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49>는 지루한 영화다. SF 액션 영화인 줄 알고 이 영화를 선택했던 관객들이 실망할 만도 하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인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와 한 핏줄이다. 그러니 전작과 같은 우울한 분위기의 SF 누아르 영화일 수밖에 없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전형적인 누아르 영화 장르의 공식에 따라 영화를 만들었다. 다만 그 배경이 미래일 뿐이다. 리들리 스콧이 상상했던 미래 사회의 비주얼은 당시 충격이었다. 지금 봐도 놀랍긴 하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역시 전작의 공식을 고스란히 따랐다. 전작의 엔딩 이후 30년이 지난 2049년이 배경인 <블레이드 러너 2049> 역시 숨을 멎게 만드는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시각적 아름다움은 할리우드의 거장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의 공이 컸다. 로저 디킨스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007 스카이폴>, <레볼루셔너리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파고>, <쇼생크 탈출>, <바톤 핑크> 등 수많은 영화의 촬영을 맡은 바 있다. 특히 코엔 형제와 함께 작업을 많이 했다. 그는 1995년 <쇼생크 탈출>부터 2016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까지 무려 13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촬영상 후보에 올랐지만 아직까지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했다. 많은 영화 전문가들은 이번에는 로저 디킨스 차례라고 말한다.
영화 매체 ‘인디와이어’ 역시 로저 디킨스의 오스카 수상을 지지하는 듯하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촬영, 특히 색의 사용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면서 로저 디킨스가 참고했을 만한 아름다운 촬영과 색감의 영화 12편을 소개했다. 낯선 영화들이 많이 있지만 한번쯤 눈여겨 보면 좋겠다.
검은 수선화 (1947)
“그림 같다”라는 표현이 있다. 어떤 아름다운 장면을 볼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림 같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경우일까. <검은 수선화>의 촬영감독 잭 카디프의 경우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의 차원이 아니다. 그는 뛰어난 색조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와 같은 접근법으로 조명을 사용했다. 히말라야 오지로 선교 활동을 떠난 수녀들의 이야기인 <검은 수선화>는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덮인 거대한 자연의 풍광도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낸’ 영화다.

- 검은 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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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마이클 포웰, 에머릭 프레스버거
출연 데보라 카
개봉 1947 영국
순정에 맺은 사랑 (1955) & 파 프롬 헤븐 (2003)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순정에 맺은 사랑>과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을 같이 얘기하는 이유가 있다. <파 프롬 헤븐>은 <순정에 맺은 사랑>을 재연 혹은 재해색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서크 감독은 1950년대 할리우드 고전기 멜로드라마의 장인이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상류층 부인과 정원사의 사랑을 그린 <순정에 맺은 사랑>의 서사 구조를 <파 프롬 헤븐>에서 동성애자임을 깨달은 남편(데니스 퀘이드)을 둔 백인 여성(줄리안 무어)이 흑인 남성(데니스 헤이스버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변주했다. 다만 영상에 있어서는 재연에 중점을 둔 것 같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순정에 맺은 사랑>에서 볼 수 있는 테크니컬러의 질감, 음영, 색채를 <파 프롬 헤븐>에서도 만들어냈다. 테크니컬러는 컬러 영화의 색 재현 방식으로 색채가 아름답고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 순정에 맺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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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더글라스 서크
출연 제인 와이먼, 록 허드슨
개봉 1955 미국

- 파 프롬 헤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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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줄리안 무어, 데니스 퀘이드, 데니스 헤이스버트
개봉 2002 미국, 프랑스
레오파드 (1963)
<레오파드>(<표범>, <들고양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렸다)는 계급 사회가 무너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역사적 변혁기가 만들어낸 풍경을 담아낸 서사극이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감독 가운데 한 명인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밀라노의 귀족 가문 출신인 비스콘티 감독은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유명했다. <레오파드>에서 그의 장기가 빛을 발했다. 화려한 색감의 궁전 연회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레오파드>의 원본 필름은 많이 훼손됐었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포함한 열성팬들에 의해 복원되기도 했다. <레오파드>는 196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 들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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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루치노 비스콘티
출연 버트 랭카스터, 알랭 들롱
개봉 1963 이탈리아
순응자 (1970)
<순응자>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보여준 미학의 정점에 있는 영화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트너는 전설적인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트라로다. 그는 <순응자>에서 치밀한 카메라의 움직임, 빛과 어둠을 경계 짓는 조명, 완벽한 화면 구도와 대담한 앵글 등으로 최고의 미장셴을 만들어냈다. ‘인디와이어’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순응자>는 1930년대를 배경으로 평범하게 살기 위해 무솔리니 정권의 비밀경찰이 된 한 남자(장-루이 트린티냥)가 자신의 스승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뒤 고뇌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비토리오 스트라로 촬영감독이 참여한 영화로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지옥의 묵시록>, <마지막 황제> 등이 있다.

