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국제영화제 평생공로상 수상 축하! 오래전 양조위를 댕무시했던 한 평론가의 참회

<아비정전>(1990)은 당시 유행하던 홍콩 누아르 장르의 화려한 총격전을 기대했던 팬들의 분노를 산 영화로 유명하다. 영화 속 장국영이 필리핀까지 가서도 엄마를 만나지 못한 채 ‘발 없는 새’ 얘기를 하며 세상을 등지고, 무슨 역할인지 알 수도 없는 양조위가 마지막에 뜬금없이 등장해 담뱃불을 붙이고 머리를 빗으며 외출 준비를 하며 영화가 마무리될 때 그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우정은 약속이다!”라는 한국 포스터 카피만 보고 ‘영화에 나오는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 장학우 중에 약속을 안 지킨 놈이 누굴까, 이거 진짜 큰일 났다. 홍콩 누아르의 결정판이 나오겠구나!’ 하고 기대했던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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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가 화가 나서 ‘그런데 양조위는 언제 나오지?’라는 궁금증도 사라졌을 무렵, 양조위는 그야말로 마지막에 잠깐 나와서 거울을 보며 빗질만 하더니, 낮은 천장으로 인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돈 몇 푼만 챙겨 들고 나간다. 요크(장국영)가 죽으면서 끝난 것으로 보였던 영화의 마지막에 그야말로 쓸데없는 장면이 덧붙여진 것이다. 그 장면의 사연은 이렇다. 데뷔작 <열혈남아>(1988)로 주목받은 왕가위의 두 번째 영화에 장국영, 장만옥, 양조위, 유가령, 장학우 등 최고의 캐스팅이 꾸려지면서 제작자 등광영은 기세가 등등했다. 화려한 제작발표회와 함께 촬영이 시작됐고 성룡 등 딱히 영화에 관계없는 홍콩 영화인들도 종종 촬영장을 방문했다. 애초에 도박꾼으로 설정된 양조위는 아비의 오랜 친구였다. 경찰로 등장해 아비로부터 실연당한 수리진(장만옥)과 만났다가 결국 홍콩을 떠나 마도로스가 되는 유덕화처럼, 양조위 또한 그렇게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할 예정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분량을 꽤 많이 촬영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그즈음 유가령과 막 사랑을 키워가던 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양조위는 자기 촬영 분량이 있을 때도 현장에 나갔고, 자기 촬영 분량이 없을 때도 유가령의 보호자처럼 현장에 나갔다. 그러니까 양조위는 사실상 장국영보다 <아비정전> 촬영 현장에 더 오래 머문 배우인 셈이다. 그런데 왕가위는 2살 위 형이자 당시 홍콩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던 장국영에게 완전히 매혹되어 하염없이 장국영 장면에만 빠져들었다. 앞뒤 맥락 없이 들어간, 그 유명한 장국영의 맘보춤 장면이 그를 대변한다. 그처럼 왕가위는 장국영과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이 도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2부처럼 시작되어야 할 양조위 에피소드가 불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를 들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계약 관계상 양조위 장면이 있어야 했기에 현재의 버전처럼 마지막에 거의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다. 다른 배우들이라면 길길이 날뛰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양조위는 ‘감독의 의도’ 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별다른 불평을 표한 적이 없다. 어쩌면 유가령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준 영화라며 고마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에 저렇게 착한 배우가 또 있을까.

