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 개념은 ‘윤회’다. 이승을 떠나서도 삶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는 생을 ‘고해’라 일컫는다. 범박하게 추리면, 살아도 죽어도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윤회의 사슬을 끊고 스스로 부처가 되는 걸 ‘열반’이라 이른다. 황제의 삶이든 걸인의 삶이든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국 고통의 수렁이고 자기 망실과 허무의 반복일 뿐이다. 익히 잘 알려진 내용이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대부분의 범부들은 실감도 납득도 하기 힘든 사항이다. 왜 뜬금없이 불교냐고?


천재의, 가히 천재스러운 재기작?

레오 카락스는 괴작이라 평가된 <폴라 X>(1999) 이후, 영화계에서 거의 잊히다시피 했었다. 그동안 개인사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폴라 X>의 여주인공이었던 예카테리나 골루베바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2011년 사망했다. 같이 출연했던 남자 배우 - 제라르 드 파르디유의 아들인 기욤 드 파르디유도 2008년 3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영화감독 입장에서 대차게 말아먹은 영화 한 편의 후유증이 그런 식으로 다가온다면 누군들 삶이 지옥처럼 여겨지지 않겠는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사람이 일반적으로 겪을 수 있는 상처와 고통의 밀도를 감안해 그의 삶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홀리 모터스>(2012)는 레오 카락스의 아내가 죽은 다음 해 발표된 작품이다. 13년 만의 ‘재기작’이라고도 할 만하다. 한때, 프랑스 영화계의 천재라 불리던 그가 공백기 동안 어떤 절치부심을 했는지는 영화를 보고 나서 판단하면 된다. 영화계 대부분 인사들의 극찬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영화적 메시지와 에너지는 당연히 보는 이 각자가 판단하고 감당할 몫이다.

<홀리 모터스>는 딱히 줄거리를 요약할 것도, 내재된 의미를 분분하게 해석할 필요도 없는 영화다. 맨 처음 레오 카락스가 직접 출연하는 프롤로그가 있다. 백발이 희끗희끗해진 그는 담배를 피우며 고뇌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다가 숲의 형상으로 도배된 벽을 뚫고 관객들이 모여 있는 극장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클로즈업되는 한 소녀의 모습. 그의 딸일 수도, 극중 인물의 딸일 수도 있다. 부언컨대, 레오 카락스는 예카테리나 골루베바가 다른 남자 사이에서 낳은 딸을 지금도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랜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변신인가 몰락인가 놀이인가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오스카라 불리는 사업가의 모습이다. 셀린(에디스 스콥)이라는 여기사가 운전하는 하얀색 대형 리무진에 올라 업무를 시작하는 오스카. 얼핏 은행 간부 같은 모습이다. 스케줄을 확인한 그가 갑자기 변장을 한다. 리무진 안은 온통 분장 소품 등 잡동사니 투성. 가히 이동하는 분장실이라 할만하다. 오스카는 이후, 여덟 차례 변신을 한다. 걸인으로 시작해 모션 캡처 촬영장에서 우아하고 전위적인 액션을 펼치는 배우, 무덤가의 꽃을 게걸스레 뜯어먹고 모델을 납치하는 광인, 그리고 다정한 아버지에서 미치광이 떼 같은 악단을 리드하는 바얀 연주가 등. 리무진에서 한 번씩 내릴 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된다. 맥락도 개연성도 없다. 그저 변하고 또 변할 뿐이다.

그게 모두 하루 동안의 일이다. 모든 배역에 스케줄에 잡혀 있고 셀린은 매니저나 비서 역할이다. 식사도 리무진에서 한다. 리무진에서 내릴 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니 리무진은 숫제 여러 사람이 한데 묻힌 무덤이기도, 거듭 다른 사람으로 다시 변신하여 태어나는 무언가의 자궁이라고도 할 만하다. 파리 시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는 리무진이 문득 영구차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새하얀 영구차라니. 그 자동차의 이름이 ‘성스러운 자동차’다.


