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필드>

재기를 꿈꾸는 꼰대 드라큘라를 소재로 한 영화 <렌필드>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와 니콜라스 홀트의 연기 조합은 영화의 완성도를 잠시 잊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한때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재능 낭비에 가까울 정도의 다작을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 <피그> 같은 작품에서 여전히 놀라운 연기를 꾸준히 보여주고 있어서, 배우의 연기라는 건 세월이 지나도 마모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새삼 갖게 된다. <렌필드>란 영화에 대한 소개도 좋지만 이번에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활약상을 잘 모르는 젊은 관객을 위해 OTT에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숨은 명작을 소개해보려 한다. 누구나 아는 명작도 있고 과거엔 유명했으나 시간이 흘러 언급 빈도가 급격하게 줄어든 작품도 있다. 취한 연기의 달인 니콜라스 케이지의 미친 매력을 뽐내는 작품들을 다시 만나보자.


광기어린 눈빛 연기의 시작 <광란의 사랑>

네이버 시리즈온, 웨이브, 왓챠에서 시청 가능

공개 당시에도 호불호가 강하게 나뉘었다고 전해지는 논란의 영화. 데이빗 린치 감독 작품으로 1990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어느 괴팍한 여인이 자기 딸을 사랑하는 남자를 청부살인 하려는 내용으로, 니콜라스 케이지는 상대 배우 로라 던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는 커플을 연기한다. 많은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두고 지옥도 속에서 불타는 사랑을 나누는 커플의 이야기라고 평가한다. 미래의 안녕 따윈 안중에도 없이 오직 순간의 사랑을 위해 육신을 불사르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을 연기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탁월한 캐스팅이었다. 극중 니콜라스 케이지의 갑옷 같은 옷으로 뱀가죽 코트를 입고 등장하는데 영화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코스튬이다.

<광란의 사랑> 포스터. 니콜라스 케이지의 뱀가죽 코트가 화려하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 세일러의 캐릭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외형은 물론 성격이나 아우라마저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력을 대놓고 차용하려고 만든 인물이었다. 영화 전체의 스타일이나 이야기는 데이빗 린치 감독이 <오즈의 마법사> 스토리를 뒤틀어서 괴상한 로드무비로 완성시켰다. 요즘은 이런 미친 러브스토리를 다룬 영화를 잘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과감하게 스타일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배우들 또한 절제 따윈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과장되고 넘쳐나는 연기를 선사한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광기 어린 눈빛 연기는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진가가 발휘되지만 그 이전부터 <광란의 사랑> 같은 작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인생에 취하고 연기에 취하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네이버 시리즈온, 웨이브, 티빙,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

죽기로 결심한 한 남자가 라스베가스로 향한다. 그곳에서 남자는 역시 밑바닥 인생을 사는 거리의 여성(엘리자베스 슈)과 만나 고통과 절망의 순간을 함께 한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하는 앞뒤 재지 않고 영혼을 불사르듯 무언가를 향해 질주하는 캐릭터들은 그의 출연작 가운데에서 꽤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고스트 라이더>에서 악마에 영혼을 파는 모터사이클 스턴트 챔피언 조니 블레이즈, 사이비 교주에게 아내가 살해당하자 복수를 다짐하고 피칠갑을 하는 <맨디>의 레드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데 니콜라스 케이지가 쏟아내는 남성성이란 어딘지 모르게 꺾여 버린 순간, 억압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술에 취한 연기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한다고 느끼곤 하는데, 그것이 곧 배우의 매력을 뜻하는 것이리라. 삶의 의지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기력하고 참담한 순간에 아주 잠깐 반짝하고 빛나는 사랑의 순간을 연기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 강렬한 작품이다. 저명한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당시 이 영화를 1995년 개봉한 영화 중 최고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사랑의 상태 <시티 오브 엔젤>

