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창립자 가문이 대를 이어 이사장과 교장직을 맡아 온 사립학교다. 내가 학교를 다닌 2000년 무렵에는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학교는 전통과 명예를 강조했다. 학교는 역사 속 빛나는 선배들이 이룬 업적을 강조했고, 여름이면 비슷한 역사를 지닌 라이벌 학교와의 스포츠 대항전을 준비하느라 전교생에게 응원 연습을 시키곤 했다.
전통과 명예를 강조한다니 학풍이 보수적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당시 학교의 학풍은 “지 공부는 지가 알아서 하겠지”에 가까웠다. 수능을 앞둔 고3 학생들에게도 자율학습을 시키지 않았고, 그런 탓에 6교시가 끝나는 오후 3시 15분이 지나면 학생들이 우르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바로 옆 학교는 교장이 성적 우수 학생들을 따로 모아 특별반을 꾸려 개인지도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우리 학교는 그런 쪽으론 좀처럼 관심이 없었다.
반골 기질이 강한 교사들도 많았다. 특히나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대체로 반골이었어서, 학생들은 ‘자신이 어떻게 교장 선생의 매서운 눈빛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전교조 활동을 이어가는지’ 무용담을 들려주는 국어교사들과 함께 키득대곤 했다. 그런가 하면 내 고등학교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작문 교사는, 고전강독반에서 한 학기 내내 사마천의 「사기」 중 「자객열전」 편을 골라 읽혔다. 보잘것없는 필부가 품 안에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을 숨기고 한 나라의 임금이나 재상 같은 권력자를 베어버리겠노라 뜻을 세우는 내용으로 가득 찬 반골들의 퍼레이드 같은 책을 혈기방장한 고등학생들에게 읽힌 것이다.
그러니까 난 운이 좋았던 셈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전통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가르치는 동시에, 필요하다면 그런 권위에 감자바위를 먹일 줄도 아는 반골의 정신도 같이 가르쳤다. “명문대를 못 가면 너희 인생은 의미가 없다” 같은 소리를 하는 선생은 드물었고, 제 할 일은 알아서 하겠거니 방목하는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숨 쉴 구멍을 찾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보며 기시감이 들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전통과 순종을 강조하는 미국의 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은 부모들이 정해준 미래를 향해 착실히 공부할 것을 강요받는다. 학생의 자율과 자유의지 같은 건 명문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유예되어야 하는 것이고, 학생들은 학교가 제공하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커리큘럼을 아무런 의문 없이 착실하게 따라야만 한다. 그런 학교에, 웰튼 졸업생 출신의 영어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부임하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엄격한 커리큘럼? 키팅은 그런 것에 얽매지 않는다. 그는 ‘시의 완성도’와 ‘주제의 중요성’을 그래프로 그려서 ‘시의 위대함’을 잴 수 있다는 비평 이론을 교과서에서 찢어버리라고 일갈한다. 시의 위대함을 그딴 그래프로 정량화해서 잴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시가 내 마음에 얼마나 와닿는지 직접 느끼는 것이 중요하니까. 자율성? 대입 이후로 미루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 키팅은 학생들에게 자기가 걷고 싶은 속도로, 걷고 싶은 방향대로 걷는 법을 가르친다. 안전하고 보장된 미래? 키팅에겐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키팅은 첫 수업부터 학생들에게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고 강조한다.
닐(로버트 숀 레오나드)과 그의 무리들이 키팅 이전에도 마냥 모범생들이었던 건 아니다. 찰스(게일 핸슨)는 애초부터 기숙사 안에서도 틈만 나면 담배를 태워물고 연기를 뿜어대는 골초였고, 믹스(알레론 루지에로)와 피츠(제임스 워터스톤)는 ‘스터디 모임’에서도 딱히 공부를 한다기보단 자신들이 손수 만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키팅을 만난 이후 닐과 그 무리들은 한층 더 대담해진다. 닐은 보수적인 아버지(커트우드 스미스)의 말에 순종하는 대신 몰래 연극 오디션을 보고, 녹스(조쉬 찰스)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크리스(알렉산드라 파워스)에게 제 연정을 당당하게 고백한다. 학생 시절 키팅이 만들고 활동했던 소모임 ‘죽은 시인의 사회’의 계승자를 자처한 소년들은, 밤마다 동굴 속에 모여 시를 읊고 사랑을 노래하며 자유를 갈망한다.
