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뉴욕 영화광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한국인이 있었다. 그는 미국 예술계의 중추라고 불리는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혈혈단신으로 비디오 대여점을 세웠다. 가게 이름은 자신의 성씨인 ‘킴(Kim)’을 호기롭게 붙인 ‘킴스 비디오 (Kim’s Video)’였다. 1986년 그가 비디오 대여점을 개업했던 때는 VHS 비디오테이프 대여 산업이 급성장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블록버스터, 로저스 비디오, 웨스트 코스트 비디오 등 전미 최대의 비디오 대여 체인들이 사업을 시작하고, 점포를 점차 늘려가고 있었다. 우후죽순 여러 비디오 대여점이 등장했지만, 뉴욕의 ‘킴스 비디오’는 어딘가 달랐다. 흔하디흔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그 자리에는 낯선 이름과 낯선 나라의 영화들이 가득했다.
1979년 21살의 나이로 뉴욕에 이민 온 김용만 사장이 세운 ‘킴스 비디오’는 뉴욕 시네필들의 성지였다. 뉴욕에서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무조건 킴스 비디오를 방문해야 했다. 킴스 비디오는 뉴욕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 심지어 뉴욕 주립 도서관보다 훨씬 빠르게 예술, 독립, 실험 영화를 수급했기 때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마틴 스콜세지, 스파이크 리, 코엔 형제, 밥 딜런까지. 뉴욕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전부 킴스 비디오의 단골 회원이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조커>의 토드 필립스는 킴스 비디오에서 짧게나마 직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으며, 코엔 형제는 600달러의 연체료를 물어야 했다.
VHS 비디오 산업이 DVD로 이관될 때까지만 해도 건재했던 영화 대여 산업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때 맥도날드만큼 점포를 늘렸던 초대형 영화 대여 체인 ‘블록버스터’는 2010년 파산했고, 현재는 오리건주 밴드시에 유일한 점포를 남긴 채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용만 사장의 킴스 비디오도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08년 마지막 지점이었던 ‘문도 킴’ 매장마저 폐점하며, 킴스비디오도 뉴욕 시네필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킴스 비디오의 폐점 이후 최대 관건은 김용만 사장이 소장하고 있던 30만 개에 가까운 비디오, DVD, 35mm 필름의 행방이었다. 그 많은 비디오 테이프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두가 그 소식을 궁금해했다.
킴스 비디오의 단골 회원이었던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새이빈 감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킴스 비디오>(2023)를 시작했다. 사라진 킴스 비디오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그들은 뉴욕 시민들을 만나고, 킴스 비디오의 단골과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김용만 사장이 소장했던 55,000편의 컬렉션이 뉴욕의 대학도, 도서관도, 영화 기관도 아닌 이탈리아의 소도시 살레미에 보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번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시네필 전주’ 섹션으로 관객들과 만났던 <킴스 비디오>는 4월 28일, 30일 상영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자마자 박수갈채와 환호가 쏟아져 나왔고, 김용만 사장이 직접 참여한 두 번의 GV 행사는 만석을 이뤘다. 김용만 사장과 킴스 비디오, 그리고 55,000편의 컬렉션의 행방을 쫓는 영화 <킴스 비디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뉴욕의 미스테리한 사나이, 용만 킴
대다수의 킴스 비디오 직원과 단골들은 김용만 사장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는 매장에 자주 있기보다는 좋은 영화를 수급하기 위한 팀을 구성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직원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고 했다. 혹자는 그의 우람한 풍채와 남다른 카리스마를 두고 마치 ‘마피아 보스’와 같았다고 증언했다. 예술적 조예가 매우 깊기로 소문난 1980-90년대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도 차마 접하지 못한 영화를 어디선가 뚝딱하고 가져오는 김용만 사장의 모습 때문에 그의 정체에 대한 소문만 무성했다. 영화 <킴스 비디오>도 그의 컬렉션을 좇기에 앞서 김용만 사장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어린 시절 우연한 계기로 본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로 영화에 매료된 김용만 사장은 이른 나이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의 SVA(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에서 영화 프로덕션을 전공했고, 라마포 대학에서 영화사를 전공하며 공부를 이어 나갔다. 그 시절 그가 촬영한 단편 <자화상>은 <킴스 비디오>에 몇 장면 수록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는 학생 시절부터 7편의 단편을 연출하고, 2006년에는 단테의 3부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첫 장편 <1/3>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킴스 비디오를 운영하면서도 한국 영화계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1996)와 <삼공일 삼공이>(1995)의 총괄 프로듀서 및 배급을 담당했다. 그는 뛰어난 영화 수집가이자 아카이비스트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화 연출에도 끊임없이 열정을 쏟은 영화인이기도 했다.
