는 규슈의 미야자키현, 시코쿠의 에히메 현, 간사이 효고현 고베시, 도호쿠 이와테 현인데, 이곳들은 모두 동일본 대지진을 포함한 각종 재해로 인하여 지진의 직접적 피해나 산사태등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고허가 되어버린 곳이다. 큰 지진 이후 십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에 대하여, 혹은 그 곳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렇게 잊히는 일은 건강한 일일까?
적어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딸은 올해 12살로서, 당시의 지진에 관하여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당시의 이재민이나 유족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혹은 후쿠시마의 원전등의 잔여로 인하여 작금까지도 고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연출자는 확실히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고 느낀 모양이다. 희생자, 생존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찰나의 순간에 들이닥친 날벼락이 삶을 송두리채 바꿔버렸다. 게다가 이것은 예고 없이 일어났기에 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불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덮으며 잊히는 형태가 맞는 걸까?
재해로 인한 소멸로 폐허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런 장소에 대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가련함에 대해 왜 아무도 애도를 하지 않는걸까? 연출자의 출발점은 이런 질문이었을지 모르겠다. 스즈메와 소타는 위에 언급된 장소에 덩그러니 놓여 열린 문에서 나오는 미미즈를 막기 위해, 문을 닫으려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그 장소는 동일본 대지진이 실제로 일어났던 날벼락의 진원지로 설정되어 있다. 즉, 그 잊혀져 가는 위치에 관한 기억을 잃게 된다면 언젠가 예보 없이 다가올 비극에 의해 지금도 훗날도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경고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아뢰옵기 송구한 히미즈의 신이여 머나먼 선조의 고향 땅이어 오래도록 배령받은 산과 하천이여 경외하고 경외하오며 삼가 돌려드립니다"
이는 소타가 미미즈의 근원인 문을 닫기 위해 읊어야 하는 주문이다. 이 주문의 핵심은 결국 진심을 담은 상서로운 마음을 전달해야지만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해야 진행되거나 진행될 비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문을 여는 행위는 비록 아프지만 당시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 낸다는 의미가 되며, 연출자는 캐릭터를 통해 마냥 닫아놓을 수 만은 없는 문을 여는 것이다.
이모 캐릭터인 타마키를 보자. 스즈메의 엄마가 젋은 나이에 재해로 사망하자 조카를 덜컥 맡은 그녀에게는 책임감으로 청춘을 날렸다고 여기는 야속함이 남아있다. 그녀는 스즈메와 합류 후 이동 중에 휴게소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내막을 꺼내놓은 그녀들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향후의 모험에 더 큰 힘이 되어 돌아온다. 유사한 엄마와 딸의 관계였지만 이윽고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대지진에 관련하여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삶도 재생될 수 있다는 마코토 감독의 메세지를 읽을 수 있다. 생존자들이 느끼는 트라우마는 다름이 아니라 비극에 대한 언급은 금지된다는 암묵적 규정에 있다. 엄청난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것을 누군가에게 꺼낸다는 것 자체가 일본인 최대의 타부인 '민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상흔을 조심스레 열어보며 위문을 건넬 수 있다면 이는 얼마든지 담론화돼야 한다는 연출자의 전갈인 것이다. 마치, 처음보는 (생존자인) 스즈메를 대하는 인물들이 가출의 이유를 묻거나 신고하기보다는 근거없이 보듬어 주듯 말이다.
세다리 의자
이는 스즈메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다리가 하나 떨어진 의자를 버리지 못하는 지점까지 연결된다. 그녀는 생존자로서, 다행이다라기보다는 살아남아 미안하다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다.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준 선물로 대변된다. 이런 마음을 지닌 스즈메는 어린시절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윽고 자신의 애도와 우울에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스즈메는 진정한 위로를 건네게 된다. 그때가 되어서야 스즈메도 깨닫게 된다, 본질적인 위로는 오직 스스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필요 이상 낙담하거나 기대하되 기대지 않는 태도를 가지는 바탕은 필요하다.
하나의 비극, 두 가지 시점
311 동일본 대지진은 한국 사람들에겐 '후쿠시마 방사능 사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안전지대인 한반도의 피부에 와 닿기엔 지진만으로 부족한 건 자명해 보인다. 그래서 한국인의 눈에는 <스즈메의 문단속>이 전하는 것이 좀 낯선 메세징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일본에서 311은 사람과 집이 떠내려 가는, 생방송에서 본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후쿠시마는 피해를 입은 지역에 포함되는 지엽적 요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알람으로 울리는 지진 경보나, 지상에 상륙한 배 같은 비주얼이 주는 충격적 요소는 사전에 경험을 한 측과 그렇지 않은 관객 측에서 많은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의견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 개봉 20일차에 300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마코토 감독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에서 계단 성지를 찾아갔던 덕후들을 기억할 것이다. 현지에서 천만 관객을 넘긴 <스즈메의 문단속> 또한 등장 장소에 덩그런 문이 등장하며 예전엔 폐허였지만 기억되고 마땅히 재생되어야 할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미디어의 순기능 인 것이다.
우리는 어떨까
백화점과 교각의 붕괴, 여객선의 전복, 축제 중의 압사….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비극은 재해가 아니라 대부분 인재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피해를 봤기 때문에 하늘의 벌이라는 일종의 인과적 정서를 지닌 일본과는 다른 감정을 자아낼 것이다. 한국의 서사 미디어는 어떤 태도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물론 애도가 우선이다. 인본주의를 잊지 말자.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