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돌아온 닉 퓨리의 <시크릿 인베이전>

닉 퓨리가 돌아왔다. 오역으로 인해 졸지에 엄마 찾던 그 오해의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 디즈니 플러스의 신규 웹 드라마 <시크릿 인베이전>의 주역으로 MCU의 본무대에 다시 올라온 것이다. 타임라인을 쭉 훑어봐도 꽤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캡틴 마블>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쿠키 영상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좀 다른 행보를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MCU 세계관 내에서는 최초의 팀업 어벤져스를 주도한 쉴드의 국장이자, 그 결과 MCU를 이 자리에 있게 한 닉 퓨리. 그는 지난 인피니티 사가의 10여 년간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스토리를 하나로 묶어 거대한 세계관으로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해 왔다. ‘시크릿 인베이전’이라는 굵직한 이슈에 접근하기에 앞서, MCU 속 닉 퓨리의 지난 행적들을 돌아본다.


이때만 해도 어쩐지 젊어 보인다 <아이언맨>

닉 퓨리의 첫 등장은 <아이언맨>의 쿠키 영상이었다. 어벤져스를 서포트하고 임무를 하달하는 조직인 쉴드(S.H.I.E.L.D.)의 수장으로서, “내가 아이언맨”이라고 밝혀버린 역대급 히어로인 토니 스타크에게 “어벤져스 계획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원작 팬들은 닉 퓨리가 어떤 캐릭터였고 어벤져스라는 팀의 위상이 어떤지를 알았기 때문에 MCU가 단편 영화로 끝나지 않고,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갈 거라는 사실을 닉 퓨리의 얼마 안 되는 이 대사를 통해 눈치챌 수 있었다(원작 팬이 아니더라도 사무엘 잭슨의 등장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을 테고).

랜디스 도넛에서의 조우 <아이언맨 2>

이후 <아이언맨 2>부터는 중요 조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쉴드의 요원 '블랙 위도우' 나타샤를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비서로 잠입시킨 것 역시 닉 퓨리였다. 랜디스 도넛 간판에서 수트를 입은 채로 도넛을 먹고 있던 토니에게 나타샤의 보고서 내용을 말해준 것 역시 닉 퓨리. 이 영화에서 뉴멕시코에 이상현상이 감지되었다는 보고를 받기도 하는데, 바로 토르가 오딘에게 벌을 받고 묠니르를 빼앗긴 채로 추락한 사건 때문이었다.

<퍼스트 어벤저>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등장하는데... 70년간 잠들어 있던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컬쳐쇼크를 겪을 거라는 예상 하에 당시의 풍경과 비슷하게 구현한 세트를 마련했지만, 하필이면 스티브가 직접 관람했던 경기 중계를 틀어주는 바람에 적으로 간주당할 뻔했던 바로 그 사건이었다. 최근 이 장면은 스티브가 얼마나 편견 없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재평가(?)를 받기도. 2차 세계대전 시절이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미 현지에서 심각할 시절이었음에도 닉 퓨리가 자신의 상사라는 것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캡틴이야말로 편견 없는 히어로임을 증명한 것이라며(...).

완전히 바뀌어 버린 뉴욕 한복판에서 당황하는 캡틴 앞에 등장한 닉 <퍼스트 어벤져>

그 후 뉴욕 사태를 그린 <어벤저스> 1편에서는 드디어 구체화된 히어로 팀 어벤저스의 조력자로 구체적인 활동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전반부에서는 이 팀업에 소속된 제각기 다른 배경의 히어로들을 그렇게 믿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 어벤져스를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뉴욕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금 힘을 합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였다. 최우방의 조직이었던 쉴드조차 하이드라에 잠식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정보전에 강한 블랙 위도우를 통해 내부 정보를 계속해서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이드라의 수하들로 채워진 쉴드의 수뇌부가 퓨리를 제거하려 하자 닉 퓨리는 마리아 힐과 협력하여 실제로 자신이 죽은 것처럼 연기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SUV를 몰고 시내를 질주하며 벌이는 추격전은 꽤나 명장면 중 하나(에어컨만 멀쩡하다는 AI의 대사가 압권).

에어컨…중요하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MCU와 이제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게 되었지만, 드라마 <에이전트 오브 쉴드>에도 여러 번 등장해 활약을 펼쳤다. 비밀스럽게 진행하는 일이 꽤 많은 닉 퓨리의 행적 몇 가지가 밝혀졌으며 쉴드 재건을 돕기도 했다. 여기서 보여준 콜슨 요원과의 진한 케미는 꽤나 인상적이기도 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헬리캐리어를 타고 나타나는데, 한계에 도달해 있던 어벤져스들에게 통신을 보내며 특유의 별 거 아니라는 말투로(!!) 소코비아 주민들을 구출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준다. 길지는 않았지만, 꽤나 영화적으로 눈길이 갔던 장면 중 하나.

이후 본격적인 대전쟁이었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지만 (늘 그랬듯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쿠키 영상에서는 그 유명한 오역 장면으로 괜히 화제가 되기도... 거리에서 '핑거스냅'을 맞아 먼지로 사라져 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때 캡틴 마블에게 오래된 호출기로 통신을 보내면서 캡틴 마블의 등장을 알렸다.