- 순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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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출연 장-루이 트린티냥, 스테파니아 산드렐리
개봉 1970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대부 1, 2 (1972, 1974)
<대부>의 촬영감독 고든 윌리스는 ‘어둠의 왕자’라 불린다. <대부>의 오프닝 장면을 보면 그의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검은 화면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장의사 보나세라다. 컴컴한 방에 혼자 있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의 딸을 농락한 불량배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대부(말론 브란도)를 찾아왔다.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자 어둠 속에 목소리만 들리던 대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파라마운트의 임원들은 이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고 전한다. 고든 윌리스의 뛰어난 촬영을 볼 수 있는 영화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도 있다.

-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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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제임스 칸
개봉 1972 미국

- 대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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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알 파치노, 로버트 듀발, 다이안 키튼, 로버트 드 니로
개봉 1974 미국
배리 린든 (1975)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배리 린든>은 촛불 이외의 어떤한 인공 조명도 사용하지 않은 영화다. 이유는 영화 배경이 된 18세기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촛불에 의지해 실내 촬영을 하기 위해 존 알코트 촬영감독은 나사가 특수 개발한 렌즈를 구해야 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휘말리는 아일랜드 출신 청년의 인생을 담은 <배리 린든>은 3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존 알코트의 뛰어난 영상이 없다면 이 대작의 감동을 느끼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 배리 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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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라이언 오닐, 마리사 베렌슨, 패트릭 마지
개봉 1975 영국
천국의 나날들 (1978)
<천국의 나날들>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평가받는다. 네스토 알렌드로스 촬영감독은 <천국의 나날들>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다. 테렌스 맬릭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천국의 나날들>에서 알렌드로스는 1910년대 미국 텍사스의 대지를 마치 천국의 에덴동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기차, 구름, 밀밭, 허수아비, 바람, 석양, 달 등을 담아낸 영상은 카메라로 쓴 시와 다를 바 없다. 크레딧에 이름이 없지만 헤스켈 웩슬러도 촬영 작업에 참여했다.

- 천국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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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테렌스 맬릭
출연 리차드 기어, 브룩 아담스
개봉 1978 미국
블레이드 러너 (1982)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로저 디킨스에서 시작된 이 글에서 전작 <블레이드 러너>를 빼놓을 수 없다. <블레이드 러너> 조던 크로넨웨스 촬영감독은 기존 영화에서 보여준 촬영기법을 충실히 따랐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는 미래 사회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제논 라이트를 사용했다. 그전까지 촬영현장에서 사용하지 않던 조명이다. <블레이드 러너> 속 LA에는 스모그가 깔려 있고 늘 비가 온다. 도심에는 네온사인이 쉴 새 없이 번쩍인다. 크로넨웨스의 조명으로 인해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비주얼이 완성됐다.

- 블레이드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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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해리슨 포드
개봉 1982 미국
세븐 (1995)
<블레이드 러너>처럼 누아르 영화에서는 조명이 매우 중요하다. 데이빗 핀처 감독이 연출한 <세븐>에서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은 손전등(플래시 라이트)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신참 형사 밀스(브래드 피트)와 은퇴를 7일 앞둔 관록의 형사 소머셋(모건 프리먼)이 성서의 일곱 가지 죄악을 따라한 연쇄살인 사건 현장에서 빈번하게 손전등을 사용한다. 또한 악랄한 연쇄살인범에 맞서는 형사들을 대변하는 듯한 따듯한 색감의 조명도 특이할 만하다.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은 최근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 참여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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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모건 프리먼
개봉 1995 미국
화양연화 (2000)
왕가위 감독은 분위기의 끝판왕이다. <화양연화> 속 색감, 질감, 조명이 1960년대 초반 홍콩의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화양연화>에서는 붉은 톤의 화면이 인상적이다. 촬영뿐만 아니라 의상, 미술 역시 붉은 톤을 유지하고 있다. 장만옥이 연기한 수리첸은 자주 붉은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수리첸과 차우(양조위)가 만나는 호텔 복도는 온통 붉은 커텐으로 덮여 있다. 같은 날 한 아파트로 이사 온 남녀가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해 가까워지고 이별하는 과정의 감정을 색깔로 말하자면, 은은한 붉은빛이다.

-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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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장만옥
개봉 2000 홍콩, 프랑스
트리 오브 라이프 (2011)
앞서 소개한 <천국의 나날들>에 이어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가 하나 더 리스트에 있다.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이 참여한 <트리 오브 라이프>다. 루베즈키 촬영감독은 자신과 같은 멕시코 출신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그래비티>, <칠드런 오브 맨>),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버드맨>,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과 함께 작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2014년 <그래비티>부터 2015년 <버드맨>, 2016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까지 3년 연속 아카데미 촬영상을 가져간 것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인디와이어’는 이 세 작품 이전에 작업한 <트리 오브 라이프>를 더 높게 평가한 듯하다. <트리 오프 라이프>는 건축가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숀 펜)의 유년 시절 기억을 통해 우주의 기원까지 탐구하는 실험적인 영화다. 루베즈키 촬영감독은 테렌스 맬릭 감독 특유의 시적 영상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 트리 오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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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테렌스 맬릭
출연 브래드 피트, 숀 펜, 제시카 차스테인
개봉 2011 미국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