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훨씬 끈질기다.” 25회를 맞은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이다. 단절을 종용하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여성들이 서로 연결되는 현장을 이어 나가기 위한 의지의 표명은 자그마한 희망을 품게 만든다.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지금 함께 손을 맞잡고, 여기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의 안부와 위로를 나누는 장을 만들기 위해 지난 26년간 부단히 노력해 온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번 8월 24일 목요일부터 30일 수요일까지 총 7일간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두 장소에서 진행한다.
14개의 섹션, 50개국 131편의 영화와 함께하는 이번 영화제는 전 세계 71개국에서 1,251편의 영화가 출품되어 출품 작품 편수와 출품 국가 수에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또한 25주년을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25주년 특별전: RE:Discover>, <박남옥 탄생 100주년: 여성감독 1세대 탐구>, <배우 윤정희 추모 상영>, 주제 특별전인 <예술하는 여자들, 외침과 속삭임> 등 새로운 주제, 새로운 특별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개별 상영작들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도 지대하다. 켈리 레이카트의 신작으로 시작하는 개막작부터 칸, 베를린, 베니스, 선댄스 등 유명 해외 영화제의 화제작들과 동아시아 여성 영화인들의 기대작들을 한데 모아 엄청난 라인업을 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티켓 예매를 서두르기 전, ‘씨네플레이’도 주요 섹션별로 독자들에게 추천작을 선정해 보았다. 추천작들을 훑어보면, 과거의 역사로부터 공명하는 현재까지, 예술과 사회 그리고 여성을 기록하고 재현하며 새로운 영화 언어로 목소리를 조망하는 여성 영화의 운동성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개막작
<쇼잉 업> dir. 켈리 레이카트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동시대 작가로 꼽히는 켈리 레이카트의 신작이 아시안 프리미어로 공개된다.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어떤 여자들>(2016) 등 켈리 레이차트의 페르소나인 배우 미셸 윌리엄스가 이번에도 함께 했다. 미셸 윌리엄스는 <쇼잉 업>에서 재능 있는 조각가 리지 역을 맡았다. 그녀는 새로운 전시회를 준비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려 노력하지만, 집주인이자 라이벌인 한 조와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를 돌보는 등 가족과 인간관계에 애를 먹는 중이다. 한낮의 소동극처럼 보이는 시놉시스와 달리, 산책하듯 미국 사회의 전경을 유영하는 켈리 레이카트의 작법은 이번 영화제의 슬로건처럼 끈질기게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함의 힘을 관조하듯 보여줄 예정이다. 주제 특별전인 ‘예술하는 여자들’과도 공명하는 영화 <쇼잉 업>은 개막작으로 영화제의 포문을 열기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발견
<밀리수탄도> dir. 밀리수탄도 봉겔라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던 다큐멘터리 <사적인 영화>(2023)는 오래된 16mm 영사기 점검을 위해 이베이에서 구매한 필름 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과 파시즘의 시대를 발견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국제 경쟁 부문인 발견 섹션에 초청된 <밀리수탄도>는 보다 더 내부의 시선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조망하고 있다. 영화의 감독인 밀리수탄도 봉겔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기 이전부터 흑인 중산층 여성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의 관점에서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진행해 왔다. <밀리수탄도>는 남아공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즉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부터 그 너머의 지금까지 감독 본인을 거쳐온 시대와 사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시선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새로운 물결
<위민 토킹> dir. 세라 폴리