55,000편의 컬렉션을 되찾기 위하여
<킴스 비디오>가 컬렉션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해당 소장품들은 이탈리아의 소도시 살레미에 보관되어 있었다. 2014년 여러 대학과 도서관에서 비디오들의 기증을 부탁했지만, 살레미의 시장이 그의 컬렉션을 통해 방대한 문화적 교류를 약속하며 끝내 김용만 사장과의 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실상은 처참했다. 당시 살레미의 시장은 컬렉션의 소장과 관련하여 마피아와의 정치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던 상태였고, 킴스 비디오의 이용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작품을 무료 상영해 준다는 약속은 백지화되었다. 55,000편의 귀중한 영화들은 단 한 편도 살레미 시민을 비롯한 누구와도 만나지 못했으며, 방대한 비디오를 보관한 창고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비가 줄줄 새고 습기가 가득 찬 창고의 컨디션 때문에, 많은 비디오가 곰팡이가 피어 쓸 수 없는 상태였으며,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먼지가 가득 쌓여 과연 재생될 수 있을지 상태가 의심될 정도였다.
<킴스 비디오>의 두 감독은 그 순간 영화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이 비디오들이 자신을 향해 ‘나가고 싶다’라며 아우성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당시 살레미의 시장을 만나려 했고, 마피아 담당 수사관을 만나기도 했으며, 현 살레미의 시장과도 이 문제를 논의하려 했다. 하지만 문제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고, 그는 김용만 사장을 직접 만나 그와 살레미로 향한다. 형편없이 망가진 자신의 컬렉션을 목격한 김용만 사장은 현 살레미 시장에게 보관 상태를 개선해달라고 촉구하지만, 그는 소극적인 반응만 보일 뿐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킴스 비디오>의 두 감독은 엄청난 묘수를 발견한다. 그리고 대담하고 터무니없는 시도로 컬렉션을 반환하기 위해 노력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직접 <킴스 비디오>를 관람하며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당신이 진정한 영화광이라면, 장담하건대 가장 짜릿한 영화적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폭발적인 반응! 김용만 사장과 함께한 GV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된 <킴스 비디오>는 주인공 김용만 사장과 함께 2차례 GV를 진행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김용만 사장이 GV를 위해 객석에서 내려오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다소 비밀스러운 인물이었다는 영화 속 증언과 달리 김용만 사장은 매우 적극적이고 호방하게 관객들과 함께했다. 그는 자신이 출연한 <킴스 비디오>에 대해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작업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알고 있다. 애슐리 새이빈과 데이비드 레드먼 감독이 6년간 이 영화를 찍으면서 고생했는데, 참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소장품의 상태를 보고 속상해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권한 밖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복잡한 심리가 느껴지는데, 당시의 심정이 궁금했다”는 관객의 질문에 그는 “2008년 마지막 지점 몬도 킴의 폐업 확정 당시 뉴욕 타임스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나는 스스로 패배자라고 이야기했다. 나의 사업을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분노와 오기의 감정이 더 컸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비디오를 완전히 잊어야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라는, 영화 속에서는 미처 밝히지 못했던 킴스 비디오 폐업 당시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킴스 비디오에는 19, 20살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영화를 킴스 비디오의 레이블을 붙여 매장에 진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섹션을 스콜세지 감독이 가장 사랑했고, 나 역시 굉장히 좋아했다”, “뉴욕대학(NYU) 필름스쿨과 컬럼비아 필름스쿨에 킴스 비디오 장학금이 따로 있었다”라고 밝히며, 킴스 비디오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들도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최근에는 킴스 비디오가 다시 살레미와 “씨네 킴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교류를 재개했다는 소식 역시 들을 수 있었다. 1회 영화제에서는 귀향의 여정이라는 뜻을 지닌 오디세이를 영화제의 콘셉트로 삼고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들을 상영했었다. 그는 소도시에서 시작되는 “씨네 킴 페스티발”이 나아가 유럽의 다양한 소도시와 교류하며 문화적 토양을 다져나가 확산되기를 기원했다. 킴스 비디오의 성공 그 너머로, 김용만 사장은 영화와 문화의 확산을 꿈꾸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 나가고 있다.
사진제공 = 전주국제영화제
글=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