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 지렁이가 일어서서 걸어 다닐 수 없고, 코끼리가 앞발로 먹이는 집어먹을 수 없는 것만큼 당연한 얘기다. 모든 생물의 활동 방식과 습성의 당연함은 자연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했다. 비행기가 그렇게 탄생했다. 이건 자연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인가.
새가 되려 한 젊은이의 이야기
지금 세상에서 비행기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걸 망상이라 치부했던 불과 150년 전과는 상반되는 사실이다. 그것을 인류는 진보 혹은 발전이라 칭한다. 비행기뿐만이 아니다.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류의 삶에 엄청난 변혁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사람의 몸엔 별다른 진화도, 혁신적인 발달도 진행되지 않았다. 사람은 그 스스로의 몸으로 여전히 하늘을 날 수 없다. 그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인간의 한계다.
알란 파커 감독의 <버디>(1984)는 새가 되려 한 젊은이(매튜 모딘)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그로 인한 좌절과 고통에 대한 영화다. 우스꽝스럽기도 발랄하기도, 슬프기도 아프기도 하다. 그 모든 감정은 애초에 불가능한 꿈을 꾸게 된 주인공의 유별난 욕망에서 발원하지만, 한 개인의 허무맹랑한 망상이라 매도하기엔 그 간절함이 사뭇 애틋하고 절박하다. 어릴 적부터 새에 미쳐 ‘버디(birdy)’라 불렸던 그는 결국 실패한다. 아니,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깨닫고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정신을 놓아 버린다.
실어증과 거식증이 동반된 기억상실을 겪으며 병동에 갇힌 버디에게 어릴 적 동네 친구였던 알폰소(니콜라스 케이지)가 찾아온다. 알폰소 역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 얼굴에 붕대를 친친 감은 상태다. 버디는 알폰소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 말도 없고, 간호사가 떠먹여주는 음식 앞에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둥지 안의 새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 버디의 동공이 몽롱하다. 그러면서 알폰소의 회상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버디의 집엔 비둘기들이 가득하다. 버디는 필라델피아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비둘기들의 서식처를 모조리 꿰고 있다. 깃털을 잔뜩 모아 꿰맨 옷까지 만들어 입고 둘은 비둘기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가 한번은 높은 탑 꼭대기에 둥지를 튼 비둘기를 잡으려다 버디가 추락한다. 알폰소는 기겁하지만 허공에서 떨어지는 버디의 표정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버디는 모래를 가득 쌓아둔 곳에 떨어진다. 큰 부상은 아니다. 새가 되려는 버디에게 그것은 위험천만한 사고라기보다 꿈의 목전까지 도달했다는 기쁨의 징조일 따름이다.
좌초된 꿈과 희망, 그리고 상처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다. 버디의 부상이 회복되자 둘은 폐차장에서 일을 하며 푼돈을 번다. 고철 덩어리가 된 포드 승용차 한 대를 안간힘 써서 수리해서는 바닷가에 놀러 간다. 알폰소는 여자 꼬시기에 정신이 팔려있고, 버디는 처음 본 바닷속에서 숨을 참는 법을 익히며 여전히 새가 되는 방법에 골몰한다. 롤러코스터를 타고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든 채 벌떡 일어설 기세다. 자신은 안중도 없는 버디더러 한 여자가 “사이코!”라며 학을 뗀다. 알폰소의 작전 실패.
버디는 새밖에 모르는 젊은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레슬링 선수였던 알폰소가 월남전에 참전한 후, 분신처럼 아끼던 노란 새가 죽자 버디 또한 상심한 상태로 전쟁에 참전한다. 어느 기발하고 엉뚱한 소년들의 모험담처럼 여겨지던 이야기가 불현듯 심각해진다. 개인의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 나고 거대한 체제와 권력의 탐욕이 불러일으키는 전쟁의 화마가 젊은 그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씻기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버디는 여전히 새가 되지 못한 채, 인간의 기본 조건마저 상실해 버린 상태다. 알폰소 역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상황. 영화가 직시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 좌초된 희망과 꿈에 대해서다.
버디와 알폰소의 놀이, 또는 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적 삶은 늘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의 규율과 법규에 의해 가로막힌다. 삶을 즐기고자, 꿈을 구현코자 하는 둘의 행동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건 항상 부모와 경찰(공권력)이다. 제도와 규칙은 그들에게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부비트랩과도 같다. 구닥다리 포드 승용차를 빼앗아가는 건 알폰소의 아버지고, 비둘기로 가득한 버디의 공간을 때려 부수는 건 버디의 어머니다. 모두 젊은이의 삶을 하나의 통제 권역 안에 가둬두려 하는 권력체계를 의미한다. 나아가 전쟁터에 젊은이를 동원하는 국가 권력이 개입한다. 전쟁터에서 쓸모 없어진 버디와 알폰소는 모종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한다. 버디는 그렇게 희생되어 말도, 의지도 상실한 채 새가 되겠다는 몽상에 완전히 함몰된다.