<캡틴 마블>에서는 어떤 영화에서보다 등장 분량이 많았다. 영화에서 닉 퓨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쉴드의 국장 퓨리보다 훨씬 과거의 시점인 1995년으로 돌아간다. 관리자가 아닌 현장 실무자일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익숙한 '트레이드 마크' 안대 없이 멀쩡한 두 눈을 자랑하고 있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동안엔 웬만한 일에도 동요하지 않던 닉 퓨리가 당시엔 외계인이나 초능력이 익숙하지 않을 시절이라 그런지 진심으로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닉 퓨리는 '캡틴 마블' 캐롤 댄버스를 도와 과거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크리와 스크럴의 싸움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제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지구 밖으로부터의 위협을 직시하게 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벤져스'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닉 퓨리의 머리에서 나왔으며,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 캡틴 마블을 위시한 크리와 스크럴의 싸움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MotherFluken! 흉터를 얻고도 데려가 키운 걸 보면 집사임에 틀림이 없다 <캡틴 마블>

가장 늦게 공개되기는 했지만 닉 퓨리가 왜 어벤져스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계획했는지, 그리고 상층부가 이들을 믿지 않을 때, 그를 배신했을 때조차 한결같을 수 있었던 이유가 조금이나마 드러났던 영화였다. 따지고 보면 <캡틴 마블>은 '캡틴 마블'의 첫 등장과 기원 서사로서는 다소 부족할 수 있었지만(물론 사람마다 평가는 다를 것이다) 어벤져스의 기원과 시작을 엿보며 지난 MCU 속 닉 퓨리의 일대기를 하나하나 엿볼 수 있었던 셈.

이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는 사실 닉 퓨리는 관객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우주에 나가 있었고, 지구에 있었던 닉 퓨리는 스크럴 장군인 탈로스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벤져스 멤버들을 비롯해 다수의 히어로들에게 중요한 조언자이자 협력자로서 활약했던 그가 언제부터 그가 아니었는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아 도리어 충격을 자아냈다.

<캡틴 마블> 쿠키 영상에서 작성한 어벤져스 프로젝트의 초안, 이후 아이언맨의 손에도 쥐어진다


새롭게 시작하는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시크릿 인베이전>은 바로 이 시점에서 출발한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닉 퓨리 국장 역시 탈로스였다면, 대체 닉 퓨리는 언제부터 우주에 있었고 탈로스는 언제부터 닉 퓨리인 척하고 모두를 속여 왔단 말인가. 더불어 <캡틴 마블>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 탈로스와의 협력은 어떤 식으로 MCU의 뒤안길에 스며들어 있었을까? 그 모든 사실을 밝혀 줄 드라마가 바로 <시크릿 인베이전>이다.

드라마의 기반이 된 코믹스 「시크릿 인베이전」, 익숙한 캐릭터들이 눈에 띈다

크리와 스크럴의 싸움을 다룬 유명 코믹스 이슈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제목도 동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구상의 모든 인물 중 스크럴의 능력과 정체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의 닉 퓨리가 주인공으로 활약할 드라마가 된 셈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닉 퓨리의 솔로 시리즈격으로 봐도 좋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재까지 공개된 <시크릿 인베이전>의 스토리 속에서 닉 퓨리는 보다 사적이고 비밀스러웠던 영역을 보여주는데, 탈로스와의 연계와 협력은 물론이고 현재까지 무슨 일을 해오고 있었는지, 그의 목표의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사적인 영역도 드러나는데, 농담인 줄만 알았던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의 한마디(부인에게 쫓겨났다는)가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각선으로 토스트 잘라먹던 닉 퓨리는 과연 탈로스였을까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원하는 생명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고, 최근의 기억이라면 기억까지 복사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능력의 소유자가 하나도 아닌 종족 전체라는 점. 그것은 스크럴이 이후의 MCU에서 꽤나 강력한 빌런 혹은 아군으로 활약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은 또한 <시크릿 인베이전>이라는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해 주기도 하는데, 아군인 동시에 적인 스크럴 종족을 상대하기 위해 오랜 경험과 실력을 지닌 노익장(이렇게 말하니까 좀 슬퍼지기는 한다) 닉 퓨리가 대체 어떤 방법을 강구할지 기대되기 때문이다.


MCU 10년간의 닉 퓨리는 요약하자면, 이렇다 할 강력한 전투 장면 하나 없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보여준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삶과 문제로 늘 바빴던 어벤져스 멤버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계기를 주었고, 그들이 갈등과 고민으로 인해 낭떠러지 앞에 서 있을 때 가장 힘이 되는 조언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닉 퓨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페이즈4를 위시한 멀티버스 사가의 초창기 매력 포인트는 그것이었다. 조력자와 협력자, 사이드킥에 머물렀던 캐릭터들이 주요 무대로 등장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새로운 본 공연의 시작. 어벤져스의 설계자이자 리드였지만 본 무대에서는 히어로가 아닌 히어로들의 협력자에 그쳤던 닉 퓨리가 어떤 식으로 상황을 타개하고 목표를 이루어 나갈 것인가를 다룰 것으로 보이는, <시크릿 인베이전>은 그 목표에 더 맞닿아 있다.

<시크릿 인베이전>

지금까지의 MCU 페이즈4가 보여준 성과가 그리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기에 더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MCU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지난날의 히어로들이 이루어낸 성과에 대한 충분한 존경과 인정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것들은, 자기들 딴에는 유머였을지언정 현재의 MCU가 있게 했던 많은 히어로들에 대한 평가절하를 통해 새로운 히어로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에 더 치중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게 오랜 팬들에게는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을 왜 그들은 아직도 모르는 것 같을까.

어쨌거나, 캡틴 아메리카 트릴로지 중에서도 최고라고 평가받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보여주었던 그 느낌을 <시크릿 인베이전>이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속았음을 인정할 수 있는 재치 있고 현명한 반전, 그 반전 속에서도 또다시 반전을 이루어내는 닉 퓨리를 볼 수 있길 바라며.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