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니셰린의 밴시>의 엔딩에 관한 묘사가 포함돼있음을 미리 명시한다.
어떤 역사
기나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다. 이윽고 조금씩 승리를 맛보며 곧 독립이 눈앞이구나 싶었다. 그 기쁨도 잠시, 국내에서의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자치령을 받아낸 것만으로 만족하자는 생각이 대립했다. 결국 이 갈등은 곯았고, 내전이 발발했다. 같은 인종과 종교를 가진 민족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승리한 측의 생각대로 국정은 흘러갔지만, 반대파들은 긴 세월 동안 테러를 자행했고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결국 이를 반대하던 시민들의 가두행진에 정부는 발포했고 힘없는 민간인들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했다.
기시감
방금 문단만 봤을 때 일제강점기를 거친 조선이 열강의 칼질 아래에서 스스로 독립하지 못해 남북으로 갈라진 후 6.25라는 내전을 치르고 비극은 흐르고 흘러 5.18까지 갔던 대만민국을 보는 듯한 인상이 들 수도 있겠다. 실은 이는 영국 옆에 위치한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품은 현대사의 비극이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내전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는 형제를 보고 있으면 우리네 영화인 <태극기 휘날리며>(2004)에 대한 기시감이 떠오르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아일랜드 출신 밴드 U2의 'Sunday, boody sunday'를 듣고 있으면 광주항쟁에 관한 민중가요가 부르짖는 정신과 상이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내전이라는 소재,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이니셰린의 벤시>(2022)는 1922년 아일랜드의 어느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시작과 동시에 파우릭(콜린 파렐)은 절친인 콜름(브렌단 글리슨)에게 이유없는 절교 선언을 당한다. 콜름은 남은 인생을 그간 떠들었던 잡담 없이 보내고자 한다는 핑계를 대지만, 의미가 없다. 콜름의 절교 선언에 이유가 없다는 것, 이것은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자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주요한 지점이 된다. 실은 나도 이 영화를 바라보는 거대한 포커스를 내전에 맞췄다. 그러나 맥도나 감독이 펼치는 특유의 다종다양한 심상들은 ‘아무렴 어때’하는 인상까지 준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관계가 주는 심상
아일랜드 내전으로부터 한 세기, 이 영화에는 내전에 대한 언급은 되지만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섬 '이니셰린'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쟁과 이격된 채 살아간다. 섬에는 총탄이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반군이 숨어있거나 하지도 않는다. 즉,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내전에 관련한 어떤 묘사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반응을 은유적으로 이용하는 스케치에 가깝다. 그래서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전쟁 이후의 현재까지를 떠올릴 수 있는 성질에 가깝다. 간극을 두고 전쟁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괴상한 일상을 조성한다.
파우릭은 다정함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추구하며, 자신과의 절교를 선언한 콜름을 설득하는 최전선에서 그 가치를 피력한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콜름에게 다정함이란 한낱 먼지 같은 것이고 인간은 업적이나 공로로 기억된다는 기묘한 허무주의가 찾아온다. 그는 그러한 공적을 음악, 길이 기억될 훌륭한 음악이란 영원한 가치를 통해서 이룩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인 동시에 콜름의 곡이기도 한 ‘이니셰린의 밴시’는 결국 끝까지 연주되지 못하고 끝을 맞이한다. 삼일에 걸쳐서 작곡을 완성할 뻔도 했으나, 콜름은 자신의 신념으로 손가락을 자르는 바람에 결국 이룩하지 못한다.
17세기가 아닌 18세기 인물인 모차르트 같은 업적에는 다가가지 못한 콜름(심지어 그는 그가 몇 세기에 살았는지조차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주요 가치였던 다정함 또한 해결방법이 아니었던 파우릭. 이야기는 그 어떤 캐릭터의 수단도 성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즉, 연출자는 둘의 논쟁에 있어서 그 어떤 편에도 서지 않는다.
이것을 아일랜드의 내전에 대입하면 그것은 선과 악이 대결하는 전쟁이 아니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혹은 나은 것과 더 나은 것의 대립이라는 딜레마에 가까운 상황에 비유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엔 답이 없다. 그래서 명확한 답보다는 적확한 질문이 문제 해결의 본질에 가깝다는 격언도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주로 파우릭의 애절한 시도들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와 콜름은 결국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수도, 생판 남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종료를 맞이한다. 아마, 이런 것이 우리네가 대부분 맞이하는 갈등들의 민낯과 실제가 아닐까? 세상의 상충과 불협화음은 어디에나 있고, 돌파구는 이다지도 접하기 힘들다는 은유가 되는 것이다.
현재로의 은유
맥도나 감독은 스스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곤 했지만 실은 그렇다고 하기엔 영화에서 파생될 수 있는 질문은 밀도 높고, 심지어 요즈음의 국제정세까지 흥미롭다. 아일랜드의 많은 비극은 영국이 창밖으로 던진 쓰레기 같은 것에서 촉발됐었다. 그러나 대영제국 시절에서 해가 지기 시작한지 오래고,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에 퍼지는 독립의 기운으로 이제는 내재된 긴장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와중에 유럽의 최빈국에 속했던 아일랜드는 아사를 피하기 위해 대량 이주해야 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금융강국으로 떠올라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딛고 지금은 국민소득 2위에까지 올랐다. 지금은 상승국면처럼 느껴지지만, 이 모든 것을 원동케하는 근본은 항상 옳은 쪽으로 나아갔던 역사적 경로에서 온 것일까?
모든 소동이 지나가고 해변에선 두 남자는 대화를 나눈다. 전쟁이 끝나가는 모양이라는 콜름에게 파우릭은 분명 조만간 다시 시작할 거라며 그냥 넘기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고 한다, 그게 옳은 것 같다고. 내전은 유야무야 마무리되어 평화를 준 것 같았지만 내내 위태로운 테러 정국을 만들었고 급기야 1972년에는 ‘피의 일요일’(앞서 언급한 U2의 곡이 다룬 사건)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불렀다. 파우릭이나 콜름이나 자신이 옳다고 믿은 것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가치들이었고,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과정을 거쳤다. 거기까지 가고 나니 지금도 바뀐 생각 또한 맞지 않을 것이라는 경지까지 가면서 영화는 엔딩을 맞이한다.
이런 식의 초조함은 한국인에게도 어색하지 않다.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식민통치와 동족상잔을 거치고 갑작스러운 선진국의 행열과 헬조선을 모두 거치고 있는 작금의 우리들이 낼 수 있는 자성의 목소리는, 그 범위가 어디까지 일까? 고사하고 자성은 가능할지 질문을 던져보자.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