전 세계 여성 영화인의 신작을 발견할 수 있는 비경쟁 부문의 꽃은 단연 ‘새로운 물결’ 섹션일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기대를 모으는 작품을 하나만 꼽자면 세라 폴리의 10년 만의 신작 <위민 토킹>이 아닐까? 아역 배우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2006년 첫 장편 연출작 〈어웨이 프롬 허〉를 시작으로, 〈우리도 사랑일까〉(2011),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2012) 등의 작품은 한국 관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신작 <위민 토킹>은 고립된 종교 공동체 마을 배경으로 남성들이 그간 자행했던 연쇄 성범죄의 끔찍한 실상을 알게 되고, 용서를 강요하는 장로들이 잠시 떠나는 동안, 대책을 논의하러 헛간에 모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발간된 미리엄 테이브즈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하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각색상을 받기도 했다. 삭막하고 황망한 색감으로 고립된 공동체 속 침묵을 드러낸 <위민 토킹>은 프란시스 맥도먼드를 필두로 루니 마라, 제시 버클리, 클레어 포이 등 당대의 가장 뛰어난 연기자들이 캐스팅 라인업에 포함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금 여기 한국영화
<홈그라운드> dir. 권아람
지난가을 서울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한차례 공개된 적 있던 권아람 감독의 다큐멘터리<홈그라운드>는 1996년 한국 최초로 개업한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레스보스’의 섬지기인 윤김명우씨를 중심으로 <홈그라운드>는 1970년대 명동의 바지씨, 치마씨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90년대 후반 개업한 ‘레스보스’를 경유하여 2000년대 초반 신촌 공원의 레즈비언 청소년들을 넘어 2020년 코로나 시대의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그들의 공간을 탐구한다. <홈그라운드>는 여성이면서 퀴어인 이들에게 안전한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홈그라운드>가 이 섹션에 포함된 것은 한국의 여성영화의 범위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안전하고 전유될 수 있는 온전한 공간’이라는 화두를 제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록과 질문을 병행하는 권아람 감독의 <홈그라운드>는 이번 섹션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작품 중 하나다.
25주년 특별전: RE:Discover
<잔느 딜망> dir. 샹탈 아커만
25주년을 기념하여 구성한 특별전 RE:Discover는 단순한 회고전을 넘어 여성 영화의 계보의 정전과 같은 작품을 탐구하는 시간을 가진다.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1988), 마를렌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1995), 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2002) 그리고 켈리 레이카트의 작품까지. 특별전에 포함된 7편의 영화는 모두 여성 영화사의 중요한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다. 그중 샹탈 아커만의 대표작 <잔느 딜망>은 지난해 『사이트 앤 사운드』의 ‘역사상 최고의 영화’ 1위에 오르며 기존 남성 중심의 영화사를 전복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사춘기 아들을 홀로 키우며 집에서 성매매를 하는 잔느의 일상과 ‘집’이라는 공간을 치밀하게 다룬 영화 <잔느 딜망>은 가정이라는 가부장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동시에 일상이라는 시간을 체화하게 만드는 영화 미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예술하는 여자들, 외침과 속삭임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dir. 로라 포이트러스
올해 영화제의 특별전 주제는 바로 예술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통해 ‘발화’를 이어가는 여성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루는 작품 9편을 상영한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단연 미국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기록하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가 되었던 낸 골딘의 이야기를 다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다. 포스트-펑크와 뉴웨이브 아티스트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이후 성소수자와 약물중독 문화, 그리고 뉴욕의 길거리에 날 것으로 놓인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초상을 포착하며 기존 사진 예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영화는 단순히 그녀의 작품세계를 유영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마약성 진통제로 고통받은 그녀가 배후의 거대 세력과 투쟁하는 모습으로 확장하며 예술에서 개혁으로 번져가는 그녀의 삶을 기록한다.
추천한 작품 외에도 여성과 이미지 사이의 기록과 재현이라는 문제를 다룬 <쟁점들: 이미지, 저항의 기술>, 10대 여성감독의 작품을 다룬 <아이틴즈>, 전 세계 퀴어영화의 신작을 다루는 <퀴어 레인보우>, 그리고 <박남옥 탄생 100주년: 여성 감독 1세대 탐구>, <배우 윤정희 추모 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 섹션에서 뛰어난 영화를 볼 수 있다. 8월 24일부터 1주일 간 진행될 예정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티켓 예매는 8월 11일부터 가능하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