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키팅이 쫓겨나던 날, 심약하고 소심했던 소년 토드(에단 호크)는 제일 먼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낸다. “선생님, 우리 모두 억지로 사인하게 시켰어요. 믿어주세요. 정말이에요.” 영화 내내 제대로 목소리를 내 본 적 없던 소심한 소년 토드는, 키팅의 가르침에 화답하듯 알을 깨고 나와 무엇이 옳은지 항변한다. 키팅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을 뿐, 닐의 비극적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건 키팅의 잘못이 아니라고 외친다. 그 유명한 “오 캡틴, 나의 캡틴” 장면이 뜨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학생들이 의자 위에 올라서는 퍼포먼스가 근사해서가 아니다. 학교가 제시하는 커리큘럼을 착실하게 따르던 소년들은, 키팅 덕분에 다들 자기 의지로 권위에 저항해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퇴학시키겠노라 으름장을 놓는 달튼 교장(노먼 로이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의 가르침이 틀리지 않았노라 말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뜨겁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물론 내가 다녔던 학교에 키팅처럼 교과서를 찢어버리라고 말하는 과격한 교사는 없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 동안 정해진 진도를 나가는 대신 자신이 즐겨본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 시간 내내 학생들과 영화 비평을 나눴던 교사는 있었다. 키팅처럼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면서 문학 수업을 하는 독특한 교습법을 자랑하는 교사는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자객열전」 같은 위험천만한 텍스트를 가르치면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싱긋 웃어보인 교사는 있었다. 키팅처럼 “오늘을 즐겨라”고 말한 교사는 없었다. 대신 아이들의 모의고사 성적에 한숨을 쉴지언정, 3시 15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귀가시킨 교사들은 있었다. 학교는 그런 교사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적당히 눈감아주었고, 덕분에 나와 내 친구들은 숨이 덜 막히는 고등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키팅 같이 대범한 교사는 없었으나, 다른 교사들이 n분의 1 어치씩 키팅의 몫을 해줬으니까.
이젠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가 됐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어느새 자립형 사립고가 되어서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학교가 되었고, 교육현장에서 진도를 나가는 대신 딴 짓거리를 하는 키팅 같은 교사들은 이제 좀처럼 환영받지 못한다. 아이들의 입시를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된 교사들은 매우 보수적으로 수업을 운영해야 하고, 반골이 되는 법 따위를 가르쳤다간 대번에 학부모들의 항의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학교는 교사의 재량을 존중하고 보호해주는 대신 학부모들의 크고 작은 항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학교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교사들은 키팅이 그랬던 것처럼 자꾸만 떠밀린다. 그리고 어떤 교사들은, 떠밀면 떠밀리고 흔들면 흔들리다가 그만 영영 쓰러져 버리고 만다.
국회 앞에 모인 교사들이 전부 키팅 같은 교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이들에게 정해진 커리큘럼만 기계적으로 가르치는 학습 AI가 되고 싶어서 교사의 길을 걸은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싶어서 교사가 된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게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고, 가르치다가 죽지 않을 수 있게 해달라고 모인 이들을 보며 나는 다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린다. 아무도 키팅처럼 가르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는, 맨날 영화가 명화라고 이야기하고 저런 스승이 참스승이라고 말하면 뭐하는가. 영화가 그리도 좋았다면, 우리 삶 속에서 키팅 같은 스승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