LG유플러스 모바일tv에서 시청 가능

니콜라스 케이지는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를 연기할 때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흔히 페이소스가 느껴진다고 표현하는 어떤 연기의 상태가 있는데 니콜라스 케이지가 특히 그런 상태를 잘 표현한다. 그는 영화에서 무언가를 상실한 것 같은 심정이 두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혀 있다거나 초점이 흐릿한 상태에서 망연자실해하는 표정, 삶의 무료함을 표현하는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보일 때가 많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1990년대 후반 최고 흥행과 인가를 구가했던 블록버스터 영화 <더 록> <콘 에어> <페이스 오프> 같은 영화에서 액션 연기를 선보임과 동시에 특유의 감정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이 영화도 선택하게 된다. <시티 오브 엔젤>에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관장하는 천사다. 그런데 하필 그가 외과 의사 메기(맥 라이언)와 사랑에 빠지면서 천사이길 포기하고 인간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아름답지만 유한하고 또 그래서 더욱 잔인한 사랑의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 사랑의 아름다움, 삶의 잔혹함, 굳이 말로 표현할수록 장황해지는 어떤 삶의 숭고한 순간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순간 중에 하나다. 앞서 소개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스팅의 명곡 ‘Angel Eyes’나 ‘My One And Only Love’가 영화의 품격을 더해주는데 <시티 오브 엔젤> 역시 사운드트랙이 정말 좋다. 사라 맥라클란의 ‘Angel’이나 구구돌스의 ‘Iris’같은 곡들이 니콜라스 케이지, 맥 라이언의 연기와 더불어 특히 사랑을 받았다.


악의 근원과 맞닥뜨렸을 때 <8미리>

쿠팡플레이, 왓챠에서 시청 가능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언급이 잘 안되는 <스네이크 아이>에 출연했던 니콜라스 케이지는 뒤이어서 조엘 슈마허 감독과 <8미리>라는 영화를 찍는다. <스네이크 아이>에서는 부패한 형사였지만 <8미리>에서는 사설탐정으로 등장하는데 두 작품의 캐릭터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당시 대규모 예산의 액션 스릴러를 통해 작품성마저 드러낼 수 있었던 감독들이 니콜라스 케이지란 배우에게 원했던 어떤 탐정/형사의 역할이 있었던 것 같다. 심드렁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듯 보이지만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의 근원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어드는 인물의 유형 같은 것이 니콜라스 케이지의 캐릭터들에서 느껴진다. <스네이크 아이>보다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었고 개봉 당시에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8미리>는 <배트맨> 시리즈를 망쳤다는 조롱 섞인 비난을 들었던 조엘 슈마허 감독이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스너프 필름 소재의 스릴러 영화 <8미리>에서 끔찍한 범죄의 온상을 파헤치는 탐정 니콜라스 케이지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눈빛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힐 중요한 연기의 순간이다.

영화 소재가 소재인지라 관객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대리 체험하는 듯한 연기.


미친 연기의 정수 <악질경찰>

네이버 시리즈온, 웨이브, 티빙, 구글플레이무비에서 시청 가능

니콜라스 케이지의 2000년대 이후 대표작 중에는 <내셔널 트레져> 시리즈나 <고스트 라이더>, <노잉>, <마법사의 제자> 등 비교적 어린 연령대의 관객들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 등이 자주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유독 그의 출연작 중에서 돋보이는 ‘미친 연기’를 선사하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악질경찰>이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렌필드>에서 니콜라스 홀트와 인간의 피를 서로 탐하는 연기 정도는 <악질경찰> 앞에서는 워밍업에 불과하다. 최근 그가 <맨디> 같은 피칠갑 호러 영화에 출연해서 분노와 광기에 휩싸이는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악질경찰>의 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하는 뉴올리언스 경찰 테렌스는 근무 중 부상으로 심각한 허리 통증을 달고 살면서 진통제와 코카인, 대마초 등의 불법 약물에도 손을 대는 인물이다. 불법 도박업자들로부터 쫓기는 신세이면서 살인사건 수사도 해야 하는, 인생 막장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함인지 수렁에 더욱 깊이 빠지기 위한 건지 모를 이상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역대 니콜라스 케이지의 신경증적인 연기에 있어서 가장 날이 서있는 모습을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마치 <내셔널 트레져> 시리즈에 출연했던 훈훈했던 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현수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