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B급과 걸작, 그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영화계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가 10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무비 크리틱>이란 제목의 이 영화는 타란티노가 10편만 만들고 은퇴하겠다 누누이 밝힌 것처럼 은퇴작이라고 한다(영화 연출 한정이긴 하지만). 덕분에 영화 팬들은 벌써부터 아쉬움을 표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기획했던 다른 영화들을 볼 가능성도 이제는 사라져버렸기 때문. 마지막 작품을 앞두고 타란티노가 만들 뻔, 혹은 제작할 뻔한 영화들을 정리해본다.


<헤이트풀8> 오리지널 버전

<헤이트풀8>

어쩌면 그 어떤 영화보다 궁금한, <헤이트풀8>. '<헤이트풀8>은 완성했잖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일종의 수정판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처음 탈고한 <헤이트풀8>은 본격적인 제작 착수 전, 유출됐다. 사전에 시나리오를 받은 누군가가 시나리오를 유출하자, 타란티노는 영화를 아예 엎으려고도 했다. 다행히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쪽으로 마음먹고 제작된 것이 현재의 <헤이트풀8>. 영화 개봉 후 타란티노는 원래의 시나리오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배우들을 불러 낭독회를 여는 등 유출 시나리오를 굳이 말소하려 하진 않았다. '8명의 사람들이 폭설 때문에 산장에 갇힌다'는 기본 컨셉은 동일하나 캐릭터 성격, 대사, 전개 등이 모두 달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작품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헤이트풀8>은 개봉 직전에도 상영본이 유출되는 되는 등 타란티노 영화 중 유독 고초를 많이 겪었다.

유출된 <헤이트풀8> 시나리오 (오른쪽)


<루크 케이지>

마블 스튜디오의 시리즈 <루크 케이지>

감독이 아닌 인간 타란티노의 가장 큰 정체성이라면 역시 '마니아'라는 점일 것이다.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구장창 영화만 봤다는 일화를 비롯해, 그 스스로 각종 미디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타란티노가 코믹스 원작 영화를 만들지 않은 건 은근히 신기한 일이다. 사실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로 데뷔한 후 마블 코믹스의 '루크 케이지' 영화를 연출하고 싶었다. 마블과 제안을 주고받은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를 막은 건 그의 친구들이었다고. 타란티노는 로렌스 피시번을 루크 케이지 역으로 고려하고 있었는데, 그의 친구들이 그 말을 듣자마자 "로렌스 피시번보다는 웨슬리 스나입스가 맞지 않냐"며 반박했다는 것. 타란티노는 말론 브란도에 비유하며 피시번의 매력을 높게 산 반면, 친구들은 스나입스의 체격과 무술 실력을 우위로 두었다. 결국 타란티노는 친구들의 말에 설득당했고, 루크 케이지 영화에 대한 구상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2016년, 마이크 콜터가 루크 케이지를 맡은 드라마 <루크 케이지>가 공개됐다.

<매트릭스> 모피어스로 유명한 로렌스 피시번의 <보이즈 앤 후드>


<스타트렉> R등급 영화

<스타트렉> 리부트 영화 시리즈

세계 3대 SF, 50년 전통(?)의 SF, <스타트렉> 프랜차이즈는 1966년 드라마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특히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이어진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는 SF가 대중적인 인기와는 거리가 있는 한국에서도 호평받고 인기를 모으며 그 이름을 다시금 알렸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흥행 대박'은 아니었기에 <스타트렉: 비욘드> 이후 시리즈의 향방이 다소 묘해졌는데, 그때 나온 기획안이 쿠엔틴 타란티노가 <스타트렉> 신작을 맡는 것이었다. 오리지널 시리즈 시즌 2 17화 ‘A Piece of the Action’를 기반으로 '스타트렉식 펄프 픽션'을 만들 예정이었다(원작 에피소드부터가 1920년대 갱스터풍의 행성이 배경). 타란티노답게 R등급(청소년 관람불가)을 지향한다고 알려져 'R등급 스타트렉'이란 별명을 얻었다. 발표 당시엔 시나리오가 완성됐고 타란티노 감독도 적극적이라 금방 착수할 듯보였는데, 점점 장기화되더니 2020년엔 타란티노의 하차 소식이, 2022년엔 제작 취소 소식이 이어졌다. 현재 <스타트렉>은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와 <스타트렉: 피카드> 시리즈로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타란티노가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A Piece of the Action’ 에피소드 캡처


<반지의 제왕> 2시간 30분판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삼부작 포스터

쿠엔틴 타란티노는 본의 아니게 <반지의 제왕> 영화를 맡을 뻔하기도 했다. 타란티노 본인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영화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피터 잭슨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반지의 제왕> 방향성을 두고 끊임없이 제작했다. 피터 잭슨은 영화를 온전히 만들기 위해선 (지금처럼) 삼부작 구성이 반드시 필요하고, 와인스타인은 제작비를 충당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영화를 2시간 30분 안에 끝내라고 반박했다. 이렇게 갈등이 거듭되던 중 하비 와인스타인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터 잭슨을 강판시키고 쿠엔틴 타란티노나 존 매든(<셰익스피어 인 러브>)에게 연출을 맡기겠다고 최후통첩했다. 피터 잭슨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차라리 다른 배급사를 구하는 걸 선택했고, 뉴 라인 시네마를 만나 지금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한 제작자의 고집 때문에 두 감독의 명운이 뒤바뀔 뻔한 건데, 타란티노가 '할 뻔한 영화' 중 일어나지 않아 다행인 유일한 영화일 것이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 카지노 로얄>

피어스 브로스넌은 <007 골든 아이>부터 <007 어나더데이>까지 제임스 본드를 맡았다.

오리지널 영화만 줄줄이 만든 쿠엔틴 타란티노라서 그런지, 그가 프랜차이즈 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루크 케이지 실사 영화'를 구상하고 다양한 영화를 레퍼런스로 삼는 그가 프랜차이즈에 아예 관심 없을 리는 사실 만무하다. 타란티노가 정말로 관심을 보였던 프랜차이즈는 <007>이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을 정말 좋아한 그는(그 시절 <007> 영화는 별로였다면서도) 피어스 브로스넌을 만나 “같이 007 영화를 하자” 말하고, <킬 빌> 개봉을 앞두고 “<007> 연출에 관심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타란티노의 매운맛이 <007>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007 영화 판권을 쥔 EON 프로덕션은 마틴 캠벨과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다음 타석이 제공됐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하차 후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 제임스 본드로 출연한 <007 카지노 로얄>

피어스 브로스넌이 007에서 하차하고 난 다음 영화가 <007 카지노 로얄>인데, 쿠엔틴 타란티노 또한 「카지노 로얄」을 영화판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렇게 제작사 EON 프로덕션과 타란티노가 「카지노 로얄」을 노렸던 이유는 원작 소설 시리즈의 1편이란 상징성도 있지만, 당시 「카지노 로얄」은 제작사에서 판권을 소유하지 않은 유일한 007 소설이었기 때. 피터 셀러스가 007를 연기한 코미디(!), 1967년 <007 카지노 로얄>이 나온 것도 EON 프로덕션이 판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 그렇게 타란티노는 1967년 영화처럼 '맹점'을 노리고 '피어스 브로스넌 007의 카지노 로얄'을 구상했지만, 그전에 EON 프로덕션에 판권을 취득하면서 아쉽게도 무위로 돌아갔다.

판권의 맹점을 이용한 1967년 '코미디 영화' <007 카지노 로얄>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