그들에게 삶은 늘 전쟁터였다
그런데, 버디를 찾아온 알폰소가 문득 중얼댄다. “넌 정말 새가 되었구나.” 굉장히 자조적인 어투다. 버디는 허구한 날 새처럼 몸을 웅크린 채 병동 한쪽 창밖만 응시한다. 언제든 날아갈 수 있을 거라는 듯 그때나마 잠시 눈빛이 영롱해진다. 그 순간, 정말 버디는 새를 닮았다. 마음껏 날아다녀서가 아니라, 새장에 갇힌 채 옴짝달싹할 수 없이 먼 하늘을 그리워하는 새. 좌절된 꿈이 엉망투성이가 된 삶 속에서 더욱 빛나는 듯한 역설이 꽤 아련하고 묘하다.
이 영화는 1985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매튜 모딘은 이 영화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둘이 많이 엇갈리지만, 젊은 시절 매튜 모딘의 연기는 가히 절륜하다 할 만하다. 잽싸고 날렵한 몸놀림에 선하고도 몽롱한 눈빛은 그 자체로 신비한 새를 보는 듯하다. 탄탄한 몸매와 천연덕스러운 익살과 능청으로 일관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도 풋풋하다. 영화는 제목의 원뜻과는 달리, 일종의 버디무비(buddy films: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룬 영화)라 할 만하다. 회상 장면에서의 순수한 젊음과 병동에서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의 교차가 밀도를 증폭시킨다.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몸도 영혼도 일그러진 채 세상 한 귀퉁이에 처박히게 될 운명이 칼로 자른 듯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
월남전이 아니더라도 성인이 된 그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전쟁터다. 그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싸우고, 꿈이 좌절되었기에 싸우며, 강제로 차압 당한 꿈을 되찾으려 끝끝내 싸울 수밖에 없다. 둘은 같이 병동을 탈출한다. 새장을 부수고 날아오르려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통제와 규율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꿈을 되찾으려고 경계 지어진 금지선을 넘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버디는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사람이 뛰어내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높디높은 허공. 버디는 정말 뛰어내린다. 알폰소가 경악하고, 관객들도 헉 숨이 멎는다. 그런데 묘하다. 어처구니없기도, 다행스럽기도, 왠지 속았다 싶기도 한 반전이 일어난다. 동시에, 당연히 저럴 수밖에 없겠지 싶은 안도감과 함께 꿈과 좌절도 밍밍해진 채 엔딩된다. 아니, 밍밍한가 싶다가도 뭔가 더 큰 희망이 그들에게 싹 틔워날 수도 있겠다는 암시가 느껴진다. 허망한 듯 쉬이 보기 힘든 걸출한 반전(反轉)이다. 너무 절묘해서 달콤한 배신감(?) 마저 느껴질 정도. 결국 버디는 날아오른 것인가.
반전되는 꿈, 다시 반전되는 삶
내용상으론 반전(反戰) 영화로 알려졌지만, 이 작품에서 더 인상에 남는 건 앞서 말한 ‘반전(反轉)’이다. 스토리의 반전이기도 하고, 주인공들 삶의 반전이 펼쳐질 수 있는 여지도 마련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람이 맨몸으로 하늘을 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버디는 어릴 적부터 항상 그것을 꿈꿔왔다. 그래서 미쳤고, 그래서 상처받았고, 그래서 세계의 불순물 취급당하며 싸늘한 병동에 갇혔다. 갇힌 상태에서도 버디는 계속 꿈꾸고 또 꿈꾼다.
벌거벗은 채 새처럼 웅크린 그의 모습을 보는 건 희한하게 명상적이다. 아울러 강렬한 도전의식이 느껴진다.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걸 반드시 하겠다는 사람이 늘 그러하다. 비웃음도 조롱도 그들에겐 꿈을 더 키워나가게 하는 양식이 된다. 정말 내가 하늘을 날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난 이미 하늘을 내 안에 품고 있는걸? 잘 봐, 내가 지금 이렇게 날고 있는데 이걸 실패라고 말하는 당신들이 더 큰 실패자인 줄 모르는 거야? 아마 버디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설령 사실과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분명한 진심이라 아직도, 분명하게 여기고 있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