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모인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는다. 가운데 놓은 양푼엔 삶은 대게가 수북이 쌓여 있다. 수저를 내려놓고 양손을 바삐 움직이는 어린 남매에게 성호(강길우)는 게살 발라 먹는 법을 차근차근 일러준다. 경희(장선)는 그런 성호가 못마땅한 눈치다. 돼지고기 한 근 떼어와서 구워 먹으면 훨씬 싸고 편할 텐데 굳이 비싸고 귀찮은 메뉴를 골랐다. 경희는 곧장 “니네 아빠”를 향해 불만을 터뜨린다. 맛과 멋은 알아도 돈 귀한 줄은 모르는 남자.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장사”하며 손님과 씨름하는 아내를 본체만체하는 남자. 부모가 그렇게 실랑이하는데, 아이들은 심드렁하다.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가던 열두 살 명은(문승아)은 TV로 시선을 돌린다. 아프고 배고픈 사람들이 화면에 연달아 등장하고 아나운서는 불우이웃 돕기 ARS 성금을 독려한다. 명은이 전화를 걸겠다고 나서자 곧장 타박이 날아든다. 성호와 경희에 따르면 저들의 가난은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다. 우리처럼 열심히 살지 않은 탓에 맞이한 결과다. 1996년 봄, 그날 저녁 밥상에서 명은이네 가훈이 탄생한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비밀의 언덕>은 도입부에서 한 가족의 형편과 각기 다른 입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집안을 이끌 능력이 없는 성호는 방관하듯 물러나 있고 경희는 홀로 생계를 꾸리느라 허덕인다. 부부는 아이들을 경유해 서로 원망을 터뜨리는데, 남매에게 이러한 다툼은 이미 익숙하다. 주지도 받지도 말라는 가훈은 언뜻 야박하게 들리지만, 경희 편에서 보면 많이 당해본 사람의 우격다짐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새아버지와 남동생을 묵묵히 부양해봤자, 젓갈 가게에 온 손님들 비위를 아무리 맞춰봤자 경희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사람만큼 못 믿을 존재도 없다는 것이 경희가 깨우친 세상 물정이다. 명은은 이토록 비릿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 친절을 베풀고 관심을 얻고 싶은 소녀에게 주고받기를 금지하는 집은 삭막한 공간이다. 종일 젓갈 냄새를 풍기는 엄마의 억척스러움과 아침이 밝아도 잠만 자는 아빠의 게으름 모두 명은에게 부끄러움을 안긴다.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받은 후, 명은은 가장 평범한 가족을 상상하며 엄마를 가정주부로, 아빠를 회사원으로 거짓 소개한다.
명은에게 학교는 또 다른 세계다. 집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충분히 주목받거나 칭찬을 듣는 일이 학교에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명은의 두 마음을 나란히 비춘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족을 갖고 싶은 마음과 저만의 특별함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고비를 넘기고 나서 명은은 후자에 집중한다. 반장 선거에 나가고, 담임 선생님 애란(임선우)의 격려에 힘입어 글짓기 대회에 참가한다. 엄마는 “주제 파악”하라며 모진 말로 다그치지만 명은은 새로운 세계를 일구는 재미에 푹 빠져든다. 교실에 ‘비밀 우체통’을 설치해서 제 소망을 하나씩 실현하는가 하면, 자주 지각하는 선생님을 대신해서 자습을 감독하거나 친구들의 싸움을 중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명은은 원고지 위에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창작의 기쁨을 맛본다. 글쓰기는 매력적인 과제다. 잘하면 여러 사람 앞에서 상장과 박수를 받고, 자신을 기특하게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도 차지할 수 있다. 명은은 책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책을 빌려 읽고 사전을 뒤지며 단어를 고르는 사이, 소녀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안전한 성장담에 기대지 않으려 한다. 성장이란 대개 무방비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을 거치며 진행되는 법이라고 일러주듯 오히려 또 다른 위기를 펼쳐 놓는다. 전학생 혜진과 하얀은 애써 쌓아 올린 명은의 세계를 뒤흔드는 인물이다. 학교에서 ‘평화’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명은은 통일전망대로 견학을 다녀온다. 명은이 “통일도 한 걸음부터”라는 제목의 바람직한 글을 쓰는 동안, 혜진과 하얀은 부모가 이혼한 사실부터 타인에게 손가락질 받는 엄마의 직업까지 가감 없이 써내며 그들만의 평화를 정의한다. 명은은 문득 다른 가능성에 관해 생각한다. 거짓을 훌쩍 뛰어넘는 진실의 힘을 곱씹고, 착실한 노력을 배반하는 재능을 질투한다. 그 무렵 명은에게 도착한 주제는 ‘가족’이다.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가족이라서 소중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혜진과 하얀에게 전해 들은 비결처럼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할까. 영화는 고민에 빠진 명은을 따라가며 한 가지 비밀을 속삭인다. 진실과 거짓은 옳고 그름을 투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어려운 선택을 동반하는 난처한 문제라는 사실이다.
<비밀의 언덕>은 진실의 쓴맛과 거짓의 단맛 중 하나를 고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어렵지만 마냥 외면하기도 힘든 가족이라는 관계처럼,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결심한 다음에도 자꾸 주고 또 받기를 원하는 마음처럼 쓰고 단 맛은 얽혀 있다. 영화는 고유한 세계를 일구어 나가기 시작한 사춘기 소녀 명은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는 동시에, 그렇게 명은이 접한 단면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 과정에서 인물을 고루 비추는 신중하고 너그러운 태도가 돋보인다. 경희와 성호는 아이와 대립하는 가해자가 아니다. 영화는 그들을 시대나 환경의 피해자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인물마다 사정과 사연이 있음을 간과하지 않음으로써 <비밀의 언덕>은 끝내 희망을 품어 낸다. 누군가에게 현실을 견딘다는 것은 미래를 꿈꾼다는 뜻이고, 부모는 종종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랑을 실천한다. 한편, 아이가 벽에 부딪혀 성장통을 겪는 동안 어떤 어른은 넌지시 다른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엔딩에서 카메라는 명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새 해가 바뀌었고 6학년이 된 명은은 새 교실에 앉아 있다. 책상에는 또다시 가정환경조사서가 놓이는데 선생님이 신기한 제안을 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은은 연필을 쥔다. 처음 글을 쓸 때보다,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을 때보다, 더 설레고 신나는 명은의 표정을 잊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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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