추악한 존재를 운반하는 '성스러운 자동차'

이름은 그렇지만 그곳에서 변신하여 나타나는 이는 결코 성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다정하고도 엄격한 아버지였다가 난데없이 두건을 뒤집어쓴 채 길가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은행원을 살해하기도 하고, 단검으로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는데, 그의 칼에 목이 찔리는 이(테오라 불린다)가 또 그와 똑같은 인물이다. 죽이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그는 인간의 모든 탐욕과 추함과 악과 누추함을 몸소 체현하는 자다. 그리고 다시 리무진 속. 모든 새로운 인물들이 만들어지는 공장이라고도 할 만한 그곳에서 그는 가끔씩 차창 밖을 본다. 그에겐 차창 밖 모든 것이 무대이고 극장이다. 반대로, 그가 리무진 바깥으로 나갈 땐, 그를 보는 모든 이가 그의 관객이고, 그 자신이 극장의 주인공이 된다. 이것은 영화감독 혹은 배우의 명백한 자기 반영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화의 마지막 30분 동안 등장하는 여인이 있다. 카일리 미누그가 연기하는 진이라는 인물이다. 오스카와 똑같이 하얀 리무진을 타고 다니면서 오스카와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둘은 각자의 운전수가 교통 시비로 대거리하는 와중에 조우한다. 모종의 과거를 공유하는 인물이라 여겨지나 자세한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카일리 미누그는 호주 출신의 팝 가수다. 다소 뜬금없는 캐스팅 아닌가 싶지만, 둘의 대화를 듣다 보면 왜 레오 카락스가 그녀를 캐스팅했는지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둘은 반갑게 해후했지만, 진은 “딱 30분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지금은 폐건물이 된, 예전에 둘이 같이 들르곤 했던 백화점 건물로 들어간다. 러닝타임을 확인하면 실제로 30분 정도 남은 상황. 둘은 과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여전히 자세한 곡절을 알 수는 없다. 그러다 진이 노래를 부른다. 역시 어느 아이와 관련한, 과거의 사연을 짐작할 만한 내용의 가사다. 노래를 마친 진은 20분 후 연인이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둘은 헤어진다. 밤이 이슥하고 하루가 막바지에 달한 시각이다. 오스카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리무진으로 돌아온다. 이후 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 영화의 유일한 반전이자, 가장 명확한 힌트라 할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길.

집으로 돌아온 오스카는 아내와 딸과 마주한다. 그런데, 아내와 딸이 이상하다. 이 역시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말하지 않기로 한다. 하루 동안 아홉 개의 인생을 사는 것. 아무리 배우라지만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 그 분열과 혼란을 한 사람이 견뎌낸다는 건 가혹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다시 살아나야 하는 건 비단 배우의 업(業, karma)만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매 순간 다른 사람이 된다. 불교에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고 명증한 인식을 가지는 것 자체를 허깨비라 여긴다. 그러한 자기 인식 탓에 고통도 상처도 커지는 것이다. ‘이’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을 대할 때엔 또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인간의 기본 속성이다. 인생이 연극이다, 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자동차 안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풍경이 프레임 짜인 허구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리고 또 차에서 내리면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딘가로 향하면서 다른 얼굴을 바꿔 써야만 하는 게 사람의 일상이다. 다만, 자신이 요지부동하는 유일무이한 자아라는 환각 속에서 억지로 가면을 벗지 않거나, 새로운 가면을 쓰게 될 뿐이다. 어쩌면 그게 삶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 거다. 자동차 이름이 ‘홀리 모터스’인 것은.


우리는 과연 ‘자기 자신’이기만 할까?

사람은 자신만의 은밀한 ‘자동차’ 바깥에서 더 적나라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 앞에서 스스로도 타인이 되어 존재의 무시무시한 압력으로부터 일탈하려는 노력.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같지만 다른 얼굴로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있다.

자동차(라 환유되는 ‘자아’라고나 하자) 안에선 고유한 자신이었던 것이 밖으로 나가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또는, 아예 인간의 기본 도덕이나 습성을 넘어서거나 못 미치는 존재가 되는 것. 어쩌면 사람은 자신만의 은밀한 ‘자동차’ 바깥에서 더 적나라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 앞에서 스스로도 타인이 되어 존재의 무시무시한 압력으로부터 일탈하려는 노력.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같지만 다른 얼굴로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그걸 마주하는 동시에 회피한다. 그 가면이자 본심이고 본심이자 가면인 얼굴을 스스로 까발리는 일. 그거야말로 이 윤회의 굴레에서 유일하게 마주할 수 있는 자신의 본성 아니겠는가. 나무관세음보살.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