역시 왕가위의 <해피투게더>(1997)에서도 보영(장국영)을 보살피는 요휘(양조위)의 착한 면모는 도드라진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날에도 담요를 두른 채 코를 훌쩍거리며 부엌에 나가 보영을 위한 볶음밥을 만든다. 장국영이 세상을 뜨면서 왕가위 영화의 가장 커다란 부분이 뚝 떨어져 나갔지만, 그로 인해 왕가위는 <화양연화>(2000)와 <2046>(2004) 그리고 <일대종사>(2012)를 전혀 다른 ‘무드’의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장국영과 양조위는 왕가위의 영화 안에서 언제나 ‘과잉’과 ‘절제’의 두 얼굴을 연기했다. 양조위는 언제나 말을 아끼고, 상대방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며, 마치 주변의 공기마저 함께 정지시키는 것 같은 멋진 침묵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왕가위가 아니더라도 관금붕(<지하정>)과 허우 샤오시엔(<비정성시>)과 트란 안 훙(<씨클로>), 그리고 리안(<색, 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그를 통해 깊은 연민과 슬픔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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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양조위는 어렸을 적부터 가정사로 인해 거의 입을 닫은 채로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학교와 집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의 눈빛에서 느끼게 되는 깊은 슬픔과 태생적인 우울은 바로 그런 고독에서 기인할 것이다. <지하정>(1986)에서 무명 가수 친구가 죽고 수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사건은 오리무중이고 그는 “내가 그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탄식한다. <비정성시>(1989)에서는 아예 말 못 하는 사진사였다. 그렇게 그는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서 그저 휩쓸려 다니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첩혈가두>(1990)에서도 죽어가는 친구(장학우)를 보며 그저 말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방아쇠를 당겨 죽음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고, <중경삼림>(1994)에서는 실연의 고통에 그저 비누와 수건과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화양연화>에서도 차마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채 여자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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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왕가위의 서로 다른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장국영과 양조위의 결정적인 차이일 텐데, <중경삼림>에서 주변 인물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 천천히 움직이는 양조위를 보라. 세상과 달리 혼자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해피투게더>와 <화양연화>에서도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각각 녹음기와 앙코르와트 사원의 구석진 곳에서 속삭일 뿐이다. 반면 장국영은 <아비정전>의 오프닝 장면처럼, 장만옥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저 시계를 봐,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우리는 바로 이 1분을 함께 했어”라고 들이대듯 말한다. 양조위 특유의 소외와 관조가 맴도는 매력적인 무기력이랄까. 바로 거기에 깊이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어쩌면 긴 시간을 두고 장국영으로부터 양조위로의 페르소나 이동 자체가 왕가위 영화의 정서적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정서는 양조위가 악역을 연기하더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색, 계>(2007)를 함께 한 리안 감독은 “양조위의 깊은 눈빛은, 그가 어떤 잔인한 짓을 하고 나서 손에 묻은 피를 닦는 그 순간에도 ‘아니야, 그가 분명히 마음을 고쳐먹을 거야’라고 안도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앞서 <씨클로>(1996)에서도 그는 건달이면서도 ‘시인’이었다. 왕가위도 <일대종사>의 엽문 역할로 액션 연기에 그다지 능숙한 편이 아닌 그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엽문은 격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척 지적이고 교양 있는 문인이기도 했다. 감정을 잘 조절하고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 실제 양조위의 면모와 엽문이 무척 닮았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지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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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령과의 연애 또한 그렇다. 1989년 처음 만나 19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연애를 하다 2008년 7월 21일 부탄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1990년에는 유가령이 삼합회에 의해 납치돼 몹쓸 짓을 당한 적도 있었지만, 양조위는 자신의 지인을 총동원해 무사히 그녀를 구해냈고 자신의 영화 촬영을 포기하면서까지 극진히 간호했다. 그렇게 치유됐다고 생각할 즈음 거의 10년도 더 지나 당시의 납치 나체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양조위는 오히려 기자회견 때 “그런 일로 내 사랑이 흔들릴 일은 없을 것”이라며 오히려 프로포즈를 했다. 그처럼 변함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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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솔직히 그에게 미안하다. 이제는 뭐 워낙 오래된 과거의 기억이긴 하나, 한창 홍콩영화에 빠져있던 시절, 그는 너무나 ‘매가리’ 없고 심심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영웅본색>의 주윤발 같은 위풍당당함이 없었고, <천녀유혼>의 장국영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꽃미남도 아니었고, <천장지구>의 유덕화처럼 혈기왕성하고 욱하는 반항아도 아니었다. 뭐랄까, 그들 같은 ‘강렬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왜소하고 유순한 ‘친구’였다. <천녀유혼3>(1991)에 장국영 대신 그가 나온다고 해서 화가 났던 적도 있다.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TV 시리즈 <86 의천도룡기>(OTT에서 <의천도룡기 1986>으로 서비스 중이다)에서 보여준 매력을 영화에서는 쉬이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바로 그런 비범한 평범함이 그의 눈빛을 오랜 세월 더 깊게 만든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오래도록 우리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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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는 올해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양조위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색, 계>를 함께 한 리안 감독으로부터 황금사자 트로피를 전달받은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복받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아내 유가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강한 것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것이 강한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양조위의 눈빛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양조위의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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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와, 어느덧 그 장면이 <아비정전>의 가장 매력적인 순간 중 하나가 됐다. 양조위가 그저 말없이 외출 준비를 하는, 과거에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황당한 장면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왠지 운치 있고 시적인 감흥까지 느껴지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던 것일까. 어쩌면 그날 이후, 양조위가 너무나도 멋진 배우로 성장하고 진화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과거에 없던 감흥을 넘어 그가 <아비정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로 인해 마치 영화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마술을 부린다. 양조위는 바로 그런 배우다. 어느덧 그는 신계(神界)의 배우가 되었다.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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