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사그라지고 언어가 실패할 때도 사랑은 남으리라. <어느 멋진 아침>의 엔딩에 흐르는 곡은 그렇게 말한다. 산드라(레아 세이두)의 아버지 게오르그(파스칼 그레고리)는 희귀한 신경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탓에 점차 뇌 기능을 잃어간다. 그의 머리는 눈이 본 것을 정확히 처리하지 못해 입으로는 완전히 딴소리하게 한다. 평생 철학 교사로 살아온 게오르그의 삶은 질병과 함께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었다. 생각하기를 일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살아온 이에게 뇌 기능 저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좌절일 것이다. 마침내 집에서조차 길을 잃기 시작하자 가족과 사회복지사는 그를 요양원 대기자 명단에 올린다. 그런데 심각한 기억상실 때문에 자기 위치를 제대로 가늠하기 어려운 때에도 게오르그는 사랑을 말한다. 만난 지 5년 남짓 된 연인에 대한 애정만이 그에게 남은 전부 같다. 이건 노년에 접어든 어느 철학자가 “살아보니 결국 사랑만이 남았노라” 노래하는 상황이 아니다. 누군가 화장실 가는 걸 도와줘야 할 정도로 신체 기능이 저하된 노인이 마지막 행복을 애타게 더듬고 있는 것이다. <어느 멋진 아침>의 사랑은 고상하거나 우아하지 않다. 구원이나 해방과도 거리가 멀다. 대신 이 사랑은 누군가의 절실한 버팀목이 된다. 영화는 그러한 사랑을 중심에 두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풍경을 찬찬히 더듬는다.
산드라는 “사랑은 이제 나랑 상관없는 얘기 같아”라며 피곤한 얼굴로 거리를 누비는 워킹맘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8살 난 딸 린(카미유 르방 마르탱)과 둘이 사는 그녀는 통역사로 일하며 바쁘게 지낸다.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아버지를 돌보는 것도 산드라의 일. 게오르그가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게 되자 산드라는 적합한 요양원을 찾기 위해 애쓰는 한편 아버지가 남긴 방대한 책을 처리할 임무도 떠안는다. 상황이 이러니,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납득이 간다. 그러나 메마른 그녀의 마음에도 사랑은 찾아온다. 산드라는 죽은 남편의 친구 클레망(멜빌 푸포)을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그와 점차 가까워지다 곧 연인이 된다. 클레망은 산드라의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꽃을 피운다.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만지고 끌어안을 때, 영화엔 전에 없던 온기와 부드러운 생기가 흘러넘친다. 내내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던 산드라는 클레망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웃는다. 사랑은 과연 한 줄기 빛인 걸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 클레망에게 이미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짐을 싸 집을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흔들리고, 산드라는 불확실한 상황에 점차 지쳐간다.
<어느 멋진 아침>은 <내 아이들의 아버지>(2009), <에덴: 로스트 인 뮤직>(2014), <다가오는 것들>(2016), <베르히만 아일랜드>(2021) 등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 온 미아 한센-러브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다. 실제로 감독의 아버지는 게오르그와 비슷한 병을 앓았는데, 영화의 시나리오는 그때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면 서사의 규모가 전작들보다 훨씬 작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기존의 미아 한센-러브 영화엔 실제 경험과 관계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무럭무럭 키워가는 능청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인물들이 휴가를 떠나고, 글을 쓰고, 꿈을 꾸는 동안 시공간은 확장됐다. <어느 멋진 아침>은 멀리 떠나지 않는다. 밥 먹고 일하는 곳에서 상실과 혼란을 고스란히 마주해 봐야 한다고 말하는 듯 인물의 운신 폭도 그리 넓지 않다. 중산층 정도 돼 보이는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나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크리스(빅키 크리엡스)와 비교하면, 내내 일하면서도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산드라는 거리의 현실과 훨씬 더 가까운 인물이다. 그녀에겐 자신의 변화한 상태나 내면의 욕구에 가만히 집중할 시간이 넉넉지 않다.
눈에 띄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느 멋진 아침>은 여전히 미아 한센-러브의 특징을 고스란히 품은 영화다. 한센-러브의 영화는 과장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생생한 질감을 표현한다. 인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반복되는 행동을 물끄러미 관찰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야기를 하나로 모으고 정돈하려는 압력에서 벗어나 삶의 온갖 이상한 순간을 그 자체로 중요하게 다룬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심란한 생각에 울음을 터뜨릴 수 있고, 그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멋쩍게 고개를 돌릴 수도 있다.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가 그랬듯 말이다. 물론 영화에서 이러한 순간은 중심 줄거리를 보조하지 않는다. 때로 일관된 내적 논리 없이 일상의 순간들을 그저 나열하는 듯 보이기도 하나, 미아 한센-러브는 그러한 구성을 통해 줄곧 세상이 얼마나 아이러니로 가득한지 말해왔다. 딸들과 애틋한 기억 하나 없는 산드라의 엄마 프랑수아즈(니콜 가르시아)는 게오르그의 거취를 정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다투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인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는 가족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한센-러브의 영화에서 빛과 어둠은 언제나 한 몸이다.
뇌 기능 저하로 언어를 잃어가는 게오르그는 감독이 탐색해 온 세계의 모순을 육화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정확히 기술하고 설명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멀어져 자꾸만 길을 잃는 남자. 어쩌면 인간은 처음부터 길 잃는 존재로 태어나는 게 아니겠냐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오르그와 산드라는 각각 사랑을 붙잡기 위해 애쓴다. 이들에게 사랑은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누는 친밀한 감정이자 안정적 관계다. 그런데 영화가 바라보는 사랑은 조금 더 큰 듯하다. 우주 화학자라는 클레망이 아주 작은 먼지를 찾아내 거대한 세상을 분석하는 일을 한다고 말할 때,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다는 프랑수아즈가 ‘청년을 위한 기후 행동’을 하다 유치장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늘어놓을 때, 여기엔 우리와 같은 세상을 공유할 다음 세대를 향한 마음이 넘실댄다. 게오르그의 서재가 통째로 제자의 집에 옮겨질 때도 마찬가지다. 게오르그가 퇴행성 질환을 앓는 동안 산드라의 딸은 성장통으로 아파한다. 인간의 육체가 무수한 변화를 겪다가 마침내 사라져갈 때, 그들이 세상에 남겨둔 사랑은 언어를 넘어 지속된다. <어느 멋진 아침>이 다루는 사랑은 아주 개인적인 동시에 무척이나 보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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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