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지브리도 디즈니의 뒤를 이어 실사화의 길을 가려 하는 걸까.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 가운데 한 편인 <귀를 기울이면>이 실사 영화가 되어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실사 리메이크 프로젝트는 아니다. 사실상 원작 애니메이션의 주인공과 동일한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이번에 개봉한 실사판 <귀를 기울이면>은 원작 애니메이션의 후일담과 같은 일종의 속편이다. ‘실사화’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꽤나 냉정하고 어떤 관객은 선입견까지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귀를 기울이면>은 과연 20세기의 원작 팬들과 21세기의 젊은 관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원작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며, 이번 실사판 <귀를 기울이면>이 그려보고자 했던 비전이 무엇일지 함께 유추해보자.
※ 제목이 동일한 관계로 편의를 위해 원작 애니메이션을 [귀를 기울이면]으로 표기한다.
지브리 러브스토리 계보의 완성
원작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은 미래와 희망에 관한 영화일까. 혹은 지고지순한 첫사랑 러브스토리일까. 이 영화를 어느 쪽으로 평가하든, 원작 [귀를 기울이면]이 만들어지던 당시에 이 작품이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래를 책임져줄 작품이라 여겼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힘들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총애하던 콘도 요시후미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원작 [귀를 기울이면]은 다른 지브리 작품들과 비교해 분명한 특징을 지닌 작품이었다. 독특한 상상력이나 판타지 장르 기반이 아닌, 잔잔한 시골 풍경과 함께 소년 소녀들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 천착하는 작품은 대중이 보기에도 좀 낯설었다. 하지만 이 영화 직전 지브리가 공개한 <붉은 돼지>는 <이웃집 토토로>나 <마녀 배달부 키키>에 비하면 비교적 성인 관객을 위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행사 포르코의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사랑의 상처가 스스로를 돼지로 살게 만드는 족쇄처럼 묘사되는 것을 어린 소년 소녀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붉은 돼지>의 러브스토리에는 운명, 인연과 같은 만남의 끈에 관한 환상이 강하게 느껴진다. 지브리의 공식적인 첫 작품 <천공의 섬 라퓨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난데없이 떨어진 소녀 시타와 고아 소년 파즈의 절절한 순애보는 어른 관객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브리식 러브스토리의 원형에 가깝다.
[귀를 기울이면]의 주인공도 십대 소년 소녀다.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과정에서 깨닫은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바라보자면, 이 작품은 지브리 작품 세계의 러브스토리 계보 맨 끝에 놓이는 영화다. 그렇다면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실사판 <귀를 기울이면>은 어떨까. 2023년 4월 19일에 국내 개봉한 이 영화는 2022년에 제작된 영화로 오리지널 [귀를 기울이면]의 이야기에서 10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게 단단하고 투명하게 결혼을 약속했던 두 소년 소녀의 마음이 현실과 미래라는 파도에 부딪쳐 흔들리고 깨지게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바람이 분다> 역시도 청춘 러브스토리 <귀를 기울이면>에 빚을 지고 있는 후기작들이다.
[귀를 기울이면]의 10년 후를 그리다
원작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은 주인공 시즈쿠가 우연히 길고양이에 이끌려 길을 헤매다 골동품 가게를 찾게 되고, 그곳의 주인 할아버지 손자인 세이지와 엮이게 되면서 꿈과 미래, 그리고 사랑을 약속하게 되는 이야기다. 실사판 <귀를 기울이면>은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여전히 시즈쿠와 세이지는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혹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는지를 질문하는 이야기로 완성됐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과 작품의 주제 면에서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어른이 된 시즈쿠와 세이지는 여전히 그들의 꿈을 좇는 과정에 놓여 있다. 방황하는 청춘의 모습 그대로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물론 완벽에 가까운 원작이 원형이기 때문에 소년 소녀 시절의 주인공들 모습을 전혀 담아내지 않는 것 또한 결정하기 어려운 도전이었을 거다. 원작의 아우라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올드팬과 새로운 관객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숙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10년 후의 현재를 다루면서 플래시백을 통해 유년시절의 모습 또한 동시에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극중 시즈쿠와 세이지가 아역 배우와 성인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해 등장시켰다.
달라진 캐릭터 구도
성인이 된 현재의 시즈쿠는 어릴 때부터 써보고 싶었던 소설을 완성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일하고 있는 출판사의 편집부도 전형적인 현실 타협형의 뻔한 직장에 불과하다. 반면 세이지는 일찍부터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부지런하게 꿈을 쫓으며 나아가는 중이다. 사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는 일찌감치 진로를 정한 세이지가 불안함을 안고 살고 있으며 스스로 본인의 실력이 아직 모자라다고 말하는 친구였다. 반면에 시즈쿠는 당돌하고 저돌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10년 후의 실사판 <귀를 기울이면>에서는 원작 속의 캐릭터 구도가 뒤바뀌게 된다. 날이 곧게 선 청춘의 예리함이 세월에 마모되서일까. 이탈리아 유학 후 착실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세이지, 그런 그를 부러워하는 시즈쿠는 점점 자존감이 바닥을 찾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심지어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10년 전의 결혼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의문을 품게 된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상징과도 같은 삽입곡 ‘컨트리 로드’의 노래말은 10년 전의 시즈쿠와 10년 후의 시즈쿠 즉, 과거와 현재의 시즈쿠 모두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노래 같다.
“홀로됨을 두려워 않고 힘내서 살기로 꿈을 정했네.
외로움을 억누르고 굳은 마음으로 살아왔네.
컨트리 로드, 이 길을 계속 따라가면 고향에 닿을 듯한
생각이 드는 컨트리 로드.”
거장이 전하는
젊은 세대들을 향한 메시지
실사화 프로젝트가 거의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가 원작의 훼손에 관한 지적이다. 원작의 아우라를 보존하는 방식의 캐스팅과 연출은 쉽지 않은 문제다.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이 가장 중요한 각색 포인트로 삼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실사판 <귀를 기울이면>을 보고 나면 이에 대한 의심은 바로 거두게 될 것 같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시즈쿠가 우연히 골동품 가게를 발견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응원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은 세이지가 당차게 고백하던 순간만큼 시즈쿠의 삶을 뒤흔들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다. 시즈쿠라는 캐릭터 자체가 바로 [귀를 기울이면]이 청춘의 사랑 고백만을 포커스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실사판의 제작진도 이를 받아들여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가는 시즈쿠의 심리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자기 안에 담겨 있는 원석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표현한 할아버지의 조언을 가슴에 새긴 시즈쿠는 과연 그녀만의 원석을 어떤 모습으로 다듬게 되었을까. 원작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던 콘도 요시후미 감독은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두 신구 거장 감독들의 조화로운 작업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지만 영원히 볼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상상하면서 10년 후의 후일담, <귀를 기울이면>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뭔지 극장에서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김현수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